류기정

 

 

 

 

1


" 자, 이제 스위치를 켜겠습니다. "


탁. 스위치를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불꽃이 튄다. 

암흑뿐인 시야에서, 무언가 천천히 희미한 환영들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명암들, 밝게 점멸하는 빛, 깜박거리는 듯한 무늬들......


" 당신이 손에 쥐고 있는 건 공이에요.... 볼 수 있나요? "


의사의 목소리가 내게 물었다.

고개를 내려 손을 바라본다. 손에는 둥근, 배구공 정도의 크기의 공이 느껴진다. 하지만 둥근 형태가 보이는 것은 아니다. 이미지가, 격렬한 이미지들이 현란하게 어른거렸다. 손에서 공을 움직이자... 아, 얼룩덜룩한 이미지들이 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것이 공이로구나. 나의 뇌의 연합시각영역이, 이 정보들을 공의 형태로 잡아가기 시작하는구나.


나는 공을 내려놓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앞으로 움직여감에 따라, 시야는 온통 복잡한 빛과 그림자들의 움직임으로 혼란스럽다. 하지만 규칙성이 있다. 어두운 영역과 밝은 영역은 한 덩어리로 움직인다. 무엇일까. 천천히 어두움이 짙은 영역에 손을 대었다. 무언가 만져진다.


" 이게 뭐죠? "


" 책상입니다. 책상의 윗면이에요. "


그렇구나. 책상을 손으로 더듬어가자, 이미지들은 점점 정교해진다. 촉감의 정보가, 아직 불완전한 시각적 정보와 통합된다. 네모난 명암의 덩어리.... 나의 신경세포들은 지금 맹렬하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가고 있겠지.


천천히 벽 쪽으로 다가갔다. 흰 벽이겠군. 밝은 빛의 이미지가 시야를 가득 채운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방금 습득한 네모난 이미지의 어두움이 보인다. 하지만 거리나 크기는 감이 잡히지 않는다. 심호흡을 하고 그쪽을 향해서 똑바로 걸어나갔다. 그리고, 그 어둠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고 느껴질 때쯤 걸음을 멈추었다. 


손을 뻗었다. 손잡이가 잡혀졌다.


나는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나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싱긋 웃음을 지었다.


" 이 문으로 나가면 되나요? "


"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


비로소 그녀의 눈물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그림자가 시야에서 커지더니, 그녀가 날 끌어 안는 것이 느껴졌다.



2



6개월전, 전기톱 작업을 하던 중, 그만 파편이 눈에 튀어 두 눈을 완전히 실명했다. 수술로 시력을 되찾을 방법은 없었으며, 회복될 수 없을만큼 안구는 망가졌었다. 이런 사고를 몇십년 전에 당했다면 꼼짝없이 소경 신세가 될 수 밖에 없었으리라. 하지만 현대의학의 발달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뇌의 시각신경이 멀쩡하다면 다시 빛을 볼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주었다.


" 수백개의 미세한 전자침을 뇌의 뒤편에 있는 1차시각영역에 심는 겁니다. 그리고 선글라스에 장착된 소형 카메라로 받아들인 영상을 컴퓨터로 처리한 다음에, 뇌에 심어놓은 전자침을 통해서 뇌세포들에게 직접 자극을 가하는 거지요. 

- 원래 그 세포들은 망막으로부터 받은 영상신호로부터 자극을 받게 되어 있던 것들입니다만, 지금은 망막으로부터의 모든 신호는 끊겼으니까요... 그 뇌세포들은 이 인공적인 영상자극에 곧 적응할 수 있습니다. - 그렇게 되면 다시 앞을 볼 수 있게 되는 거지요."


이른바 <전극뇌내삽입술> - 뇌과학과 사이버네틱스 기술의 비약적인 발달로 인하여 가능해진 시술법이었다. 외과적인 시술로 대뇌의 피질에 직접 전극을 심어 통신함으로써, 주로 마비된 환자들이나 나처럼 시각을 잃은 환자들에게는 그야말로 획기적인 치료술이 아닐 수 없었다.


" 초창기에는 두개골 한쪽에 작은 구멍을 뚫어서, 그 쪽으로 전선이 통과해야 했지요... 그리고 환자는 등에 배낭처럼 컴퓨터를 짊어져야 했구요. 하지만 요새는 그 모든 것을 무선으로 하기 때문에 두개골에 구멍을 낼 필요가 없고, 컴퓨터장치도 극소화 되었습니다. 선글라스를 껴야 한다는 사실 외에는 전혀 드러나질 않아요. "


의사의 설명대로였다. 수술을 성공적이었고,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했다. 선글라스만 끼면, 예전처럼 다시 앞을 볼 수 있었으니까. 물론 처음부터 시력이 원상복구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꾸준히 연습하고 익숙해져야 하는 지루한 과정이었으며, 거의 한 달동안은 더듬거리며 다닐 수 밖에 없었다. 마치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 걸음마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하지만 다른 환자들이 그러했듯이, 이내 새로운 시각기관에 익숙해졌다.


다시 시각을 찾게 되어 나 자신도 매우 기뻤지만, 곁에서 노심초사하던 나의 약혼녀, 주디의 기쁨도 이만저만한게 아니었다. 그녀는 혹시 내가 영구적으로 봉사가 되지나 않을지 매우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 선글라스를 쓰니까 더 근사한걸요...."


그녀는 애써 미소를 띄며 말했다. 하지만 약혼자가 평생 선글라스를 낀 채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그녀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그건 나로서도 일견 당혹스러운 일이었으나, 그래도 아직까지는 다행스러운 마음이 더 컸다. 거울속의 나는 늘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데, 꽤 그럴듯해 보인다. 물론 벗으면 사고로 인한 흉터와, 감긴 두 눈이 있지만 말이다. - 내 얼굴을 어떻게 보았냐고? - 그건 아주 간단하다. 선글라스를 벗어서 내 얼굴쪽으로 돌리면 내 얼굴을 볼 수 있다. 나는 그런 방식으로 내 몸을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았는데, 그건 마치 유체이탈을 하여 자신을 바라보는 것만큼 낯선 경험이었다.






3



" 자, 이제 팔을 움직여 보세요. 어때요? 느낌이 나는 거 같나요? "


의식적으로 오른쪽 팔을 움직이려 애썼다. 그러나 내가 앉아있는 의자의 어깨쪽에 붙어 있던 로봇팔이 너무나 천천히 움직였다. 하지만 내가 의도했던 움직임은 아니다. 몇 번 애를 쓴 후에, 마음을 느긋하게 먹기로 작정했다.


이 기계에 익숙해지려면 또 시간이 걸리겠지. 나의 뇌가 새로운 장치에 적응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곧 익숙해지겠지.... 많은 절단 환자들이 이런 휠체어를 타고 다니지 않는가.


인공시각장치를 장착한 얼마 뒤, 나는 또다른 불행한 사고를 당하였다. 휴양지의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기 위해 선글라스를 벗어서 세면대 위에 올려놓았는데, 그만 카메라를 너무 벽에 붙혀서 놓는 바람에, 시야는 제로가 되고 말았다. 선글라스를 찾기 위해서 더듬거리며 움직이던 나는, 그만 실수로 열린 창문으로 추락하고 말았고, 불행하게도 그건 4층 높이였던 것이다.


- 불행중 다행일까. 수영장에 거꾸로 처박혀서 목숨은 건졌지만, 3번과 4번 경추(목뼈)의 골절로 인하여 목 아래로는 전신마비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절망적인 경우에도, 뇌내전극삽입술은 도움이 되었다. 대뇌의 운동영역과 감각영역에 광범위한 전자침을 심는 대수술을 받았고, 이 장비의 도움으로 휠체어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 그것을 과연 휠체어라고 불러야 할까. 내가 사용하는 최신의 휠체어는 바퀴대신 두개의 로봇다리가 달려 있었다. 2족보행로봇기술의 성과로, 과거에는 계단이나 울퉁불퉁한 길에서는 맥을 못추던 바퀴 대신, 안정적이고 융통성 있는 다리를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휠체어가 아니라 레그-체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팔다리가 모두 마비되었기 때문에, 팔 절단환자들이 사용하는 로봇팔을 레그-체어에 부착하였다. 이러한 종합적인 시도는 내가 세계에서 최초였는데, 마치 나는 커다란 기계갑옷을 입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강화복(사람의 움직임을 큰 힘으로 바꾸어 주는 로봇 형태의 1인용 중장비)을 입은 노동자 같아요."


그녀는 나를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 하며 말했다.

주디에게도, 이런 내 모습은 좀 적응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사실 나로서도 그랬다. 이건 너무 거창한 모습이 아닌가. 나는 기계팔로 어깨를 으쓱, 해 보이며 웃음을 지었다.


....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 남의 일로만 생각했던 전신마비환자의 처지가 되고 말았지만, 오히려 내 마음은 크게 절망적이지만은 않았다. 뭐랄까,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나 버렸고, 이 모든 것을 세익스피어적인 꿈에 불과한 것이라고 여겼던 것일까. 비현실적인 일이 과도하면, 그것들은 스스로 현실감을 상실하기 마련이다. 마치 꿈속에서 새로운 장난감, 새로운 탈것을 부여 받은 것처럼, 오히려 재미있다는 시선으로 관조할 수 있었다는 건 아이러니일까.


한동안 주디를 만나볼 수가 없었다. 궁금하기도, 내심 불안하기도 하였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녀가 날 떠나 버린다 하더라도, 나로서는 그녀를 잡을 만한 명분도, 그럴 의도도 없었다.


며칠뒤, 그녀는 돌아왔고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의 집에 드나들며 날 돌보아주었다. 그녀도 이 낯선 꿈에 동참하기로 한 것일까.



4



" ....등반이라니, 그건 좀 무리일 듯 싶군요. "


의사가 걱정스럽게 대답했다.


" 할 수 있습니다! 주디에게도 약속했는 걸요. 비록 기계에 의존해서 움직이지만, 전 아직 살아 있다구요. 제가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습니다."


" 하지만 너무 위험합니다. 만약 실족하거나, 넘어져서 레그-체어가 파손되었을 경우에는 거기에 탄 당신도 위험해질 수 있어요."


....맞는 말이다. 그런 어려움을 생각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 등반을 꼭 성공해 보이고 싶었다. 내가 아직 폐물이 아니라는 것을, 장애인이 되고 말았지만 남들과 다름없이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그것은 이런 나의 모습을 힘들어하는 주디나, 나 자신을 위한 확신을 주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레그-체어 시스템을 이용해서 몇 달이 지나자, 점차 이 시스템에 익숙해져서 어려움 없이 걷고, 요리를 하고, 화장실도 갈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는 목욕도 할 수 있었다. 목욕을 할때면 나는 내 로봇팔을 이용해서 나의 몸을 레그-체어에서 들어 올린 뒤, 욕조에 눕혀놓고 씻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마치 로봇이 마비된 사람을 시중드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은 내가 나 자신을 돌보는 것이었다. 다 씻고 나면 타월로 몸을 닦은 후, 다시 나를 들어올려 레그-체어에 앉혔다.


이 시스템에 익숙해져 가자, 나는 좀더 나의 한계에 도전하고 싶어졌는데, 그건 나름대로의 힘겨운 재활의 의지였고, 그 목표로 이번 산행을 결심하였던 것이다.


"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


" 음.... 생각을 좀 해 봅시다. "


그리하여 의사와 함께 머리를 짜내어 새로운 시스템을 고안해 내었다. 

그것은 나의 몸과 레그-체어를 보다 분리하는 형태로서, 나는 집의 침대에 누워있고, 레그-체어와 선글라스만을 산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어차피 무선이기 때문에 분리는 문제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분명히 레그-체어가 있는 곳의 광경을 보고, 그곳에 있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나의 팔다리의 촉감은 어차피 레그-체어의 센서로부터 느낄 것이니까.


" 하지만 이래서는 현장의 소리를 못들을 텐데요. "


" 걱정할거 없습니다. 레그-체어에 마이크와 스피커를 설치하지요. 그러면 당신은 침대에서 외부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또 말을 하면 그 말은 레그-체어의 스피커로 전해질 겁니다. 당신은 레그-체어를 통해서 대화도 할 수 있을 거에요."


" 나는 헤드셋을 쓰고 말이죠?"


" 바로 그겁니다. "


산행은 성공적이었다. 의사는 레그-체어의 가운데 쯤에 기둥을 하나 부착하였고, 거기에 선글라스를 부착하였다. 그리고 양쪽에 두개의 마이크와, 스피커를 설치하고 나니 마치 가운데는 비어있는 - 원래는 내가 앉는 장소였으므로 - 로봇과 같은 형상이 되었다. 


나는 레그-체어의 몸을 돌려 침대위에 누운 나를 바라 보았다. 묘한 느낌이었다. 내가 누워 있는 나를 바라보다니.


" 어때요? 그럴듯 한가요? "


나의 목소리는 레그-체어의 스피커로 흘러나왔다. 마치 그냥 내가 말을 하고 잇는 느낌이다. 침대에 누워있는 내 자신의 입모양이 똑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 놀랍군요! 마치 인간형 로봇같습니다. "


하지만 주디는 조금 불안한 듯 보였다.


" 당신... 맞아요? "


그녀는 조심스럽게 레그-체어에 손을 대었다. 아니, 그녀는 단지 <나>에게 손을 대고 있었다. 자신이 만지고 있는게 <나>인지, 단지 기계에 불과한지를 의심하고 있는 건 그녀뿐이니까. 


" 물론이야, 주디. 물론 나는 침대에 누워 있지만, 여기에 서 있다고도 할 수 있어. 난 당신얼굴이 잘 보이고, 당신 목소리를 듣고, 당신의 손길이 느껴지는 걸. "


그녀는 침대에 누워 있는 나와, 레그-체어로서의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내 느낌을 말하자면? 물론 나는 레그-체어가 있는 곳에 있었다. 나의 생각은 침대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5



나는 점점 레그-체어를 이용한 대리 외출에 익숙해졌다.

그것은 안전했고, 행동에 전혀 불편이 없었으며, 무엇보다 아무래도 불구가 된 내 모습을 전혀 노출시키지 않고 활동할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레그-체어에 타서 움직일 때에는 축 늘어져 있는 내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야 했고, 아무리 원하는 데로 움직인다 하여도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레그-체어를 이용한 대리 외출에서는 사람들은 흥미로운 호의를 보여주었고, 또한 이런 이중적(?)인 생활이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집에 있을 때에도 가급적 레그-체어만을 움직이게 되었으며, 침대에 누워 있는 나와는 독립적으로 <나>라는 존재는 이 레그-체어와 함께 있다는 인상이 깊어졌다. 나는 또한 침대에 누워있는 나를 돌보거나 몸을 씻기는 등의 일을 하였는데, 그럴수록 마치 내가 다른 사람을 간병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를 닮았지만, 지금은 꼼짝할 수 없는 누군가를 말이다! 내가 그의 몸을 닦아 줄때면, 기분좋은 듯 미소를 띄고 있는 <나>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묘한 기분을 내게 일으켰다. 


간혹 나는 나의 얼굴을 들여다 보며 혼잣말을 하기도 하였다.


" 이봐, 기분은 좀 어때? "


그러면 누워있는 그가 입을 움직이면서 말을 한다. 그것은 몇번을 되풀이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었다. 말은 내가 하는데, 입을 움직이며 소리를 내는 것은 누워있는 <그>였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면, 오히려 본체는 여기에 있고, 침대에 누워있는 그가 나의 명령을 받는 기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주디는 집에 오면 늘 <침대에 누워있는 나>를 챙기곤 하였다. 그녀는 나의 헤드셋을 벗기고, 침대옆에 앉아 대화를 하였다. 그런 모습을 옆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이상한 느낌이었다. <누워있는 나>는 그녀와 얘기를 하고 있었지만, 그 대사를 생각하고 말해주는 것은 <레그-체어의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녀는 인간의 형태를 한 빈 껍데기와 대화를 하는 걸까. 헤드셋이 벗겨지면 나는 말을 할 수 없었지만, 사실 그녀가 대화하는 것은 <여기 있는 나>라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침대에 누워있는 나>의 대리인 정도로만 여겼다. 아니, 간혹은 그저 간병용 로봇정도로 -말을 알아듣는 -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럴 때면 난 당혹스러웠지만, 그녀 역시 혼란스러울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아무래도 지금의 나는 기묘하게 생긴 로봇의 형태 아닌가. 하지만 그녀가 오직 침대에 누워있는 나와만 얘기하려 할때면, 조금 기분이 상하기도 하였다. 마치 프랑스의 옛 전설에 나오는 시라노가 된 것 같았다. 친구를 대신해서 숨어서 사랑의 시와 노래를 불렀지만, 그녀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친구와 사랑이 깊어가는, 그로 인해 상처받고 외로와지는 시라노 말이다. 


나는 의사와 상의하여, 나를 보다 개조하기로 마음 먹었다.


" 정말 놀라운 시도가 될 겁니다. 당신을 완전한 인간형으로 만들어 드리죠! "

나는 뇌의 발성영역과 청각영역에도 전자침을 추가로 심어서, 더이상 헤드셋이 필요 없이도 말하고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로 인하여 원래의 나는 귀머거리에 벙어리가 되었슴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레그-체어를 완전히 뜯어 고쳐서, 더이상 육중해 보이는 탈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인간의 형태와 유사한 로봇형태로 개조하였다. 겉은 인공피부로 덮었으며, 사람의 얼굴이 있었고 말을 할때면 그 발음에 맞게 입모양도 움직여 주었다. 거기에 가발을 씌우고 옷을 입히니, 정말로 사람처럼 보였다.


" 이게 나군요... "


나는 거울 앞에서 나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거울 안에는 젊고, 원래의 나보다 훨씬 핸섬하게 생긴 좋은 체격의 남자가 있었다. 이게 새로운 나의 모습이란 말인가? 나는 여러가지 표정을 지어보이며 새로운 몸을 연습하여 보았다. 


그리고는 침대에 누워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전혀 미동조차 하지 않는 마비된 육체가 누워 있었다. 나는 그를 만져 보았다. 뻣뻣한 육체였다. 누군가 나를 만지고 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는 정말 다른 사람같았다.






6





주디는 화가 난 듯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침대에 누워있는 나>와 직접 이야기 할 수가 없고 나를 통해서만 대화할 수 있었는데, 그게 불만인 모양이었다.


" 왜 그런 짓을 한거죠? 그런 건 나와 상의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


" 미안해 주디, 하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구. 나는 여기에 계속 있고, 오히려 이게 더 제대로 된 거 같지 않아? 나는 여기 존재하는데, 대화는 저쪽에서 한다는 건 정말 이상하잖아. "


"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늘 여기, 침대에 누워 있었다구요. 난 당신과 얘기할 수 있는게 좋았어요. 그런데 이젠 당신과 얘기할 수조차 없군요."


" 무슨 말이야, 지금 나와 이야기 하고 있잖아? 지금 얘기하고 있는 건, 당신이 침대에 누워있다고 생각하는 <나>라구...! "


" 하지만 당신은 이런 얼굴이 아니었어요! "


" ...그냥 내가 성형수술을 한 거라고 생각하면 안될까? 그럴 수 있는 거잖아? 내 목소리, 내 말투, 당신과의 기억은 모두 그대로니까.... 단지 얼굴만 바뀐거라고 생각하면 돼."


" 말도 안돼요! 당신은 저기 누워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죠? "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며 나가버렸다.


그녀와의 문제만 아니라면, 나는 새로운 시도에 매우 만족하였다.


이제 나는 훨씬 자연스럽게 사회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고, 또한 젊고 근사한 육체는 인기가 있었다. 무엇보다, 나를 혼란스럽게 했던 괴리감 없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뭐랄까, 다시 태어난 기분이라고나 할까. 

나는 마치 나의 장애가 원래 없었던 것처럼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이따금씩 침대에 누워있는 남자를 돌봐주고, 몸을 닦아 주거나 할 때 외에는 말이다.


하지만 그 일조차 주디가 도맡아 하게 되자, 나는 가끔씩만 올라오게 되었는데,어쩌면 무의식적으로 나는 그를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때는 문득 내 집의 침대에 누워있는 한 남자의 존재로 인해 깜짝 놀라는 일도 있곤 했다.







7



침대에서 꼼짝 못하는, 기본적인 의사소통조차 할 수 없는 환자를 돌본다는 것은 귀찮은 일이다. 물론 그가 내 자신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는 것을 알기에 정성스레 돌보기는 하지만, 그것은 일부러 상기하지 않으면 쉽게 잊혀지곤 했다. 결국 이 자는 회복불가능한 전신마비 환자인 것이다. 게다가 나이도 들고, 몸은 점점 초췌해져 갔다. 특히나 시체처럼 뻣뻣하게 늘어진 몸을 만질때면, 어쩔 수 없는 혐오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런 나에 비해서 오히려 주디가 더 그를 간호하는데는 열심이었다. 그녀는 도대체 왜 그리 집착하는 걸까. 그녀는 오히려 나에 대해서는 감정이 예전같지 않은 것 같았다. 


" 이봐, 주디! 내려와서 같이 영화보지 않겠어? "


" 지금 바빠요. "


" 뭘 하는데? "


" - 지금 당신을 돌보고 있다구요. "


....날 돌본다구?


나는 지금 아랫층의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고 있는데?


그녀가 말한건,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를 말하는 거겠지. 도대체 그를 그토록 열심히 돌볼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인가..... 그저 죽지 않을 정도로만 유지하면 되는 것인데.. 어차피 아무런 감각이나 움직임이 없는 자 아닌가.


나는 2층으로 올라가서 방으로 들어갔다. 주디가 수건을 적셔서 그의 몸을 닦아 주고 있었다.


" 뭘 한다구? "


그녀는 고개를 돌려 잠시 나를 바라보았을 뿐, 하던 일을 계속 하였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 말해봐, 지금 뭘 하는 거야? "


그녀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 이거 놔요, 말했잖아요! 당신을 돌보고 있다고. "


" 날 돌본다구? 이봐, 나는 여기에 있잖아? 도대체 누굴 돌본다는 거야? "


그녀는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 정신차려요, 당신은 여기 누워있다구요! ..... 당신이 자신이라고 믿는 건

....단지 기계일 뿐이잖아요?! "


나는 단지 기계일 뿐이라구?


나는 그녀를 잡은 손을 놓았다. 그녀는 정말로 그를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에게 있어서 나는 그저 낯선 사람에 불과한 것일까. 그녀는 다시 그를 정성스럽게 간호하기 시작했다. 나는 맥이 풀려 문가에 기댄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질투일까. 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것은 과연 <나>일까, 아니면 침대에 누워있는 <그>일까. 도대체 무엇이 나를 결정짓는 것일까.


예전에는, <나>란 <나의 뇌>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다리가 잘린다면, 잘린 다리가 <그>일까, 아니면 남은 몸쪽이 <그>일까. 물론 당연히 그는 남은 몸쪽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런 판단의 기준이 절단된 부분의 양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목 아래가 잘려나갔지만, 의학적 방법으로 양쪽을 모두 살려 놓는다면.... 그때에도 비록 부피는 적지만, 그의 뇌가 있는 머리쪽이 여전히 <그>일 것이다. 그것은 정당한 생각이었고, 나는 궁극적으로 <뇌>가 있는 쪽에 자아가 따라간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나의 뇌는 물론 침대에 누워있다. 하지만 나는 명백하게 여.기.에. 있다고 느낀다. 여기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 그것은 나의 몸도 아니고 단지 기계일 뿐인데. 단지 내가 감각하고, 운동하는 <도구>로서의 육체만이 여기에 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여기에 있음을 확신한다. 


- 하지만 다른 사람에겐 어떨까. 주디에게는? 혹시 나만이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일까.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그저 기계에 불과할까.






8



" 무슨 짓이에요! 미쳤어요? "


" 진정하라구.... 단지 술을 조금 마시고 싶었을 뿐이야. "


그녀는 얼굴이 새빨게져서 소리질렀다.


" 술? 술을 마시고 싶으면 당신이나 마시면 되지, 왜 그에게 알콜을 주사하는거에요? 그게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몰라요? "


"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나는 술을 마실 수 없다구. 내가 술에 취할려면 내 본체가 술을 마셔야 하니까....."


" 정말 미쳤군요. 환자의 상태를 전혀 생각지도 않아요!" 


" 무슨 소리야.... 저건 나의 몸인데, 왜 내가 나를 걱정하지 않겠어? 

안전할 정도로만 주사했다구, 정말이야." 


" 그만 둬요. 당신에게 도저히 그이를 맡길 수 없어요. "


" 뭐야?! 내가 나를 해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도대체 <그이>라는 게
누구야? 저건 <나>란 말이야, 지금 이 몸을 움직이고, 이 말을 하는 건바로 저 자라구! "


" ....그럼 당신은 누구에요? "


나?


.....그렇군, 나는 누구지?


나는 나 자신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다. <나>는 여기에 있다. 움직이고, 느끼고, 생각하는 <나>는 바로 지금 여기에 서 있다. - 물론 나의 몸이 기계로 되어 있다는 것쯤은 안다. 그리고 나의 생각과 판단이, 한 때 <나>였던 - 지금은 침대에 누워있는 - 그 사내의 뇌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곳에 있는 것일까. 나의 사고가 이루어지고 있는 곳은 <여기>가 아니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렵다. 나의 생각이 내 것이 아니라면, 지금 누워있는 그의 생각 역시 그의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하는가.


하지만 그녀의 입장은 다르다. 그녀는 원래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의 육체가 - 비록 식물인간과 같은 형상이지만 - 아직 눈에 보이는 그대로 남아 있고, 전혀 다른 육체를 가진 또다른 이방인이 등장한 것 뿐이다. 내가 예전의 그와 같은 기억과 말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잊어버린 것일까. - 아니다. <내용>이라는 면에서, 나는 그와의 동질성을 유지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내가 <나>의 위치에 대해서 혼란을 겪고 있는 것에 비해서, 그녀는 보다 확고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녀의 연인은 아직 침대에 누워있다. 그리고 <그>라고 주장하며 그녀에게 혼란을 주는 <나>는 다른 사람인 셈이다. 

- 왜일까. <눈 앞에 존재한다>는 강력한 시각적 정보가 다른 모든 것들을 압도하는 것일까. 그녀에게는, 아니 인간에게는 아직 육체와 정신이 분리된 하나의 자아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어려운 것일까.


나는 해결책을 알고 있다. 


그녀가 <그>를 <나>라고 믿고 집착하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그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가 눈앞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를 보이지 않게 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가 사라지고, 대신 그와 같은 기억을 가지고 같은 말투를 쓰는 내가 존재한다면 - 그리고 그 상황이 익숙해진다면.... 그녀는 나를 정말 <나>로 받아들여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9



" 도대체 그를 어떻게 한거죠? "


주디는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 대답할 수 없어. 하지만 걱정 마. 그는 안전해 "


" 당장 대답해요! 그는 어디있죠? "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말했다. 


" 나를 똑똑히 봐! 나는 여기에 있어. <그>가 어디에 있냐고 묻지 말고, <당신>은 어디에 있냐고 물어야지! 내가 <그>란 말이야! 내가 어디에 있냐고? 나는 지금 당신 눈앞에 있잖아? "


그녀의 눈빛이 흐려졌다. 그녀의 머리가 논리적으로 엉키고 있다. 혼란스러운 듯, 그녀의 머리가 흔들린다. 하지만 그녀는 직감을 믿는다. 그것이 비록 논리적으로 옳지 않더라 하더라도 - 적어도 지금 그녀에게, <나>는 그녀의 <그>가 아니다.


" 그가 어디있는지 당장 말하지 않는다면, 신고할 거에요."


" ....날 신고한다구? 무슨 명목으로? "


" 이건 납치라구요! "


" 납치? 내가 나를 납치하는 경우도 있나? "


" 당신은 제정신이 아니에요! 지금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 지도 모른다구요!"


" 제정신이 아닌건 당신이야! 당신은 그 자와 내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우린 같은 사람이라구! 내가 그 사람이야! "


" 당신은 아니에요, 그가 진짜지. "


" 왜 내가 아니라 그가 진짜라는 거야? "


" 그가 죽으면, 당신은 그저 기계덩어리에 불과해요. 하지만 당신이 부숴진다 해도,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구요!" 


... 그렇군.


그녀의 말이 맞다.


나는 전적으로 그에게 의존하고 있다. 나의 생명은 그의 생명을 전제로 하지만, 그는 나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그가 없어지면 나는 끝장이지만, 내가 없어져도 그로서는 달라지는 것이 없다.


그것일까, 내 불완전한 정체성의 이유가.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를 잡은 손을 풀고, 지하실로 성큼성큼 내려갔다. 그녀가 황급히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지하실의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 탁자위의 천을 치웠다. 거기엔 아무런 상황을 모른채 누워있는 그가 있었다. 그의 얼굴은 마치 이런 나를 비웃는 듯, 엷은 미소를 띄고 있었다.


- 나는 너의 존재를 전제로 한단 말이지. 네가 없으면 나도 없다, 바로 그 사실을 담보로 이렇게 태연할 수 있는 건가.


분노가, 억제하기 힘든 살의가 밀려왔다.


나는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 당신 미쳤어요? "


그녀가 미친듯이 내게 매달렸다. 나의 팔을 그의 목으로부터 떼어내기 위해서 필사적이었다. 나는 그녀의 행동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목을 계속 졸랐다.


" 그를 놔 줘! 이 더러운 기계! "


그녀가 울부짖는다.


그녀는 내가 자신의 연인을 죽이려 한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연인은 <나>다. 여기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흉물스러운 고깃덩어리는 아닌 것이다. 이 자만 없어지면 그녀는 모든 혼란을 잊을 것이다. 

그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 - 지금 나에게 그런 것은 더 이상 상관이 없다. 

내가 이런 움직이지도 못하는 육체의 그림자로서만 존재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그녀가 울부짖으며 나의 몸을 때렸지만, 나는 목을 조르는 손에 힘을 더했다. 

그녀의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정신이 조금씩 몽롱해져 갔다. - 그렇구나. 나는 나의 목을 조르고 있는 거였지..... 이런 방법으로는 그를 죽일 수가 없겠구나..


그 단순한 사실을 깨달을 때 쯤, 나는 그자리에 쓰러졌다.








10




" 깨어났군요. "


눈을 떴다. 


병원인가. 나는 침대에 누워있는 것 같다.


희미하게 주디의 얼굴이 보인다. 어떻게 된 걸까.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잘 움직이질 않는다. 


" 다행이에요, 정말. "


주디의 눈이 눈물로 젖어 있었다. 그녀는 내게 다가와 나를 껴안고는 입을 맞추었다. 따뜻했다.


" 당신이 의식을 잃고 있는 동안, 다시 수술을 했습니다. 문제를 일으켰던 레그-체어는 폐기하고, 당신의 두뇌로부터 전자침도 제거하였지요. 그대신 당신의 팔다리에는 의족을 부착하였지요. - 보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말이죠. 좀 불편할 수는 있겠지만, 그게 훨씬 마음 편하실겁니다. 적어도 주위사람들 에게는요. "


의사의 설명이 들려왔다.


그랬군. 나는 원래의 나로 돌아와 있었다. 선글라스를 낀 채로, 팔 다리에는 의족이 달려 있었다. 거기에는 아무런 혼란도 없었다.


꿈을 꾸었던 것일까. 몸을 일으켜 벽에 걸린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에 비치는 나는 본래의 나의 모습이었다. 많이 초췌해진 듯한 모습이었지만, 그래. 이게 나의 얼굴이었다. 한때 내가 그토록 증오했던, 혐오하며 죽이려고까지 했던 자의 얼굴이 이것이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었던 것일까. 나는 자살을 하려고 했었던가. 

내가 <나>라고 그토록 믿었던 그 기계는 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던 것일까.


그건 뇌와 감각적 주체간의 갈등이었다. - 누가 이겼는가? 이 생소한 갈등은 어떻게 해결될 수 있었을까.


감각기관과 운동기관으로서의 주체와, 생각을 하는 정신적 자아는, 너무나도 간단한 한 가지 - 둘 사이의 공간적 일치감만 있으면 충분하였다. 내가 느끼고, 내가 움직이는 곳에서만 비로소 나는 존재할 수 있었다. 나의 생각이 이 몸속에서 일어나든, 저 침대에 누워있는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든, 혹은 백만광년쯤 떨어진 우주의 어느 별에서 일어난들 무슨 상관이랴. 


나는 이제 나의 몸속에 존재하고, 이제 나는 아무런 분리감 없이, 온전히 나 자신일 수 있다. 애당초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다는 것은 무리였던 것이다. - 적어도 아직 인간에게는....



문득 데카르트의 격언이 떠올랐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 아니다, 아니다.

나는 느끼고, 움직인다. 고로 존재할 수 있었다.



.... 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end

'SF'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폰 노이만 기계  (0) 2020.05.05
너희는 나의 외로움을 아니?  (0) 2020.05.05
우리가 쏜 화살은 어떻게 되었을까  (0) 2020.05.05
고해(告解)의 별  (0) 2020.05.05
Simulation Saturated  (0) 2020.05.04

류기정

 

 

그가 굳이 곤충과의 최초의 의사사통 대상으로 바퀴벌레를 선택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바퀴벌레는 10억년 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곤충으로써, 인류가 나타나기 이미 훨씬 전부터 이 지구상에 퍼져 생존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초의 모습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바퀴벌레가 이미 지구상에서 생존하기에 완벽한 진화의 정점에 도달해 있다는 말이며, 또한 변함없는 모습으로 지구의 지질학적 규모의 역사와 함께 해 왔다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는가!


그러므로 바퀴벌레가 얘기해 줄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화석보다도, 그 어떤 지질학적 증거보다도 생생하고 풍부할 것이리라. - 어쩌면 공룡이 절멸한 이유는 무엇인지, 대륙의 분할 전에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혹은 인류 이전에 이 지구를 지배했던 다른 지능을 가진 종족이 있었는지….. 그는 이 세기적인 대화에 매우 고무되어 있었다.


그가 곤충과의 의사소통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곤충이라는 존재가 주는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함 때문이었다. 곤충은 그가 알고 있는 다른 모든 지구상의 생물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4개의 다리와 내골격의 익숙한 동물들과는 달리, 곤충들은 단단한 외골격과, 6개의 다리에 날개, 강인한 근육과 갑옷, 기괴한 외형…… 생존을 위해 극단적인 진화의 길을 택한 곤충은, 어린시절부터 그의 관심을 온통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곤충은 진화의 초기에서부터 인간과 갈라져, 선구동물문(발생단계에서 원구가 장차 입이 됨. 곤충, 칠성장어등이 이에 속하며, 인간을 포함한 대부분의 척추동물은 후구동물 - 원구가 항문이 됨 - 이다.)의 절정에 올라 마치 두 가지로 갈라진 거대한 나무처럼, 한쪽은 인간으로 끝으로 하는 가지와 한쪽은 곤충을 정점으로 하는 가지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다. 

마치 인간계와 공존하지만 서로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다는 전설의 요정계처럼, 이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두 개의 다른 차원의 주인과 같은 셈이다. 


익숙하지 않은 것에서 인간은 공포와 혐오를 느낀다던가. 많은 여자아이들이 그러하듯, 외모만 본다면 곤충은 인간에게 공포와 혐오를 주기에 충분한 형상이었다. 커다란 겹눈, 긴 더듬이, 미세한 촉각을 가진 긴 강모, 마디진 체절, 그리고 잔인하고 고도로 효율적인 조직체계…. 무엇보다 애벌레에서 번데기를 거처 성충으로 변화하는 변태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성장과정에서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 그것들은 완벽하게 다듬어진 모양이며, 필요이상으로 느껴질 정도의 강력한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곤충들은 이 지구상의 어떤 험한 곳에서도 생존한다. 저 바퀴벌레를 보라! 선캄브리아시대부터 존재했던 저 불멸의 
생존자들은, 외형상 지구를 뒤덮고 있는 듯한 네발짐승들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지구상 구석구석을 자신들의 종족으로 가득 채우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수 십년 간의 연구 끝에, 그는 결국 곤충들의 페로몬 언어를 해독해 내었고, 자동 페로몬 인식-합성 기계를 통하여 실시간으로 곤충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역사적인 길을 열었다. 그러나 곤충의 종에 따라 통용되는 페로몬들이 달랐으며, 심지어 불개미와 아프리카 사냥개미간의 언어조차 달랐으므로, 그는 고심 끝에 바퀴벌레와를 그의 첫 대담자로 결정했다.


한 달 전, 그는 테이블 위의 식빵 밑을 기어가던 바퀴벌레를 잡아 그의 언어기계 속에 집어 넣었다.


“ 무슨 짓인가, 잡았으면 날 빨리 죽여라, 인간.”

“ 걱정 말라. 난 너희 종족과의 대화를 원한다. 한달 뒤, 이곳에서 인간을 대표하여 너희 종족의 최고 원로와 대화를 하고 싶다.”

“ 좋다. 대바퀴님께 그렇게 전하겠다. 한 달 뒤 자정, 이곳에서 만나자.” 

“ 좋다. 확실하게 전해라.”


그리하여 한 달이 지난 오늘, 그는 녹화장비와 질문들을 준비해 놓고, 그의 실험실에서 역사적인 첫 만남을 준비하고 있었다.


자정이 되자, 어디선가 수십, 수백마리의 바퀴벌레들이 그의 연구실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사람 손바닥정도의 크기는 될 법한 늙은 갈색바퀴가 등장했다. 겉으로 보기만 해도 심상치 않은 바퀴벌레임이 틀림없었다. 그는 천천히 그 바퀴를 통역 기계 안으로 안내했다. 그 원로바퀴는 보좌바퀴들의 부축을 받으며 기계 안으로 들어갔다.


“ 참으로 오랜 세월을 기다려왔소. 인간이여!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리라 믿었소.”

“ 그렇군. 인간을 대표하여 그 오랜 역사와 생존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이런 자리를 마련 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 인간은 같은 지구의 식구임에도 불구하고, 조직적으로 우리를 박멸하려 하기 때문에 매우 섭섭하오. 요즘 수난이 말도 아니라오.”

“ 그 점에 대해선 참으로 유감입니다. 그러나 인류는 잠시 뿐, 그대들의 역사는 끝이 없을 것을 믿습니다.”

“ 우리도 크게 걱정하는 바는 아니라오.”


형식적인 인사가 오간 뒤, 그는 원로바퀴에게 질문을 시작했다.


“ 보아하니 꽤 오래 사신 듯 한데, 언제부터 살아오셨습니까?”

“ 내 나이는 수십억살 이 넘소. 우리에게 있어 개체의 죽음은 죽음일 수 없소. 우리의 경험과 기억은 개체를 뛰어넘어 하나의 집단으로써 공유되니까. 우리종족의 나이가 곧 나의 나이요.”

“ 저는 늘 진화의 양 극단에 있는 인간과 곤충의 관계를 신비스럽게 생각해 왔습니다. 언제, 어떻게 두 종족은 갈라져 나왔을까요?”

“ .... 역시 그랬군. 언젠가 인간이 그것을 물어올 줄 알았소.”


원로바퀴는 결국 올 것이 왔다는 침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 ...뭔가, 중요한 계기가 있었나 보군요.”


그 때, 옆에 있던 보좌격의 검은 먹바퀴가 끼어들었다.


“원로님! 우리의 정체를 밝히시는 건….!”

“괜찮네. 이제 와서 밝혀진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미 우리의 계획는 실패했고, 이제는 인류와 함께 공존하는 지구의 식구가 아니던가.”


먹바퀴는 뭐라고 항변하려는 듯 했으나, 곧 물러났다.


" 우리는 인류와 갈라져 나온 게 아니라네. 우리는 전혀 독립적인 종족이지."

" 그게 무슨 말입니까?"

" 자네는 곤충이란 종족을 보면 무언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던가? 마치 이 행성의 다른 생물들과는 다른.."

"그렇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이질감. 그것이 절 곤충의 세계에 빠져들 게 한 것이지요. 

곤충들을 바라보노라면, 뭐랄까, 마치 이 곳보다 훨씬 혹독하고 무시무시한 혹성에서 온 외계종족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랬군.... 역시 짐작하고 있었군."

" .......? "

" 눈치챈대로, 우리 곤충들은 지구에서 발생하여 진화한 생물이 아니오."

" 그럼 무엇이란 말입니까?"

" ..... 우리는 15억년 전, 외계의 다른 행성에서부터 왔소." 

" 아주 오래전, 그 별은 이미 지금의 인류 이상의 문명을 이룩하고 있었소. 물론 우주개발과 생명공학, 로봇공학과 나노공학이 발달하게 되었지. 그리고 그들의 행성은 곧 포화상태가 되고 말았소. 그들은 자신들이 이주할 새로운 행성을 찾게 된거요. 하지만, 여전히 빛보다 빠른 운송수단은 없었고, 그들이 직접 별들을 탐사하며 후보지를 물색하기엔 너무나 시간이 많이 필요했지. - 그래서 그들은 대신 로봇을 만들었소. 딱 한 대만 어느 별로 보내더라도, 그 로봇은 스스로 자원을 채취하여 자신과 똑같은 로봇을 복제해 낼 수 있는 자가복제로봇이었지. 그리고 그 별의 생물들의 유전정보를 분석하여, 자신을 그 생물권 속에 녹아들어가도록 설계되었다오. 게다가 필요에 따라 스스로 설계를 변경하여, 아무리 혹독한 환경의 별에 떨어지더라도 최적의 형태로 변형될 수 있는 그런 로봇이었소. "

" 그건.... 이론상 존재하는 폰 노이만 기계가 아닙니까? "

" 그렇지. 당신네 인류도 언젠간 그런 로봇을 만들어 내게 될 것이오. 하지만 이미 그런 폰 노이만 기계가 이미 지구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건 몰랐던 게지. 아무튼 그들은 거의 완벽한 폰 노이만 기계를 만들어서 가능성 있는 행성들에 뿌렸소. 그러면 자동으로 그 기계들은 스스로를 복제하고, 완벽한 형태로 자가변형하여 그 행성의 다른 생물들을 제거하여 그들이 쉽게 이주할 수 있게 준비해 줄 테니까. "

" 그랬군요..... 그렇다면 나중에 쉽게 그 별을 접수할 수 있겠군요. 잔인하지만 참으로 효율적인 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

"물론, 폰 노이만 기계들은 여러 행성으로 보내졌고, 설계된 데로 스스로를 진화시키며 살아남았소. 그 기계들은 그야 말로 각양각색의 형태로 변형되었지. 성공한 기계들도 있고, 실패하여 모두 파괴된 기계들도 있고, 혹은 그 별의 원래 생물들과 조화를 이루며 복제를 계속하는 기계들도 있었소. - 하지만 그들을 보낸 이들은 가장 최적인 몇 곳만을 필요로 했소. 그리고 그곳으로 최종 이주했지. 하지만, 다른 별의 폰 노이만 기계들은 그냥 버려지게 된거요."

" 그렇군요.... 이 지구는 다행히도 그 선택에서 벗어났던 것이군요. 당신들은....그때 버려진 채로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는 폰 노이만 머신이었던 거군요!"


늙은 갈색 바퀴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아니오. 이 지구 역시 선택된 몇 개의 별 중 하나라오. 그들은 이 지구로 이주해 와서 살게 되었다오. 그리고 지금도 지구상에 살고 있소."


그는 순간, 머리가 복잡하게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 ....아니...그렇다면.... 우리 인류가 이주해 온 외계종족의 후예란 말입니까? "


갈색바퀴는 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뭔가를 오해하고 있군 그래. 어떤 폰 노이만 기계들은, 기계들을 보낸 그들조차도 어쩔 수 없을만큼 크고 강력하게 변형되기도 했었소. 그들은 오히려 기계들이 점령한 별에 힘겹게 공존해야 할 처지에 놓이기도 했지 - 알겠소? 우리 곤충들이 이주해온 외계종족의 후예요. 바로 인류를 포함한 지구의 다른 동물들이, 알아보기 힘들만큼 변형되어 버린 - 우리가 보낸 폰 노이만 기계들이라오."



- end

'SF'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의 데카르트적 악몽  (0) 2020.05.05
너희는 나의 외로움을 아니?  (0) 2020.05.05
우리가 쏜 화살은 어떻게 되었을까  (0) 2020.05.05
고해(告解)의 별  (0) 2020.05.05
Simulation Saturated  (0) 2020.05.04

류기정,2002

 

 

 

 

 

어느덧 어둠은 깊어가고, 가야금을 내려 놓고 술잔을 따르는 곱게 차려입은 여인의 얼굴은 등잔불에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 훌륭하구려, 임자야말로 팔방미인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줄을 튕기는 소리가, 그야말로 심금을 울리는구먼." 

"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자, 한잔 받으시지요...." 

" 허허허, 그럽시다.... 한잔 따르시구려.."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학 한마리가 멋들어지게 상감된 흰 술잔을 들었다. 옥빛의 사기 술주전자에서는 맑게 붉은 빛이 도는 오미자주가 흘러나왔다. 술을 따른 여인은 다소곳이 앉아 눈웃음을 던졌다. 호젓한 초가을 밤의 운치가, 어느덧 들려오는 귀또리의 울음소리에 담겨져 있는 듯,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 임자는 서화에도 능하고, 가무는 물론 가야금도 이리 잘 다루니, 어찌 재능이 풍부하다 하지 않겠소? 뿐만 아니라, 생각 또한 명석하고 사려가 깊으니 정말 보기드문 총명한 여인인 듯 하오. " 

"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대감. 오히려 변변치 못한 저와 대화를 맞추어주시니 저야말로 감사할 뿐이지요..." 

그는 다시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 하하하, 그리 겸손할 것 까지야... 헌데, 내 궁금한게 있소이다.... 임자같은 여인이 왜 하필 나 같은 자를 흠모한다는 것이요? " 

여인은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 그건 소녀도 모르겠습니다.... 허나 대감께옵선 어딘가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소녀가 비록 깊은 학식은 없지만, 사람을 보면 그 사람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기운을 느끼는 감은 있사옵니다. 대감께선 분명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특출함이 느껴지옵니다. " 

" 내가? .....거 묘하구려.. 정말 그런게 느껴진단 말이오?" 

" .....그렇사옵니다. 대감께선 언뜻언뜻 이해할 수 없는 말씀도 하시곤 하지않습니까? 소녀는 대감께서 필시 마음속에 감추고 있는 것이 많으시리라 짐작하고 있사옵니다. " 

" 허허, 이거 정말이지 예리하기 짝이 없구먼! 임자는 나도 몰래 나를 많이 살펴보았나 보오? " 

여인은 부끄러운 듯 눈을 흘겼다. 

" 참으로 짖궂으시군요! 자, 소녀도 한잔 따라 주시지요.. " 

" 그러구려! 하하... 자 한잔 받으시오! 내 오늘은 정말 기분이 좋구려." 

그의 얼굴은 취기와 흥겨움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상 위에 놓여진 맛깔스런 안주를 집어드는 그의 얼굴은, 늘 엄격했던 평소와는 다르게 살짝 풀어진 듯한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 ....이렇게 임자와 같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니, 이 어찌나 즐거운 지 모르겠소... 진작 만났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 

" 그리 말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대감 " 

" 아니오, 임자만큼 총명하고 명석한 사람은 정말이지 흔치 않다오. 임자는 글뿐 아니라 구구법도 알고, 또 천문도 보지 않소? 점잖은 사람들은 대개 그런 잡학들을 경멸하기 마련이지만 - 난 실용적인 학문을 중시하는 사람인지라, 그런 잡학들에 관심이 많소이다. 헌데, 임자도 역시 그런 것들에 관심이 있는 듯 하니 어찌 내 반갑지 아니하겠소? " 

" 저 역시 어려서부터 이것저것 관심이 많았답니다... 또 이런 곳에 있다보면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다양한 이야기들을 듣게 되지요. - 그러다 보니 자연 흥미가 생겨, 책도 구해 읽어보게 되었지요. " 

" 허헛, 장한 일이오. 임자는 '구장산술'도 읽어보았다고 했소? " 

" 다 터득한 것은 아니지만, 읽어는 보았지요. " 

그는 묘한 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물었다. 

" 나도 흥미롭게 읽어 보았다오, 임자. 그럼 혹 팔십일의 평방근이 얼만지 아시오? " 

" 구구는 팔십일이니, 팔십일의 평방근은 구가 아닙니까? " 

" 허허헛! 맞았소, 그럼 일백이십일의 평방근은 얼마오? " 

여인은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 일백이십일의 평방근은 십일 아니오이까. " 

" 훌륭하구려! " 

그는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졌다. 만면에 웃음을 가득히 담고는 오미자주를 한잔 더 들이킨다. 취기에 기분좋게 반쯤 비스듬이 기대었다. 

" 그럼 하나 더 문제를 내도 좋겠소? " 

" 어떤 문제이오이까? " 

" ....이(二)의 평방근은 얼마가 되겠소? " 

여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하였다. 

" 이의 평방근은 없사옵니다. " 

" 왜 없소? " 

그는 고개를 바짝 들이밀며 재차 물었다. 

" 일(一)일(一)은 일(一)이고, 이(二)이(二)는 사(四)이니, 제곱하여 이가 되는 수는 없사옵니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 그렇다면 아마도 이의 평방근은 일과 이 사이에 있으리라 생각되지 않소? " 

" 하오나 일과 이 사이에는 수가 없지 않사옵니까? " 

" 하지만 그 중간이 있지 않소! 한냥과 두냥 사이에 한냥닷푼이 있고, 한푼과 두푼 사이에 한푼반닢이 있듯이 말이오?! 십분지 일을 할이라 하고, 할의 십분지 일을 푼이라 하듯이 말이오." 

" 그러하옵니다만....." 

그의 눈빛은 기대와 흥분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 그렇다면 수와 수 사이에도 그런 식으로 할푼리를 적용할 수 있지 않겠소? 일과 몇할 몇푼 몇리가 있듯이 말이오... 일과 이의 한 가운데를 '일과 오할'이라 하면 되지 않겠소? " 

" 일과 오할이라....그리 말할 수 있겠지요. " 

" 그렇지? 그렇지? 허헛, 내 임자는 알아 들을 줄 알았소! " 

그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진 듯 했다. 

" 이런 식으로 하면 이의 평방근을 표현할 수 있지 않겠소? 일과 몇할 몇푼 몇리...하는 식으로 말이오? " 

" 그렇다면 이의 평방근의 값이 대체 얼마란 말씀이오이까? " 

" 일과 일할 사푼 일리에 가까운 값이겠지만, 정확하진 않소! 사실 그 수는 끝없이 이어지는 거라오. 일리와 이리 사이의 무한히 정교하게 기술할 순 있지만 끝은 없는 수라오! " 

" 그게 무슨 말씀이시온지..... " 

여인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 자, 이렇게 생각해 보시구려! .....사람들은 일과 이 사이에 수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사이를 열개씩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지 않겠소? 그걸 구분하기 위해 이렇게 할을 나타내는 수 앞에는 점을 찍는거요.... 이걸 소수점 이라고 칭합시다. 그리고 이 <할>을 나타내는 수를, 소수점 첫째자리라고 말하는 거요." 

그는 팔을 걷어붙히고, 젓가락 끝을 술잔에 찍어 상위에 술로 글을 쓰며 말했다. 

" ...그리고 할과 할 사이를 열등분 하여 또 다음자리에 쓰는 거요. 그럼 이 수는 일의 백분지 일을 나타내고 소수점 둘째자리가 되는 거요. ... 그리고 그 다음자리에 쓰는 수는 그 십분지일, 다시말해 일의 천분지 일을 표현하는 거요. - 이렇게 계속해나가면 무한히 작은 숫자를 표현할 수 있는 거라오! " 

그는 젓가락으로 다시 술을 찍어 길게 선을 그렸다. 

" 자, 이 막대에 수를 표시해 보는 거요, 여기는 일, 여기는 이.... 이렇게 되면 이 막대의 이 위치는 하나의 숫자를 표현하게 되는 거지. 이게 수직선이라는 거요... 자, 그리고 일점오, 즉 일과 오할은 바로 이 위치가 되는 거요! .... 아시겠소? 그러면 이 막대에서 일과 이 사이에 찍을 수 있는 점의 갯수가 몇개나 되겠소? 무한이지! 무한히 찍을 수 있단 말이오....! 다시 말해 일과 이 사이에는 무한이 많은 수가 있는 거라오.... 이것을 '실수의 연속성'이라고..." 

정신없이 얘기하던 그는, 문득 고개를 들어 동의를 구하려는 듯한 표정으로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그러나 그가 본것은 이해할 수 없는 당혹감과 안타까움, 그리고 혹 이 자가 실성한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뒤섞인 안쓰러움의 표정이었다. 창백해진 여인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소리를 지를 것만 같았다. 


그의 손에서 젓가락이 떨어졌다. 

취기와 흥분으로 상기되었던 그의 얼굴이 순간 파르르 떨리는가 싶었으나, 곧 평정을 되찾고 얼굴색이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잠시의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동안, 문밖에서 들려오는 귀뚜라미의 소리가 방안을 채웠다. 


그는 자세를 가다듬었다. 

손을 뻗어 술잔을 집어 비우고는,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 .... 미안하구려. 취기에 이상한 소리를 했나 보오, 허허헛! 술이 과해지면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만다니까. 잊어버리시구려... " 

그제야 여인도 마음이 놓인듯, 다시 얼굴에 웃음을 머금었다. 

" 소녀, 깜짝 놀랐더이다... 대감께서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셔서..." 

" 허허헛, 잊으라니까! .... 내 과음하면 혀가 꼬여서 그런가 보오... 내 임자와 술을 마시니 기분이 좋아 이리 술을 마신거 아니겠소? " 

" 이제 약주는 그만 드셔야 할 것 같사옵니다. 많이 취하신 듯 하온데..." 

" 아니오, 아니야! 한잔 더 따르구려! 내 오늘은 단단히 취해버리고 싶구려." 

" 그러시다가 또...." 

" 괜찮다니까! 내 잠시 황망했던 것 뿐이라니까.... 어서 한잔 따르시게.. " 

여인은 다시금 빈잔에 술을 따랐다. 

그는 따라준 술은 단숨에 들이키고 탁, 내려 놓았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털어버리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젓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 술이란 참으로 고마운 것 아니오! 취하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니까..." 

" 대감도 참...그러다가 소녀도 잊어버리시렵니까? " 

" 허허허... 내 어찌 그럴 수 있겠소, 말이 그렇다는 것 뿐이지... 그저 술을 마시는 동안은 세상근심을 잠시 잊자는 거 아니겠소. "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 자, 임자! ..... 임자의 가야금 소리가 듣고 싶구려.... 한 곡 들려 주지 않겠소? " 

여인은 살포시 웃으며 대답했다. 

" 그러지요, 대감. " 


여인은 가야금을 튕기기 시작했다. 낭랑한 현의 떨림이 고즈넉한 가을밤의 방안을 가득채웠다. 그는 미소를 머금은채 눈을 감고, 천천히 머리를 뒤로 기대었다. 

....그는 문득, 눈물이 울컥 치밀어 오는 것을 참기 어려웠다. 치밀어오르는 눈물을 숨기고자 그는 고개를 떨구며, 마치 음악에 장단을 맞추는 양, 고개를 흔들었다. 웃고 있는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 정말이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도록 취해버리고 싶었다. 수십년간 혼자 가슴에 담고 살아야 했던 과거와 비밀들을, 이 곳에서 애써 적응하여 살아가다가 잊을만하면 떠오르는 옛 기억들을.... 수천번 수만번 고민해봐도 알 수 없었던, 왜 자신이 이 시대로 떨어져 살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 지독한 외로움을. 







End.

'SF'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의 데카르트적 악몽  (0) 2020.05.05
폰 노이만 기계  (0) 2020.05.05
우리가 쏜 화살은 어떻게 되었을까  (0) 2020.05.05
고해(告解)의 별  (0) 2020.05.05
Simulation Saturated  (0) 2020.05.04

류기정, 2002

 

 

 

 

I shot an arrow into the air


화살 하나 공중에 쏘았네


It fell to earth, I knew not where;


땅에 떨어졌으련만, 어딘지 알 수 없어라


For, so swiftly it flew, the sight


너무도 빨리 날아, 날아가는 화살을


Could not follow it in its flight.


눈으로 좇아갈 수 없었네 

 


I breathed a song into the air


노래 하나 공중에 띄워보냈네


It fell to earth, I knew not where;


땅에 떨어졌으련만, 어딘지 알 수 없어라

 


For who has sight so keen and strong,


어느 눈이 그처럼 날카롭고 강하여


That it can follow the flight of song?


날아가는 노래를 좇아갈 수 있으랴 

 


Long, long afterward, in an oak


오랜 뒷날 한 참나무에


I found the arrow, still unbroke;


아직도 성하게 박혀 있는 화살을 보았네

 


And the song, from beginning to end,


노래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I found again in the heart of a friend.


벗의 마음 한 가운데 그대로 남아 있었네. 

 

 


The Arrow and the Song - Henry Wadsworth Longfellow


화살과 노래 - H.W.롱펠로우 
 

 

1

 

자신의 이야기를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그건 무척 어려운 문제이다. 특히나 그것이 오래전에 일어났던 일이라면, 그래서 이제서야 그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사람들은 한 때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의 의미를 그 순간에는 깨닫지 못하고, 또한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훗날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역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와의 만남 역시 나에게는 마찬가지였다. 

당시, 내가 아직 젊고 이름 없는 작가이던 시절, 그 때는 정말이지 모든 것이 절망적이었다. 나에게는 가족도, 직장도, 돈도 없었으며 계속되는 가난과 무관심 속에 지쳐 작가의 길을 접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하던 때였다. 아니, 그 어떤 고민도 내게는 사치로 느껴질만큼 힘들고 절망적인 시절이었다. 

가랑비가 내리던 10월의 초순이었다. 그때는 런던 외곽의 작고 허름한 4층의 하숙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미 몇 달째 밀린 하숙비 때문에 그나마도 쫓겨 나고 말았다. 쌀쌀해져가는 가을의 거리로 나선 나에게 가진 것이라고는 달랑 외투 한벌과, 펜과 잡동사니가 약간 들어있는 낡은 가방이 전부였다. 

규칙적인 무늬를 반복하는 포석이 깔린 우울한 거리를 하염없이 걸으면서,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나에겐 아무런 생각을 할 여력조차 없었다. 어디로 간단 말인가. 내가 지금까지 해 온 것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의 재능과 노력이란 건 결국 이런 것이란 말인가. 

....죽어버릴까. 

어차피 하루를 더 버틸 방세도, 한 끼를 더 먹을 돈도 없었다. 글쓰기에 대한 더 이상의 흥미도, 의욕도 없었다. 도대체 왜 이 세상을 살고 있을까, 지금 어디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걸까. 

그저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는지, 아니면 어떤 운명적인 계시가 나를 이끈 것인지는 모른다. 낡은 외투깃사이에 떨구었던 고개를 들어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나는 어느새 외곽의 오래된 공동묘지앞에 와 있었다. 그곳은 무척이나 적절한 위치라는 생각이 들었고, 무언가에 이끌리듯 녹이 슨 철장문을 밀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고, 어차피 빗방울을 피해야 할 곳이 필요한 것 아닌가. 이 곳이라면 아무도 찾지 않을 것이고,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가난한 작가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휴식처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만약, 혹시 잠들 듯 죽게 된다면, 그 역시 이곳처럼 적절한 곳은 또 없을 것일 테니. 

납골당의 벽은 누렇게 말라가는 담쟁이 덩굴로 뒤덮혀 있었지만, 무척이나 평화 로와 보였다. 하지만 들어가는 입구의 철문은 굵은 자물쇠로 잠겨있었기에, 나는 그 문에 기대어 지친 몸을 쉬게 했다. 세상은 이대로 끝나버릴 것만 같았다. 망자들의 오래된 휴식처에 깃든 고요와 평화로움이, 가을밤의 어둠과 함께 나를 잠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스르륵,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가 나타났다. 

얼마나 잤을까, 처음엔 아직 꿈을 꾸고 있다고 여겼다. 불현듯 뜬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어느새 맑게 갠 밤하늘에 환히 빛나고 있는 달이었다. 그리고 달빛에 비친 납골당의 굳게 잠긴 철문에서, 왠 사람의 그림자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몇 초간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화들짝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순간 온 몸에 쭈뼛한 소름이 돋았다. 

- 유령인가. 

순식간에 입안이 바짝 타들어가고, 식은땀이 흘렀지만 몸은 꼼짝할 수가 없었다. 검은 그림자는 천천히 납골당을 빠져나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나와의 거리가 지척으로 가까워지자, 푸른 달빛에 그의 모습이 비추어졌다. 40대 중반 쯤의 남자 - 프록코트에 중절모를 쓴, 콧수염을 기른 남자였다. 온몸에서 힘이 빠짐을 느꼈다. 

“ 당신 여기서 뭐하는 거요? “ 

남자가 말했다. 

후아. 그제서야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유령이 아니로구나. 

“ 당신이야말로 무슨 짓입니까?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 

남자는 성큼성큼 걸어와 내 앞에 섰다. 그러더니 나를 훑어보았다. 

“ 이런 곳에서 잠을 자고 있었던 거요? “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 갈곳이 없다보니 그리 됐습니다. 이곳 관리인이신가요? “ 

“ 관리인? “ 

남자는 갸우뚱하더니, 잠시 생각하는 듯 했다. 

“ 아니오, 관리인은. “ 

큼직한 체구에, 목소리가 낮고 매력적이다. 코트와 모자도 잘 어울렸고. 
직감적으로,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 그런데 여기서 무얼 하시는 겁니까? 전 유령이라도 나타난 줄 알고 어찌나 놀랐던지..." 

날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 유령 맞소.” 

- 뭐? 

“ 농담하지 마시구요. 정말 놀랐단 말입니다....! “ 

“ 농담이 아니오. 정말 유령이라니까. 믿기 어렵겠지만 난 지난 주에 죽은 사람이오.“ 

....이런 실없는 사람이 있나. 무슨 유령이 프록코트에 중절모를 쓰고 나타난다는 거지? 게다가 이런 신사적인 유령이 있다는 얘기는 도무지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필경 나를 가지고 놀리려는 것이 분명했다. 

“ 사람을 바보취급하시는군요. 제가 그런 말을 믿을 것 같나요? “ 

그는 잠시 바라보더니, 한숨을 한 번 쉬고는 말했다. 

“ 그럼 당신 이런 거 할 수 있소? “ 

그는 손을 들어 납골당 벽을 향해 내밀었다. 그의 손은 그대로 벽을 통과하여 안으로 쑥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곤 팔을 몇번 앞뒤로 움직이더니 다시 뺐다. 그러자 벽으로부터 다시 손이 쑤욱 빠져나왔다. 잠시 얼어붙어 있던 나는 황급히 납골당 벽을 만져보았다. 단단한 벽, 의심의 여지없이 회반죽으로 덮힌 벽이었다. 한가지 생각만이 온통 머릿속에 꽉 차 버렸다. 

....정말 유령이구나. 

너무나 놀라서일까, 잠시동안,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유령이구나. 정말 유령이구나.... 그는 그런 나를 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하나도 무섭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안도감이 드는 건 왜일까. 적어도 그와 같은 유령이라면 신사적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을까.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말을 했던 것은 꽤 시간이 지난 뒤였다. 

“ 좋습니다, 좋아요! 당신이 유령이라고 치죠. 그런데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죠, 미스터...?“ 

“ 할리벗, 다니엘 G 할리벗이오.” 

그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였다. 행여나 나의 손이 허공을 움켜쥐지나 않을까 걱정하였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손은 크고 차가왔으며, 힘이 있었다. 

“ 전 존 싱클레어입니다. 그냥 존이라고 부르세요. “ 

“ 그러지요. ...내가 여기서 뭘 하느냐고 물었소? 글쎄, 유령이 묘지에 나타난다는 건 당연한 것 아니겠소? “ 

“ 하지만.... 사람이 죽으면 천국이든 어디든 가야 하는게 아닌가요? 왜 유령이 되어 남아있는 거죠?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런 건가요? 다른 유령들은 다 어디있죠? “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소. 나 외에 다른 유령들을 본 적도 없고. 나도 왜 내가 이 곳에 있는 지 알 수가 없다오.” 

“대체 어떻게 된 건가요? 죽고 나니 영혼이 몸을 스르르, 빠져 나와 유령이 된 건가요? “ 

“ 그런건 아니오. 나는 지난 주에 죽었고, 눈을 떠보니 여기였소. 글쎄, 내가 죽었다는 것은 확신이 들었지. 그리고 내 몸이 이런 재간을 부리는 걸 보면 유령인 건 틀림없는 것 같고.... 하지만 나도 왜 내가 어디론가 가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돌고 있는지는 모르겠다오. 아무에게도 물어볼 사람은 없더군. “ 

점점 이 신사적인 유령에게 호기심이 느껴졌다. 

“ 그것 참 희안한 일이군요, 할리벗씨. 그런데, 어떻게 죽은 건가요? 병으로? “ 

“ 아니, 심장마비였던 것 같소. 내가 원래 고혈압이 좀 있었는데, 파티에서 좀 과음하고 말았지 뭐요. 간신히 집까지 와서 침대에 쓰러졌는데, 그게 그만 마지막이 된 거요.” 

“그랬군요..... 지난주라면....” 

“ 지난주 화요일. 벌써 열흘째 이러고 있다오. 밤만 되면 돌아다니는 게....“ 

순간, 무언가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 잠깐만요, 할리벗? 다니엘 할리벗이라구요? 그 유명한 작가인 할리벗?! “ 

“ 글쎄, 유명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작가였던 것은 사실이오. “ 

“ 맙소사....! <줄리안의 회상 >을 썼던 그 할리벗인가요? 맞아.... 그가 얼마 전에 죽었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 내가 쓴 것 맞소. 알아주니 고맙구려.” 


세상에. 

당시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중 하나였던 그를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나 같은 무명작가로서는 도저히 꿈도 꿀 수 없었던, 그런 동경의 대상을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그의 강한 문체와 강렬한 메시지에 감동하며, 꼭 한번 만나보고 싶어하던 그를 죽은 다음에야 만나게 되다니. 

한동안 할말을 잃은채 멍하니 서있었다. 

“ 괜찮소? 낯빛이 안 좋은 거 같은데….” 

“ 괘, 괜찮습니다. 당신을 이렇게 뵙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군요. 당신은 제가 존경하는 작가 중의 하나였지요….. 이런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저도 작가랍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3류 작가지만요. “ 

“ 저런! 댁도 작가시오? 그래, 어떤 작품들을 쓰셨소? “ 

“ 장편인 <어느 카바레 가수의 사랑>과, 작년엔 희곡인 <젊은 로체스터의 죽음 >을 썼지요! “ 

“ … 희곡을? 그래, 어느 극장에서 초연을 했었소?“ 

“ … 아직 공연된 적은 없었습니다. “ 

그는 약간 무안한지, 험험, 헛기침을 했다. 부끄러움과, 대가를 만나 이야기한다는 설레임이 뒤섞여 묘한 감정을 만들었다. 잠시 뒤 그가 입을 열었다. 

“ 당신 이야기를 해 보구려, 존. 어쩌다가 여기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거요? “ 

그의 말에, 난 내 사정에 대해서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3류 작가라는 것, 아무것도 가진 것도 없고 가족도 없으며, 하숙집에서마저 쫓겨나와 죽을 작정으로 이 곳을 찾았다는 것. 당장 빵 하나를 살 돈도 없어 하루종일 굶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하고 나자 이상하리만치 속이 후련해졌다. 이야기를 다 듣더니 할리벗은 안타깝게 느낀 모양이었다. 

“ 안된 일이오, 젊은 친구가 그런 일로 좌절하다니! 그렇게 쉽게 인생을 포기하면 안되지! 나도 한때 그토록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오….. 사흘동안 빵 한조각으로 연명한 적도 있었고, 전쟁 때는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맨 적도 있었지만, 꿋꿋하게 버텨냈다오. 젊을 때 겪은 인생의 고난들이 창작의 밑거름이 된다는 걸 왜 모르는 거요? “ 

“ 당신도 그런 시절이 있었군요….. 말씀을 듣고 보니 제가 나약하고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맞아요. 버텨내야죠….. 하지만 당장 먹고 살일이 막막하니…..” 

그는 주섬주섬 코트 주머니를 뒤지더니, 반짝이는 동전을 꺼내어 내게 주었다. 1실링짜리 은화였다. 

“ 이걸 받으시게. 이 돈이면 며칠 버틸 수 있을 거요. “ 

“ 이런, 동정을 받으려는 건 아닙니다.” 

“ 받아 두시오. 어차피 내겐 필요 없는 걸….. 대신 부탁을 하나 해도 되겠소? “ 

“ 어떤…? “ 

“ 괜찮다면, 내일 밤에도 찾아와 주겠소? 무척이나 답답했는데, 얘기할 상대가 있으니 훨씬 낫구먼. “ 

“ 내일 밤이요? 여기서 말입니까? “ 

“ 그래요, 내일 밤. 와 준다면 방을 빌릴 수 있게 도와 드리리다.” 

…..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잠시 망설였다. 어차피 내겐 별다른 계획도 없지 않은가! 잠시 침묵이 흐르자, 그가 입을 열었다. 

“ 나는 이제 갈 시간이 된 것 같소. 내일 마저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 

“ 가다니? 어디로요? 어디로 간다는 말씀이죠? “ 

“ 내가 원래 왔던 곳으로. 내게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거든…. ” 

말을 마치더니 , 스르륵 몸을 돌려 납골당을 향했다. 그리고 그의 모습은 처음 나왔을 때처럼, 미끄러지듯 철문을 통과하여 안으로 사라졌다. 황급히 철문을 붙잡아 보았지만, 어느새 그는 사라지고 철문에는 차가운 감촉만이 남을 뿐이었다. 


…..멀리서 새벽을 알리는 첫닭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떴을때는 이미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눈부신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며 눈을 간지럽혔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묘지에는 산새 몇 마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쪼르륵, 다람쥐 한마리가 오래된 떡갈나무의 가지위를 가로질러 달아났다. 

‘ 꿈을 꾸었던 건가…… ‘ 

몸을 일으키며, 어젯밤 있었던 일을 회상하곤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재밌는 꿈이군. 유령이라니…… 그것도 중절모를 쓴. 

호젓한 가을의 묘지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득, 내가 어제의 절망적인 기분 으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깨달았다. 배고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세상은 평화로왔으며, 어쩌면 그렇게 절망적인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벌떡 일어나서, 천천히 주변을 걷기 시작하였다. 인적이 없는 적막한 침묵이,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찾아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납골당에 안치된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놓은 묘비들이 서있는 곳까지 걸었다.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넣은 나는, 뭔가가 손가락에 잡히는 것을 느꼈다. 뭘까? 그것을 꺼내어 보았다. - 1실링 짜리 은화. 순간, 온몸이 굳어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묘비를 읽었다. 

< 다니엘 G 할리벗 >

납골당 입구에 있는 비석에 새겨진 이름이었다. 









“ 다시 와줘서 고맙소, 존! “ 

“ ….역시 꿈은 아니었군요, 할리벗씨! “ 

할리벗은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게 맞았고, 나는 낮에 준비했던 얘기들을 꺼내었다. 

“뭔가를 잔뜩 들고 왔군, 그게 뭐요?” 

“ 서점과 도서관에 들려서 이것저것 좀 조사해 보았지요. “ 

“ 뭘 말이요? “ 

“ 유령에 대해서죠, 할리벗씨. 어떤 경우에 유령이 되는가. 유령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등등에 관해서요.” 

콧수염을 만지며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 그래, 뭘 찾아내셨소? “ 

“ 책에 의하면, 대개 죽은 영혼들은 뭔가 이승에 남겨둔 것이 있을 때 유령이 되어 떠돌게 된다더군요. “ 

“ 남겨진 것? “ 

“네. 예를 들자면 사랑을 못 다 이루고 죽었다거나,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거나, 혹은 해야 할 일을 다 못하고 죽었을 때 말이죠. “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 글쎄….. 최근에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심장마비로 죽었으니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것은 아닐 텐데….. 또 뭐라 그랬소? “ 

“당신이 해야 할 일을 다 마치지 못했을 경우.” 

“아직 내가 다 하지 못한 일이 남아 있었던 건가? “ 

“ 뭐, 꼭 그런 거라는 건 아니지만…. 당신이 천국으로 가지 못하고 남아 있는 건, 뭔가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그 이유를 찾아내야죠. 생각해 보세요… 뭔가 짚히는 부분이 없는지…… “ 

그와의 만남으로 인해, 이미 죽을 생각은 잊은지 오래였다. 일단 배를 불렸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죽은 대가의 유령과 만난다는 것은 너무나 흥미로운 일이었고, 그런 그의 존재는 자칫 사그러질듯한 나의 삶에 유쾌한 열정을 되찾아 주었다. 인생은 얼마나 예측불가능한 것이란 말인가! 

“ 어쩌면 빚을 못 갚은 것일지도 모르죠. 혹은 작품을 완성을 못했다거나….. “ 

문득, 할리벗이 고개를 들었다. 

“ ….그건가? “ 

“ 그거라뇨? “ 

그는 턱을 어루만지며 천천히 생각했다. 

“ 실은 말이오…. 내가 최근에 구상하고 있었던 작품이 있었소…. 그래서 막 앞부분을 쓰던 무렵이었는데, 그만 죽은 거란 말이오. 혹시 그 일을 다 마치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겠소? “ 

“ 그런가요? 혹 그 작품이 필생의 역작이라든가, 뭐 그런게 아니었나요? “ 

“ 필생의 역작 정도는 아니지만, 뭐랄까, 내 사상과 인생관을 잘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글이었소…… 맞아. 난 그 글을 완성하고 싶었소. “ 

- 그거다. 직감적으로 제대로 찾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 그럴 줄 알았어요! 뭔가 있을 줄 알았죠…. 분명히 그게 이유일 겁니다! 맞아요…. 당신은 그 작품을 완성해야만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일지도 몰라요. “ 

“ 과연 그런 것일까…? 글쎄…..” 

그는 못내 의심스러운 모양이었다. “ 뭐 어차피 할 일도 없지 않습니까? 밑져야 본전인 걸요! 한 번 시도해 볼만한 일이잖아요? “ 

“ 그렇긴 하군. 그런데 어떻게 마저 쓰단 말이오? 그 원고는 내 서재의 서랍속에 있는데……” 

“ 어떻게 하긴요? 가서 쓰면 되지 않나요? “ 

“ 그게 말이오….. 왠일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묘지 밖을 벗어나지 못한다오. 그러니 어찌 집까지 갈 수 있겠소? “ 

“ 그런 문제라면 제가 가져다 드리지요! 당신 집 주소만 가르쳐 주신다면요! 빨리 행동한다면 원고를 구할 수 있을 겁니다. “ 

“ 그래 준다면 나로선 정말 고마울게요, 존 “ 

“ 종이와 펜도 가져다 드리지요! 당신은 글을 완성할 수 있을 겁니다! “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생겼다. 그리고 그것은 중요한 일이라는 확신이 가득했다. 며칠전만 해도 온통 절망적이던 내게 열정이 솟아 올랐다. 그래, 어쩌면 내가 그날 이 묘지로 발을 옮긴 것은 이런 역할을 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뭔가 위대한 작품을 세상에 등장시키기 위해서. 



다음날, 그가 준 열쇠로 그의 집에 들어가서, 원고를 무사히 가지고 나올 수 있었다. 









무척이나 당혹스러웠다. 

“ 무슨일이오, 존? “ 

“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는데… 어제 당신이 분명히 글을 쓰셨지요? 저도 옆에서 그걸 지켜보았구요. “ 

“ 그랬지. 열 한페이지를 썼었소. “ 

“ 그런데 말이죠….. 그 원고를 분명히 제가 그대로 보관하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까 그게 전부 백지인 채로 있지 뭡니까.” 

그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뭐라고? 내가 쓴 글을 모두 잃어버렸단 말이오? “ 

“ 아뇨… 잃어버린 건 결코 아닙니다, 확실하게 보관했거든요. 다만 종이는 있는데, 글자만 사라져 버렸어요….. 마치 당신이 했던 일이 모두 무효였던 것처럼.”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그는 나의 손에서 원고뭉치를 가져가 몇 장 뒤적 이며 살펴 보았다. 그러나 온통 백지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내 냉정을 되찾고, 사태를 이해했다. 

“ 말하자면, 유령인 내가 쓴 글은 현실세계에선 남아있지 못한다는 뜻이로군. 그런거요? “ 

“ 뭐, 그런게 아닐까요. “ 

나도 비슷하게 추측하고 있었던 차였다. 

“ 그럼 도대체 어떻게 글을 완성한단 말이지…. “ 

글쎄.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그는 낙담한 듯이 두 손으로 머리를 싸쥐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답답해졌다. 하나의 희망이 싹트자마자 사그러진 꼴이었다. 어떻게 한단 말인가. 내가 대신 써줄 수도 없고……. 


대신? 

“ 이봐요, 할리벗! 이렇게 하면 어때요? “ 

급히 그의 어깨를 잡으며 소리쳤다. 

“ 어떻게 말이오? “ 

“ 제가 대신 쓰는 겁니다! 당신이 내용을 구술해 주면, 제가 받아 적지요! 그러면 그건 사라지지 않을 거 아니겠어요? “ 

그는 손바닥으로 무릎을 쳤다. “ 그렇군! 좋은 생각이야. 그렇게 하면 계속 글을 쓸 수 있겠구만! “ 

갑자기 모든게 맞아떨어져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 역시, 이 모든게 우연이 아니었던 거에요! 당신이 날 만난 이유가, 그리고 내가 당신을 만난 이유가 있었던 거죠….. 둘이 힘을 합쳐야만 그 일을 끝낼 수 있는 겁니다!” 









그 뒤로, 그와 나 사이의 기묘한 관계가 지속되었다. 

그가 내게 주는 돈으로 난 새 하숙집을 얻고,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낮이면 하숙집의 침대에서 자다가, 밤이 되면 묘지로 찾아가 그와 함께 새벽까지 글을 쓰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저녁이 되어 그를 만나러 가지 전까지는 원고를 깨끗하게 옮겨 적고, 전날의 느낌을 유지하려 애썼다. 이 하루하루의 일들은 아직까지도 나에게 결코 잊혀질 수 없는 인상적인 체험이었는데, 대가의 글을 쓰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참여할 수 있는 것은 무명의 작가였던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열정적으로 글을 썼으며, 때로는 깊은 생각에 잠겨 몇시간이고 작업을 중단 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급히 받아쓴 원고를 다시 읽어보며 교정을 보기도 하고, 또 영감에 가득찬 아름다운 구절들에 감탄하기도 하였다. 그는 종종 한 문장을 시작하기 위해서 오랬동안 고민하곤 하였는데, 그런 고민 끝에 선택한 문장은 우아하면서도 적절했고, 힘이 있으면서도 부드러웠다. 나는 그동안 내가 배워온 모든 시간들보다, 그와 함께 일한 시간동안 작가로서 알아야 할 것들을 더 많이 배울 수 있었다. 

“ 잠깐만요, 다니엘. 조금만 천천히 불러줘요. “ 

“ 그럴 순 없다네, 존. 시간이 없다면 대강 받아적게. ….그 인상만 남도록 말야. - 그런 다음에 나중에 채워 넣으면 돼. 영감은 순간이라네. 그걸 놓치고 문장을 완성해봤자 공허할 뿐이야.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그 스쳐가는 찰나는 놓치지 않는 것 뿐이지.” 

나는 그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글을 받아 적으면서 점차 내 자신이 그의 글, 그의 생각,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닮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면서 내가 이전에는 무엇이 부족했었는지, 작가로서 내가 추구하고 지양해야 할 것들이 무엇 인지를 깨달아갔다.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글에 관해서, 혹은 삶에 관해서. 

“ …..다니엘, 당신 소설에서 이 부분은 도저히 공감할 수가 없어요. - 굳이 이렇게 혹독하게 굴 필요가 있는 걸까요? 주인공도 사람일 뿐이잖아요. 인간적인 면을 너무 간과하는 건 아닌가요? “ 

“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인간은 인간이라는 이유로, 신이 되고자 하는 노력을 너무나 게을리 하였다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요인이 무엇이겠나? 소박하게 만족하며 인간적인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것? -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인간이면서 인간을 넘어서려고 노력하는 것…… 슬프게도 그게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라네. “ 

“ 슬프다구요? “ 

“ 그래, 슬픔. 그게 인간의 감성의 가장 밑바탕에 깔려 있다네.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슬픈 것이거든. 그걸 이해하지 못한다면 감동을 담을 수 없어.” 

물론 그와 나누었던 대화의 의미를 그때 다 이해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떤 것들은 바로 알아 들었지만, 어떤 것들은 한참 뒤에야, 혹은 몇 년이 지나서야 알게된 것도 있었다. 전에는 이토록 누군가의 글을 완전히 이해해 본 적이 없었다. 작업이 진행될수록, 과연 그가 글을 쓰는 것인지, 내가 쓰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모든 것이 나에게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자궁이 좁아지기 시작한 태아처럼, 무언가가 새로 태어나기 위해 나의 정신 안쪽 어딘가에서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자네는 아직 알아야 할 것이 많아, 존.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만은 아니라네. 성경을 생각해보게나. 만약 요한이 성경을 쓰면서 자신의 해석을 잔뜩 집어넣었으면 어떻게 되었겠나? 만일 모세가 성령의 말씀을 나름대로 해석하여 설명하려 들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나? “ 

“그럼 우리는 뭘 써야 하는 거지요?” 

“우리는 기록할 뿐이야. 우리가 쓴 글의 의미는 사실 자신조차 알 수 없는 법이라네. 마치 씨앗과 같은 거지. 씨앗이 오염되지 않았다면 언젠가는 싹을 틔우기 마련일세. 하지만 언제, 어디서 싹을 틔울지는 알 수 없지.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건강하고 썩지 않은 씨를 심는 일일세.” 

혼자 있게 되면, 그와 나눈 대화들과, 그의 글을 비교해 보며 많은 생각에 잠겼다. 이전의 나는 썰물처럼 사그러들어가고, 같은 바닷물이지만 더욱 풍성해져 돌아온 밀물처럼 나를 채웠다. 다듬어지지 못한 독한 열정을 제멋대로 헤쳐놓을 줄만 알았던 나의 작가적 감성은, 차곡차곡 채워져 가는 그의 원고들과 함께 익어 가고 있었다. 









“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 “ 

“ 잠깐만요, 그의….. 마지…막… 말…이 었….다. “ 

받아적는 손가락이 얼얼하다. 마침표를 찍고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얘기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다니엘은 나를 내려다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 끝이네. 글은 끝났어. “ 

난 눈을 커다랗게 뜨며 입을 벌렸다. 그의 말이 접수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끝이라.... 끝났구나. 

“ 축하합니다! 드디어 해내셨군요! “ 

원고를 내려놓고 일어나 그를 얼싸안았다. 그도 기쁜 듯이 웃음을 터뜨리며 나를 안았다. 어느새 11월도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었다. 묘지의 밤공기는 무척이나 차가왔다. 

“ 그래….. 다 자네 덕분이지. 드디어 일을 끝마친거야. “ 

“ 그래요, 결국 완성할 줄 알았지요! 이렇게 끝을 맺는군요.” 

“ 이제야 한 시름 놓을 것 같네…. 이제 내 할일은 마쳤으니 말일세.” 

“ 그렇군요….. 이제 당신의 임무는 완수한 거겠지요.” 

우리는 한동안 손을 맞잡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건 막 산고를 마친 여인과도 같은 만족감이었다. 하지만 뭔가가 이상하다….. 서로가 감지하고 있는 막연한 불안감이 우리를 엄습했다. 결국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다 끝난 건가?” 

“ 그러게요…. 어떻게 되는 걸까요? “ 

“ 글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걸? “ 

“ ….출판까지 완료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지요. 아직 오늘 쓴 부분의 교정도 봐야 하구요…. 참, 그러고 보니 아직 하나 남았군요?! “ 

“ 뭐 말인가? “ 

“ 서명을 해야죠, 다니엘! 작품을 끝냈으면 서명을 해야 할 거 아닙니까? “ 

“ 그렇군….. 그런데 서명을 어떻게 하지? 내가 하면 그냥 사라져 버리고 말텐데? “ 

“ 여기에 써주시면 제가 그대로 따라 그리지요. 몇 번 연습하면 될 겁니다. “ 

“ 그럴까? “ 

그는 펜으로 마지막 페이지에 서명을 했다. 그걸 보고, 몇 번 다른 종이위에 연습해 본 후에, 그의 서명위에 그대로 따라서 그려내었다. 그는 그런 나를 어깨 너머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천천히, 조심스레, 마지막 획까지 완성시켰다. 

“ 하하, 어때요, 다니엘? 근사하죠? 이정도면 당신 수표도 위조하겠는데요?! “ 

“ …..그럴 듯 하지 않아요? “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다니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다니엘? “ 

나는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싸늘한 11월의 묘지에는 나만 혼자 있을 뿐이었다. 

“ 다니엘!!! “ 

소리쳐 불러보아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차가운 늦가을 바람에 낙엽이 굴러가는 소리만이 대답할 뿐이었다. 나는 등잔을 들었다. 불빛이 납골당 주변을 구석구석 비추었지만, 어디에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인기척조차 없었다. 애초에 여기에 있었던 사람은 나 혼자였던 것처럼, 묘지안은 스산하고 고요하였다.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원고들이 몇 장 흩어졌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핥고 지나갔다. 그 바람은 달콤한 꿈에서 이제 막 깨어난 허탈함처럼, 싸늘하게 나의 온 몸을 얼어붙게 만들고 사라졌다. 

문득, 그가 이제 완전히 떠나버렸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는 만날 수 없으리라는 사실도 함께. 









우여곡절 끝에, 결국 그의 작품은 출판되었다. 특유의 문장과 서명으로 인해 그의 유고로 인정받을 수 있었으며, 공동저자로서 그의 마지막 작품에 대한 저작권 수입은 내가 누리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또 한번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구술을 받아 적은 나 역시 덩달아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에게 또 한번 빚을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나, 설사 알았더라도 흔쾌히 동의했을 거라 생각하고 스스로를 위안하였다. 

안정적인 수입과 그의 작품으로 인해 알려진 나의 이름, 그리고 그와 함께 보낸 두 달간의 경험으로 인해 나는 비로소 작가로서 성공할 수 있었다. 한참 뒤에서야 내가 얻은 것이 정말로 많다는 것, 그와의 경험이 나를 크게 성장시켰다는 것을 알았다. 

그후로도 오랬동안, 그는 내 마음속에 살아있었고, 많은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 해의 가을은 영원히 멈춰진 채로, 나의 뇌리에 고정되어 버렸다. 한가로울 때면, 그 묘지를 찾아가 그와의 기억을 추억하곤 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그에게, 나 자신에게 묻곤 하였다. - 왜 하필 나였을까. 내가 그 날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난 죽고 말았을까. 그가 해야 했던 일은 결국 해 낸 것일까……. 그의 마지막 작품은 훌륭한 것이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그의 최고의 작품이라 할 만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것이 그의 사명이었던 것일까. 그것이 그를 유령으로 떠돌게 할 만큼 중대한 일이었을까. 우리가 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다니엘, 당신은 답을 알고 있겠지요, 묘비를 바라보며 그에게 묻곤 하였으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고, 결국 쓸쓸히 홀로 되돌아오곤 하였다. 









세월은 흘렀고, 나는 나름대로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 아니, 어쩌면 한창 때의 그보다도 더 유명한 작가가 되어 있었다. 

- 인생에는 그런 것들이 있다. 당시에는 너무나 선명하여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던 일들. 눈이 시리도록 선명하여 그 윤곽을 잡아낼 수 없던 기억들. 흙탕물이 가라 앉아 물이 맑아질 때까지는 시간이 걸리듯이, 진정한 의미가 말로 표현할 수 있도록 형태를 잡아가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곤 한다. - 그것은 잡히지 않는 구름처럼, 기억나지 않는 새벽의 꿈처럼 두리뭉실하게 내 마음속을 떠돌다가 천천히, 조금씩 그 형상을 만들어 가곤 한다. 그리고 어느날인가, 아, 불현듯 그 모습이, 그 사실이 확연히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갑자기 모든 것이 명확해지는 것, 거기에는 아무런 새로운 것은 없다. 나는 이미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안에 깊이 묻혀있던 씨앗이, 완전히 잊어버린 먼 훗날 불쑥 그 떡잎을 피운 것이다. 거기에 필요한 것은 오직 오랜 시간, 적당히 닳아지고 적당히 색이 바래질 시간만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제는 안다. 그가 이 세상에 남아서 마저 해야 했던 일은, 그 소설이 아니었다는 것을. - 그가 세상에 남았던 이유는 바로 나였던 것이다. 그는 마지막 으로 나를 살려야 했던 것이다. 그것이 그가 죽어서도 죽지못하고 남았던 이유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어떤 논리적 추리도 아니었다. 그것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때가 되면 잊어버렸던 오래된 씨앗이 싹을 틔우듯이 저절로 알게 된 것이었다. 

물론 그것을 그가 선택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역시 이유를 몰랐으리라. 하지만 그는 절망속에서 죽어가던 나를 살려야 했고, 또 가능성 있는 작가로서 재기할 수 있도록 도와야 했다. 어떤 운명적인 이유가, 그 때 나를 그곳으로 인도하였고 다니엘을 만나게 하였다. 아니, 어쩌면 그의 존재와 그의 작품 모두가, 그 순간에 나를 살리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 단지 나를 살리기 위해서만이라면 그가 굳이 작가였을 필요는 없었으리라. 하지만 그 날 누군가 나를 살려내고, 나를 유명한 작가가 될 수 있도록 자극할 수 있어야 했다. 잔인하지만, 말하자면 그것이 그의 존재의 이유였던 셈이다. 

나는 이제 안다. 정교하게 맞물려 가는 이 세상의 운명적인 흐름에는, 어떤 고귀한 이유가 존재한다는 것을…. 물론 내가 궁극적인 이유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내가 살아남고, 작가로 성공한 것 역시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이리라.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지만, 추측하건데, 나의 작품이 요즘 젊은이들에게 많은 변화를 주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나의 생존은 그 어떤 누군가의 심경에 변화를 줄 책 한 권을 남기기 위해서일거라고 상상해 본다. - 그는 결코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젊은 시절, 자신의 사상에 영향을 끼친 어떤 책 한 권이 존재하기 위해 내가 태어났고, 그런 나를 살려내고 작가로 키우기 위해 또 한 작가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들이 어떤 운명적인 만남으로 그 역할을 완수해 냈는지를…… 

아마도 그는 대단히 중요한 사람이리라. 아니, 어쩌면 그 역시 더 큰 목적을 이루기 위한 중간단계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거대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로서도 알지 못하리라. 이해할 수 있는 의미를 빚어내는 데는 정말로, 정말로 많은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까. 

가끔씩, 다니엘을 떠올리곤 한다. 우리의 만남이 어떤 의미였는지, 내 생각들을 말해 본다면 그는 어떻게 반응할까. 그도 동의할까? 우리의 초현실적인 만남이, 단지 거대한 바다의 흐름를 연결하는 잔물결이었다는 걸 인정할까…..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우리의 작은 사명과, 그와의 만남을 감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 그래서 어떤 일들은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아직 그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래된 이야기들은, 어떤 추억들은, 주어지지 않은 나름의 의미를 만들어 가기도 한다. - 내가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겨우 그런 것들이다. 화살은 어디선가 커다란 나무가 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알 수가 없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같이 화살을 쏘아올리던 날의 기억, 함께 씨앗을 심을 때의 추억과 같은 것들 뿐이다. 그게 우리에겐 최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그와 다시 만나서, 의미있었던 우리의 만남을 다시 이야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nd.

 

'SF'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폰 노이만 기계  (0) 2020.05.05
너희는 나의 외로움을 아니?  (0) 2020.05.05
고해(告解)의 별  (0) 2020.05.05
Simulation Saturated  (0) 2020.05.04
오멜라스를 떠났던 사람들  (0) 2020.05.04

류기정

 

 

 


1. 오늘

 

 


 끝도 없이 올라가는 듯 하던 엘레베이터가 어느새 목적지에 가까와지고 있었다. 감속에 들어가며 몸이 가벼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자 웅성이던 사람들의 목소리는 어느새 잦아들어, 엘레베이터의 내부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윽고 스피커로부터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 이제 곧, 정상에 도착하겠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벨트를 풀지 마시고, 완전히 정지한 후에 자리에서 일어서 주시기 바랍니다."

 

 엘레베이터의 구석쪽 좌석에 앉아있던 남자는 목이 타는지, 홀더에 놓인 물컵을 집어들었다. 긴장된 눈빛을 보이는 것은 그만이 아니었지만, 유난히 초조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와는 대조적으로, 그의 옆에 앉아있는 갈색머리의 여자는 편안히 눈을 감고 있었다.

 

 철커덩.

 

 육중한 기계음을 내며, 엘레베이터가 멈춘다. 사람들은 벨트를 풀고, 자리에서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벨트조차 풀지 않은채, 좌석에 앉아 있었다. 그의 손은 손잡이를 꽉 쥐고 있었으며, 손잡이의 금속부분은 땀으로 번들거렸다. 그의 얼굴은 흥분으로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옆좌석의 여자가 문득 눈을 떴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보았다.

 

" 내려야죠. "

 

 그녀는 담담하게 벨트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보리색 레인코트가 갈색 머리와 잘 어울렸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녀가 일어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내리고, 엘레베이터에는 그들 둘만 남아 있다.

 

 " 안 내려요? "

 

여자는 남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남자의 입술은 뭔가를 말하려는 듯, 달싹거렸다.

 

 

 

 

 

2. 어젯밤

 


딸칵.

 

라이터의 불빛이 어두운 방안을 순간적으로 붉게 물들이고는 사라졌다.

담배연기는 창가에서 쏟아지는 푸른 달빛을 흐뜨리고는 사라진다. 호텔의 커다란 창 밖으로 비치는 하늘에는 두 개의 창백한 달이 떠 있었다. 어디선가 마지막 밤을 즐기려는 듯한 음악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 내일이면 담배도 끊는 건가요? "

 

뒤를 돌아보자, 알몸의 여인이 침대 시트에 몸을 반쯤 가린채, 이쪽을 향해 돌아누워 있다. 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대답했다.

 

" 글쎄.... 20년이 넘게 피워왔는데, 그럴 수 있을까?"

 

여자는 몸을 일으켜 테이블 위의 담배갑에 손을 뻗쳤다.

 

" 그럼 난 끊을 수 있겠군요, 피우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니까."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 습관조차 잊게 될까? 담배 취향 같은..."

 

그녀의 담배끝이 빨갛게 타올랐다. 그녀는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 아닐 거에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다시 한모금 연기를 빨아들인 후, 말을 이었다.

 

" 하지만 난 다른 담배를 피울거에요. "

 

" 잊고 싶은 거야? "

 

" 지워버리고 싶어요. 담배도, 담배를 피우게 된 이유도. 모든 걸 다. "

 

그는 아무말 없이 다시 창가로 얼굴을 돌렸다.

그녀는 담배를 눌러 끄고, 배게에 얼굴을 묻었다.

 

 

 

 


3. 어제

 


그녀는 손을 내저었다.

 

" 아뇨, 안돼요. 사진을 찍으면 안된다는 걸 알잖아요."

 

그는 카메라에서 눈을 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 등록한 사람들은 사진을 찍지 않는다구요, 그건 규칙이에요. "

 

" 그런 규칙이 있단 말이야? "

 

"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지만..... 보세요, 아무도 사진같은 건 남기지 않잖아요? "

 

그는 카메라를 든 손을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사람들이 산책을 하고 있었으나, 아무도 사진을 찍는 사람은 없었다. 잠시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피식, 웃으며 카메라를 집어넣었다.

 

" 그렇군, 맞아. 바보같은 생각이었어. "

 

그녀는 두 손을 등뒤로 맞잡고 앞서 걸어갔다. 그는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일 미터쯤 떨어져서 그녀의 뒤를 따랐다.

 

" 정말 아름다운 곳이에요, 그렇죠? "

 

" 그래, 정말. "

 

부부로 보이는 노인들이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길 건너편의 벤치에선, 한 남자가 뭔가를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그 옆에서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위로해 주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 여긴 마치 정신과 병원같아. "

 

" ? "

 

" 그 왜, 집단으로 심리치료하는 거 있잖아. 환자들이 둥글게 둘러 앉아서 한명씩 자기 얘기를 하고, 그러면서 카타르시스로 치료되는 거 말야."

 

" 사이코 드라마처럼요? "

 

" 그런게 사이코 드라마였던가? ... 아뭏든 그런식의 자기고백이 치유효과가 있는 것 같아. 여기에선 어떤 비밀도 숨김없이 다 이야기 할 수 있으니까. 귀환영업소 사내가 그러는데, 20% 정도는 산에 오르지 않고 되돌아 간다더군."

 

" 기억을 그냥 가진채로요? "

 

" 응. 그들은 여기에서 지내면서 기다리는 동안 스스로를 치유시킨 거지. 어쩌면 막판에 자신이 없어졌을 수도 있고.... "

 

그녀는 소녀처럼, 리조트의 꽃밭으로 뛰어 들어갔다. 

 

" 그런 사람에게 비밀을 털어놓았다면, 난처하겠네요."

 

" 상관있나. 어차피 그런 사실조차 기억못할텐데."

 

훗, 그녀는 웃으면서 꽃밭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더니, 뭔가를 찾으려는 듯 유심히 바닥을 살폈다.

 

" 후회하진 않겠죠? "

 

그녀가 문득 뒤돌아 보며 물었다. 그는 천천히 그녀를 향해 걸었다.

 

" 후회할 수도 없겠지. "

 

" 내일, 몇시죠? "

 

" 17시. "

 

" 그럼, 이제 딱 스무시간 남은 거네요. "

 

" 그렇지. "

 

" 키스해줘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두 팔을 벌려 부드럽게 안았다. 그는 천천히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여섯개의 태양이 한점을 향해 모여들고 있었다.

 

 

 


4. 이틀 전.

 


"걱정 마세요, 손님. 저희집은 정부로부터 직접 허가를 받아서 하는 업소라서, 결코 우려할 만한 일은 없습니다, 내 장담하지요."

 

턱수염의 남자는 호탕히 웃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뚱뚱한 체구에서 나오는 웃음소리는 자그마한 귀환영업소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는 계약서를 턱수염사내쪽으로 밀어주며 물었다.

 

" 만약 깨어나지 않을 경우엔 어떻게 돼죠? "

 

" 그럴 경우는 거의 없죠, 제 기억으론 딱 한번 있었는데, 알고보니 그 양반은 간질을 앓던 환자였지 뭡니까? - 그 뒤론 간질이 있는 사람은 등록이 아얘 불가능해졌지요. 손님도 등록하실때 의사한테 검진을 받으셨죠?"

 

그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 실패하는 경우도 있습니까? "

 

" 뭐, 간혹 있지요. 그건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만, 대개는 다 잘 됩니다. 실패하실 경우엔 기간에 따라서 환불해 드리지요. 그리고 제우스여행사 배로 오셨죠? 거기 상품은 자동으로 보험에 가입되는 거니까, 안 되면 보험금도 받으실 수 있을 거구요. "

 

" 계약 파기는 어떻게 됩니까? "

 

" 손님들 중 20% 정도는 기다리시는 며칠 동안에 등록을 철회하시죠. 그리고 나머지 분들 중에서도, 마지막 순간에 그만두시는 분들이 또 20%정도는 돼요. 그럴 경우에는 계약금만 포기하시면 됩니다. "

 

" 20%나? 그렇게 많나요? "

 

" 그럼요! 손님도 보셨겠지만, 지금 여기 온 양반들, 얼마나 양순해졌습니까? 저들도 처음 왔을 땐 저렇지 않았어요. 매일같이 술이다 마약이다 파티다 하며 흥청망청하죠. 그러다가 점점 마지막 순간이 오니까 다들 뭔가를 깨달은 겁니다, 말하자면 경지에 이른 거지요. - 어차피 며칠 뒤면 다 잊어버릴거, 서로서로 믿고 털어놓고 울면서 다 벗어버리는 겁니다. 내 아들이 죽었어, 그녀가 날 버렸지, 난 사람을 죽였어! 뭐 이런 비밀들을 다 털어놓고 나면 속이 후련해지니까요. 그러고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받고 돌아가는 거지요. 그게 바로 기적입니다! 기적이 별건가요? 다 치유됐는데 뭐하러 '그 산'에 올라갑니까? 이 별은 고해의 별이 아니라 기적의 별, 부활의 별이라니까요! "

 

사내는 껄껄대며 웃는다. 그도 재미있다는 듯이 따라 웃었다.

 

" 이 별은 신의 축복입니다! 여기에선 모든 죄를 용서받으니까요. 우리로 말하자면, 에, 신의 천사들이라고나 할까요. 천국에 오신분들을 안내할 일손은 필요한 법이니까요. 않그렇습니까, 손님? "

 

사내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하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나가는 그의 뒤통수에 사내의 외침이 들렸다.

 

 "진정한 구원은 죄를 용서받는게 아닙니다. 죄를 지었다는 사실조차도 잊게 해주는 것, 그거야 말로 신의 선물이지요, 하하핫! "

 

몇발자욱을 나서자,  밖에서 기다리던 그녀가 반갑게 웃으며 맞아주었다.

 

" 다 됐어요? "

 

" 다 됐어.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군. "

 

 

 

 

 

 

5. 사흘전.

 

 


  그가 토해내던 통곡이 잦아들고, 목이 메이는 꺽꺽거리는 듯한 울음이 남았다. 그는 웅크린 채, 몸을 부들부들 떨며 앉아있는 그녀의 다리에 기댄채 흐느꼈다. 폭풍같은 격정이 지나가고 잔잔한 평화로움이 두 사람을 감쌌다.

 

 " 괜찮아요..... 괜찮아. 다 지난 일인 걸요...."

 

 그녀는 손을 들어 그의 웅크린 등을 감쌌다. 어린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토닥거리며 속삭였다. 그는 서럽게 맺혀있던 눈물을 흘리며 그녀에게 더욱 힘껏 매달렸다. 그런 그의 어깨와 머리를 품에 감싸안으며 그녀는 말했다.

 

 " 당신 잘못이 아닌 거에요. 어쩔 수 없었던 거니까.... "

 

 아이가 엄마의 품에 파고들듯, 그는 그녀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감싸 안은채 한참을 있었다. 그녀의 체온이 전해지자 그의 흐느낌은 잦아들었고, 간헐적으로 어깨를 떨 뿐이었다. 그녀는 손으로 그의 이마와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그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런 그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눈에도 가득 눈물이 고여 있었다.

 

 " 괜찮아요, 다 잊을 수 있으니까..... "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그를 더욱 강하게 끌어당겼다. 아기가 엄마젖을 찾듯, 그는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길고 뜨거운 키스였다.

 

 

 

 

 

 

6. 사흘전.

 

 


그는 테이블에 한쪽 팔꿈치를 괸 채, 약간은 뜻밖이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 잃어버린 사랑 때문에 ?"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는 머리를 쓸어올렸다.

 

" 그래요, 사랑. 왜요? 너무 유치해서요? "

 

그는 말없이 그녀의 잔에 술을 채웠다. 
  
잔을 받아 입가로 가져가던 그녀는, 술이 목에 걸렸는지 콜록거리며 술을 뱉어냈다. 그는 재빨리 티슈를 꺼내어 그녀에게 건네었다.

 

" 그거 알아요? 어디를 봐도 그 사람이 남아 있다는 거. 아침에 세수를 할 때에도, 아, 이건 그가 쓰던 칫솔이었지, 화장할 때에도, 이건 그 사람이 좋아하던 향수였는데,  여기 그 사람이랑 같이 왔었던 곳인데...... "

 

 " 사랑이라...하지만 정말 그토록 사랑했다면, 아프더라도 기억을 간직하는 게 더 낫지 않겠소? "

 

 그 역시 잔을 입술에 가져가며 말했다. 그녀는 어깨가 가볍게 들썩였다.

 

 " 훗, 그렇게 말하다니 당신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에요. 아니면."

 

그녀는 잔을 들이켰다.

 

 "... 아니면? "

 

 " 아니면, 그런 사랑을 아직 한 번도 못해봤거나."

 

 그는 천천히 몸을 뒤로 젖혔다.

 

 " 그럴지도 모르지. 난 전역한 이후로는 누군가를 사랑해 본적이 없소. 아니, 그 뒤론 난 누군가를 사랑할 수가 없었던 거지만."

 

 그녀는 약간 미간을 찌뿌렸다.

 

 "전역한지 얼마나 됐는데요?"

 

 " 이제 7년...아니 햇수로는 8년이군. "

 

 그녀는 몸을 비스듬이 앞쪽으로 기울인채 물었다.

 

 " 긴 시간이네요... 왜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는 거죠?"

 

 " 그건......"

 

 표정이 어두워진채, 그는 손을 미간으로 가져갔다.

 

 "기억하고 싶은 않은 일이 있었소. "

 

 그녀는 훗, 웃으며 그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 기억하고 싶지 않다.... 그게 당신의 이유로군요? 이 별에 온."

 

 " 그래요. 당신이 사랑때문이라면, 난 군에서의 기억때문에 왔소."

 

 " 얘기해봐요. 어떤 일이었는지..."

 

 "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그의 빈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 바보같은 소리 말아요. 여긴 누구나 당신같은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구요.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결국은 떠올려야만 해요. 알잖아요? 기억을 지우려면 '산'에서 계속 그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걸..."

 

 " 그 땐 생각할 거요."

 

" 그럼 지금 애기해봐요. 연습처럼. 아니, 어쩌면 그 기억과도 사흘 뒤면 안녕이니까.... "

 

 그녀는 잔을 들고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 한명쯤, 당신의 비밀을 같이 가지고 '산'에 오르는 것도 괜찮지 않겠어요? "

 

그는 천천히 다시 담배를 물었다. 담배가 반정도 타들어갈 때까지, 그는 말이 없었다.

 결심한 듯, 그는 담배를 끄고 입을 열었다.

 

"7년 전이었소. 난 행성반란지역에 투입된 특수부대의 소대장이었지...."

 

 

 

 

 

 

7. 나흘전.

 

 

"....정말 놀랍지 않소? 여섯 개의 태양이라니! "

 

 그는 창밖을 내다보며 탄성을 질렀다. 여객선의 창밖에 펼쳐지는 놀라운 풍경에, 그는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 정말 그러네요. 눈이 부실 정도에요. "

 

 크고 작은 여섯개의 붉은 태양이 한 눈에도 시야에 들어올 만큼 모여 있었다.  어느새 그의 등 뒤로 온 그녀는, 한손에 마티니 잔을 들고 그의 어깨에 살짝 기대었다. 그는 순간 마음이 두근거렸으나, 가만히 있었다. 어깨를 통해 그녀의 체온이 전해졌다. 전망창의 앞에는, 6개의 태양을 배경으로 M411 행성이 보였다. 수년만에 한번씩 찾아오는 밤 때문인지, 행성의 어두운 면엔 빛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 이제 몇시간만 있으면 착륙하겠군. "

 

 " 긴 여행이었죠. 당신 덕분에 지루하진 않았지만요. "

 

 그녀는 생긋 웃으며 마티니를 홀짝였다. 살짝 뒤돌아본 그녀의 웃음은 무척이나 해맑았다. 

 

 " 그러게. 당신을 어제야 처음 만난게 아쉽군. "

 

 그는 어깨를 들썩하며, 뒤돌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전망대의 사람들을 부산하게 움직이며 채비를 갖추려 객실로 돌어가고 있었다.

 "

 " 호텔을 잡을 수 있을까 모르겠어, 아무래도 늦게 도착한 거라.... "

 

 그의 혼잣말을 들었는지, 콧수염을 기른 바텐더가 다가와 얘기했다.

 

 " 걱정 마십시오! 저희 배의 홀리데이호텔 체인과 계약이 되어 있어서, 우선적으로 방을 배정하고 있습니다. "

 

" 그런가요? "

 

 " 그럼요, 5년에 한번 있는 대목인데 소홀히 할 리 없죠. 그리고 만약 방이 없다면, 원하시는 고객께는 여객선의 선실을 사용하시도록 임대해 드리기도 한답니다."

 

 그는 문득 생각난듯 질문했다.

 

 " 아.....그럼 승무원들은 '그 날' 어디에 있죠? "

 

 " 이 별 주민들을 포함해서, 등록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지하실에 내려가 있게 되지요. 그리고 혹시 밖에 있게 되더라도, '그 산'에 있지만 않는다면 별 문제는 없다고 하더군요."

 

 " 하긴, 그렇지 않다면 주민들로서는 위험한 일이겠지요..... "

 

 순간, 스피커를 통해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이제 곧 도착지인 시리우스 감마의 M411 행성, 일명 <고해의 별>에 도착하겠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객실로 돌아가셔서, 도착준비를 서둘러 주시기 바랍니다. "

 

 

 

 

 

 


8. 닷새 전 오후.

 

 

이제 나흘 뒤면, 저 여섯개의 태양은 정확히 일렬로 배치된다. 그것은 5년에 한번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그리고, 그 특별한 천문학적 이벤트는 5년마다 한번씩 황량한 이 별로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그는 안내 팜플렛의 그림을 가르키며 설명했다.

 

 " ....그러니까, 이렇게 여섯개의 태양이 일직선이 되면, 뭔가 강력한 전자기 장이 형성되면서 이 별의 한 지점으로 통해 에너지가 집중되는 것 같소. "

 

 " 그게 '그 산'이로군요? "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질문했다.

 

 " 그래요, 우리의 목적지, 바로 '그 산'이 바로 그 지점이죠! "

 

 " 왜 하필 거기일까요? "

 

 " 책에서는 그 산에 매장된 철광석이, 말하자면 전극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 같아요. 하지만 왜 그렇게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더군요. "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팜플렛을 들여다보았다. 

 

 " 설마, 자기 이름같은 것도 다 잊어버리게 되는 건 아니겠죠? "

 

 " 그렇지는 않다더군요. 대개 5년에서 10년 정도의 기억만을 상실하게 된답니다. 아무래도 개인차라는건 있겠지요."

 

 그녀는 커피잔을 들어 카푸치노의 거품을 한모금 마셨다. 하얀 거품이 입술에 묻은 모습이 귀여웠다.. 그녀는 여객선의 창을 통해 멀리 보이는 밝은 별을 바라보았다.

 

 " 어떤 걸까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건? "

 

 " 글쎄요..새로 태어나는 건 아니지 않을까요?. 오히려 몇년 전으로 돌아가는 것이겠죠.... "

 

 " 몇년 전으로 돌아간다..... "

 

 그녀는 침묵에 잠겨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런 그녀의 옆모습을 세밀히 관찰했다. 어차피 며칠 뒤면 모두 지워질 모습이겠지만, 하며 그는 피식 웃었다.

 

 

 

 

 

 

9.닷새전 오전

 

 

 

그는 천천히 빠의 의자에 앉았다. 젊은 바텐더가 그에게 다가왔다.

 

".....롱 아일랜드 아이스티."

 

그는 짧게 주문했다. 바텐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죄송합니다만 손님, 무엇이라고요?"

 

"롱 아일랜드 아이스티."

 

그는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했다.

 

"롱 ..아일랜드 아이스티...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바텐더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넓은 전망창이 있는 전망대 로비에는 사람들이 가득차 있었다. 오랜 여행에 지친 여객들은, 드디어 도착지가 가까와오자 저마다 들떠 로비로 모여든 것 같았다. 처음에는 대부분이 혼자 이 배에 탔었지만, 지금은 어느새 서로를 알게 되었는지 대부분 몇몇이 모여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손님. 그 음료는 레시피가 없는 것 같은데요. 너무 오래된 술이라.... 만드는 법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남자는 어차피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손을 내져었다.

 

"됐소. 그럼 대신..."

 

그는 빠에 놓인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그 때, 그의 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  보드카, 드라이진, 화이트 럼, 그리고 데킬라를 같은 양으로. "

 

그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그의 뒤엔 웨이브진 긴 머리에, 아이보리색 트렌치 코트를 입은 약간 키가 큰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가볍게 미소를 지어보이곤 옆에 앉았다.

 

" 그리고 레몬 쥬스와 콜라를 넣어요.."

 

그녀는 바텐더에게 얘기했다.

 

" 아, 예. 알겠습니다. 만들어 보지요"

 

바텐더는 잊지 않으려는 듯 재료들을 중얼거리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차분해 보이는 하얀 얼굴에 긴 속눈썹. 그가 좋아할 법한 스타일이었다.

 

"놀랍군요. 이 술을 아는 사람조차 흔치 않은데...?"

 

" 예전에 관심이 좀 있었죠.....저도 좋아해서 간혹 만들어 마시곤 했구요."

 

약간 의외의 표정이었지만, 그도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주방을 향해 외쳤다.

 

" 웨이터! 여기 같은걸로 한 잔 더 만들어 주게!"

 

 

 

 

 

 

10. 지금

 

 

 

".....?"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아직 자리에 앉은 채, 그녀의 팔을 잡고 있었다.

 

" 안 나갈거에요?"

 

그녀가 물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 ...내려가지 않겠소?"

 

그의 말에, 그녀는 흠칫 굳었다.

 

" 그냥.... 내려가자는 건가요? "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이 순간에 이런 말을 한다는 게 나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지만.. 뭔가.... 이대로 모든 걸 잊게 되면 안될 것만 같소. 이대로... 당신을 보낼 순 없어요."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당신과 보냈던 지난 며칠동안, 많은 생각을 했소. 난 내 기억을 가진 채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당신에게 털어놓고, 이해받으면서 다른 희망이 생겼소. 어쩌면 기억을 지우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말했다.

 

" ....무엇보다, 당신을, 당신이란 여자를 이대로 보낼 수 없소."

 

그녀는 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밋밋하고 광채가 없는 눈이었다. 그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양 팔을 붙들었다.

 

" 이런 말이 당황스러울 거요. 당신도 당신의 상처를 지우려고 온 거고, 나도 그렇소. 하지만, 단지 기억을 지운다고 행복해지는 것만은 아닐 거요... 어쩌면, 난 비겁한 생각을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소.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난 진심이요.... 만약 아픈 기억에서 벗어나는 것과 당신을 선택하라면, 난 당신을 택할거요.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을, 단지 우연으로 돌리고 영영 잊혀질 수는 없지 않겠소? "

 

그녀는 표정없이, 그에게 양팔을 잡혀 흔들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절박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그녀는 기운이 빠진 듯, 그의 팔에 몸을 의지하며 서 있었다.

 

" 정말인가요? "

 

그녀의 대답에, 그는 그녀의 팔을 꽉 잡고 대답했다.

 

" 물론이요! 지금처럼 확실한 느낌은 없었소... 난 당신을 잊고 싶지 않소!"

 

 말없이, 둘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깊이없이 밋밋했던 그녀의 눈빛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천천히, 눈물이 맺혔다. 그녀의 얼굴이, 어느새 잔잔한 떨림으로 흔들렸다.

 

" 그런데..왜,  그땐 날 떠났죠? "

 

".... ? "

 

 그는 순간 멈추었다.

 

" 날 잊고 싶지 않다면서.... 왜 나를 잊은 거죠? "

 

그녀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뺨을 타고 내려왔다.

 

" 당신은 5년전에 이미 날 한 번 버렸어요.  기억에서 벗어날 수 만 있다면, 나와의 모든 걸 잊어도 할 수 없다며 5년전에 이곳을 찾았었죠.... 모든 걸 잊기 위해."

 

그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져 갔다

 

 "그, 그게 무슨 소리지? 내가 당신을 알고 있다고? 내가 이곳에 온 적이 있다고? "

 

"...그래요. 난 이미 당신의 연인이였죠. 하지만 당신은 악몽으로 끊임없이 괴로워했고, 결국 모든걸 버리고 이곳으로 왔었어요. 내가 그토록 매달려도, 기억과 함께 모든걸 지워버리려 했죠."

 

그의 눈이 점점 커졌다.  머릿속에서 엉키는 생각을 찾아 더듬거리는 듯 했다. 한참만에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말도 안돼.. 난 기억을 지우지 않았소... 아직 악몽에 시달리고 있단.... "

 

" 이곳의 망각은 완벽하지 않아요. 당신은 운 나쁘게도, 군대에서의 사건 이후의 기억만을 상실한 거죠. 전역한 후 3년간...그리고 나와의 모든 기억을,.."

 

 그는 그녀를 잡은 팔을 풀었다. 그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 그럴리가.... 어떻게 그런...."

 

그녀는 천천히 뒷걸음 쳤다.

 

" 지난 5년간, 정말 지워버리고 싶도록 힘들었죠. 그래서 나도 이곳을 찾은 거에요. 하지만, 여기서 이렇게 당신을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리고 나도, 어쩌면 다시 당신과 함께 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요 며칠간, 나도 그런 희망을 품었었죠..."

 

그녀는 '산'의 정상으로 통하는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6개의 태양이, 한 점을 향해 모여들고 있었다. 밖은 이미 강렬한 빛으로 가득했다.

 

" 하지만 아니에요. 당신은 결국 견디지 못하겠죠... 그건 나도 마찬가지에요. 이젠 다, 모두 잊어버리고 싶어요. 당신도, 나도...그리고 무엇보다."

 

문이 열리자, 강한 빛살이 흘러들어왔다. 그는 눈이 부셔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녀의 모습이 빛 속에서, 실루엣처럼 보였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그 빛을 향해 걸어갔다.

 

" .....같은 사람에게서 두번 잊혀지고 싶진 않아요."

 

그녀는 문을 닫았다.

 

 

end

'SF'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희는 나의 외로움을 아니?  (0) 2020.05.05
우리가 쏜 화살은 어떻게 되었을까  (0) 2020.05.05
Simulation Saturated  (0) 2020.05.04
오멜라스를 떠났던 사람들  (0) 2020.05.04
튜링의 두 번째 테스트  (0) 2020.05.04

 

 

1



"그게 뭐야, 프랭크?"

커피잔을 들고 오던 마이클은 잔뜩 흥미로운 표정으로 뭔가에 열중하고 있는 프랭크에게 다가갔다. 그의 책상에 놓여있는 것은 격자무늬가 쳐진 나무판. 그리고 검고 흰 작은 돌맹이들이었다.

"이거 아주 재미있는 거야... "

"그러니까, 그게 뭐지? 마치 체스판 같은 걸?"

프랭크는 고개를 돌려 친구를 바라보았다.

"이건 말야, '바둑'이라고 부르는 동양의 게임이라구. "

"그래? 체스같은 건가?"

"흠...글쎄. 오히려 체스에 가까운 것은 '장기'라고 하는 게임이 있지. 바둑은 좀 달라."

"어떻게 다른건데?"

"체스나 동양의 장기는 결국 왕을 잡는 것이 목적이지. 그리고 그를 위해서 기사나 졸과같은 여러가지 다른 역할을 갖는 말들이 존재하잖아? 하지만 바둑은 그렇지 않아. 오직똑같은 검은색과 흰색 돌만을 가지고 하는 게임이야."

"그러면 체커와 비슷하지 않은가?"

"아냐아냐... 그 복잡성과 다채로움이 비교가 되지 않는다구. 일설에 의하면, 유사이래똑같은 바둑판이 재현된 적은 단 한번도 없다고 하는군."

"그래? 거 참 대단한걸!"

마이클은 들고온 커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소파에 앉았다.

프랭크는 자신의 커피잔을 들어 한모금 마시고는 얘기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 바둑이란 게임의 룰이야. "

"룰?"

"그래, 룰. 바둑은 총 9개의 규칙만 알면 되는데, 그 규칙이 참 놀랍다구."

"그래? 어떤 룰인데? "

"첫째, 둘이서 한다."

마이클은 자칫 커피를 바닥에 흘릴 뻔 했다.

"이런! 그게 룰이란 말야? 너무 당연한 거 아닌가? "

"둘째, 교대로 번갈아서 한다."

"하하...정말 원론적이로군. "

"세째, 돌은 줄과 줄의 교차점에 둔다."

"그건 무슨 말이지? "

프랭크는 돌을 하나 집어들며 설명했다.

"보라구. 체스의 경우 말은 8곱하기 8, 즉 64개의 칸위에 올려 놓잖아? 하지만 바둑은 달라. 가로 세로 19개의 줄이 있고, 이 줄들이 서로 교차해서 361개의 교차점을 만들지. 그리고 바둑돌은 그 교차점위에만 놓을 수 있어."

"그래? 그점은 체스와 정말 다르군. 체스는 칸에 놓는 것인데."

"바둑뿐만 아니야. 아까 말한 동양의 체스인 장기 역시 교차점에 놓는다구."

"동서양의 차이인 걸까?"

"그럴지도 모르지. "

"그래, 네번째 규칙은?"

"네번째는 목적에 관한 거야. '집을 많이 만든자가 이긴다'."

"집?"

"그래. 자신의 돌로 특정 영역을 둘러싸면 자기집이 되는 거지. 결국 바둑은 바둑판이라는 영역을 누가 많이 차지하느냐 하는 게임이니까."

"그렇군. 생각보다 목적은 단순한걸."

"그렇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천년간 동양최고의 게임으로 군림해 왔으니까, 단순함에서 기인할 수 있는 복잡성이란게 참 놀랍지 않아?"

"단순함에서 기인하는 복잡성이라.... 그거 마치 카오스 이론처럼 들리는데? "

"하하, 그런가?.. 그리고 남의 돌로 둘러쌓인 돌은 따낸다. 이게 다섯번째 룰이지.....이렇게."

프랭크는 검은 돌 하나를 흰돌 네개로 둘러싸서 따내며 설명했다.

"이제야 룰 다운 룰이 하나 나왔는걸... 그럼 이렇게 따먹힌 곳엔 다시 놓을 수 없는건가?"

"그게 바로 여섯번째 룰이야. 그런 곳엔 놓을 수 없다는 것."

" 아하~ 그렇군."

"그리고.. '패'라는 특별한 상황, 실력차이가 많이 날 때 패널티를 주는 법... 뭐 이런 것들에 대한 규칙이 남아있고, 사실상 정말 중요한 규칙은 이 두어가지일 뿐이라구."

" 그러게 말야. 이런 단순한 게임이 수천년간 동양최고의 게임이었다니, 믿어지지 않는걸? "

"체스는 이미 컴퓨터가 사람을 이길 수 있잖아. 하지만 바둑은 아직 어림도 없다는 거야. 컴퓨터로서는 도저히 따라할 수 없는 복잡성이 있는 거지."

"그렇군. 자네가 매료될만한 게임인가 보지. 그래, 그래서 요즘 바둑에 심취해 있는 건가?"

프랭크는 의자 깊숙히 몸을 묻으며 다시 커피를 들이켰다. 

"아니... 같이 할 만한 상대가 없어서. 것보다는 게임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

"게임 자체라니?"

"바둑에는 많은 흥미로운 점이 있거든... 예를 들어보자면 이런 거야. 아까도 얘기했듯이, 바둑은 말을 점에 두고, 체스는 말을 칸에 두지않나?"

"그렇지."

"그런점에서 뭐랄까, 서양과 동양의 사상적인 차이가 드러나는거 같지 않아? "

"사상적인 차이? "

"그래. 대상을 파악하는 틀에 관한 거지. 우리는 이렇게 하나의 주어진 칸, 다시 말해 객체가 점유한 공간을 주체로 보는데 비해, 동양인들은 객체와 객체사이의 틈을 주체로 보고 있단 말야."

"객체 사이의 틈이라...."

"전통적으로 우리의 합리사상의 핵심이 되는 뉴턴 역학의 기본은, 공간과 그 공간을 점유하는 물체로 이루어져 있단 말이지. 그리고 주체는 바로 그 물체들이고 말야. 그런데 이 동양의 게임이 상징하는 것은 오히려 그 간격에 주목하고 있다는 거지. 이건 분명히 처음 게임을 만들었던 고대인들의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반영되어 있음이 분명해."

"글쎄.... 재미있는 생각이긴 한데. 좀 비약적이지 않은가?"

"이봐 마이클. 요즘 내가 중국의 문자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정말 놀랍다구. 자, 이 문자를 봐봐."

프랭크는 책상서랍을 열고는 한자가 두 글자 적혀있는 종이를 꺼내었다.

"이, 이게 무슨 뜻이지?"

"이건 중국문자로 사람, human을 뜻하는 거야. "

"그렇군... 꽤 근사한데."

"첫번째 글자는 이미 그 자체만으로 사람을 뜻해. 걸어가는 사람의 모양을 흉내낸 거지. 그리고 이 두번째 글자는 공간, space를 뜻하는 거야. "

"그래? 그런데 두번째 글자는 왜 필요한 거지?"

" 그게 중국인들의 놀라운 세계관이라는 거야. 첫번째 글자만으로도 물론 사람을 표현할 수 있지만, 두번째 글자까지 포함되어 두 개의 뜻이 모여야 비로소 진정한 인간을 나타낼 수 있다구. 즉 사람과 공간 - 다시말해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가 규정되어질때만이 정말 인간일 수 있다고 본거야."

" 호오... "

" 사실 혼자 존재하는 사람을 진정한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 사람이란 사회와 끊임없이 교류하고 복잡하게 반응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마치 어릴때 늑대들과 성장한 소년의 경우에는, 그는 분명히 유전자는 사람의 것이지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결여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어."

"하긴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란 말도 있으니까."

"결국 어쩌면 인간이란 특징을 규정짓는 중요한 핵심은, 사람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일지도 몰라. 이런 걸 봤을때도 아까 바둑 얘기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지. 주체를 대상 자체보다는 대상간의 공간, 즉 관계로 해석하는 방식 말이야."

"글쎄.. 제법 그럴 듯 하긴 한 거 같아. 요즘 현대과학의 발전이 오히려 선이나 도와 같은 동양의 고대 사상을 설명하려 하고 있잖아. 그런 걸 보면 이러한 시각도 어쩌면 앞으로 주목받게 될 새로운 파라다임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나?"

" 바로 그런거야!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사고체계에 너무나도 깊이 뿌리박혀 있는 <가시적인 대상>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온 것일지도 모른다구."

마이클은 커피잔을 프랭크를 향해 들어보였다.

"....자네와 내가 아니라. "

"자네와 나 사이의 하나의 관계로 말이지."





연방수사국의 빌은 한 뭉터기의 서류철에서 고개를 들었다. 

" 젠장! 결국 그랬군! "

빌의 화난 목소리에 놀란 옆자리의 메리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죠, 빌? "

"똑같아... 도대체 이런 자가 몇 명이나 있는 거지? "

".... 무슨 일인데요, 빌?"

메리는 안경을 콧등위로 올리며 빌의 책상쪽으로 몸을 돌렸다.

"요즘 내가 수사하고 있던 젝슨사의 횡령건 말야. 조나단이란 명의로 되어 있던거, 계속 그 자를 추적하고 있었잖아?"

"그랬었죠. 찾아냈나요?"

빌은 어깨를 으쓱, 해보이며 대답했다.

"아니~ 찾아내기는 커녕, 놓쳐버렸어. 영원히."

"영원히? 죽기라도 했다는 건가요?"

"죽기는. 도대체 살아있기라도 했어야 죽을 수 있는 거 아니겠어?"

"그게 무슨 소리에요?"

" 가공인물이야. 조나단이란 자는 서류상으로만 존재한다는 말이지."

" 유령계좌라는 건가요? "

" 계좌뿐만이 아니야. 이자는 사회보장번호, 라이센스번호, 학적기록, 심지어는 군번까지 가지고 있다구!"

" 그럴리가! "

" 정말이야. 서류상으로는 완벽해. 게다가 전산정보와 사이버상의 기록으로는 실존하는 인간 이상이지. 수년간의 거래내역과 금융활동기록까지 남겨져 있어.

그리고 세상에나! 의료보험사용 내역까지 있군 그래! 가공인물이 아프기까지 했단 말인가! "

" 정말 그렇다면 좀 이상한걸요, 빌. 어쩌면 실재하는 사람인데 당신이 착각한건 아닌가요?"

" 그럴리는 없어. 아무도 이 조나단이란 자를 만나봤다는 사람은 없다구."

" 아무도 못 봤다고 존재하지 않는건 아니잖아요. 숨어지내는 사람일 수도 있고...사진도 없나요, 혹시?"

"사진이야 있지. 하지만 이런것쯤이야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 거니까. "

메리는 빌의 책상에서 조나단의 서류철을 집어들어 찬찬히 살펴보았다.

" 흠... 정말 완벽한 걸요. 누가 봐도 실존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하겠는데...."

"그렇지? 참 대단하지 않아? 그러니 이 자를 어떻게 체포하란 거야? "

" 서류상으로만 존재한다면..... 그럼 서류상으로 체포했다고 하고 복역기록을 넣으면 되겠군요. "

" 뭐? 지금 농담하는 거야? "

메리는 서류철을 다시 빌의 책상에 내려 놓으며 말했다.

" 물론 농담이죠, 빌. 하지만.... 생각해봐요. 서류상의 기록만이 사실인 인간이라면. 서류상의 체포 역시 충분한게 아닐까요? "

" 뭐, 그럴수도 있겠지만, 누군가 분명히 배후가 있을 거 아냐? "

" 그렇겠죠. 결국 추적해야하는 건 그 배후겠죠. 하지만 조나단이 가공인물이란 걸 안 이상, 우리는 얼마든지 이 자를 가공으로 체포할 수 있는 거고, 그렇게 함으로써 배후인물이 더이상 조나단이라는 인격을 사용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 아닌가요?"

" 흠....글쎄. 다른 기관들의 협조를 얻어야 겠지만, 가능한 일이겠지. 적어도 조나단이 더 이상 활개치고 다니는 것을 법적으로는 막을 수 있을 테니까."

" 금융거래도 정지되고, 출국도 못할테고."

" 의료서비스, 신용카드도 중지될테지."

빌은 다시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 이거 봐, 메리. 우리는 있지도 않은 사람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마치 누군가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같군."

" 그러게 말이에요. 오늘날에는 이런 정보들과 숫자들이면 충분히 한 사람의 존재를 만들어낼 수도 있으니까요."

" 물론이야. 언제든지 정부와 금융계, 그리고 몇몇 기관들이 맘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한 사람에 대한 완벽한 기록을 만들어 낼 수 있다구."

" 마치 이 조나단처럼."

" ...반대의 경우도 있을까? 그러니까....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기의 사회보장번호, 신분증, 의료기록 등 모든 공식적인 기록들을 잃게 되었다면, 그는 존재하는 걸까?

그의 출생기록도, 성장과정도 사라지고, 그러니까 실종신고도, 사망신고도 없다면.... 뭐, 물론 사람이야 존재하겠지만... 오늘날과 같은 사회에서, 에.... '행정적으로'는 사라졌다고 볼 수 있는게 아닐까? "

" 듣고 보니 그렇네요... 만약 서류상으로 한 사람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서류상으로 한 사람을 소멸시키는 것도 가능한 거겠죠."

" 예를 들어 법인이란 것도 있잖아. - 주식회사 같은 거. 그런 법인은 실체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서류상으로만 존재하지. 하지만 법인은 마치 사람처럼 계좌도 개설하고, 세금도 내고, 소송에 제기되기도 하고....법적으로는 인간처럼 대우한단 말이지. "

" 만약, 어떤 사람이 실체는 없지만, 행정적으로는 존재하고, 정상적으로 모든 사회기관과 활동을 유지하고 있다면.... "

" ....그렇다면, 그가 존재하는가 아닌가 하는 물음은 무의미해질지도 모르지."

" 적어도 신용카드회사에서는 존재한다고 말할걸요."

" 백화점에서도. "

빌은 묘한 기분이 온몸에 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지금껏 생각해왔던 인간의 존재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묘한 낯설음이었다.

" 봐... 사람은 이 사회에서 살면서 많은 공공기관이나 기업, 혹은 다른 사람과의 연결을 가지면서 살아가잖아? ..마치 하나의 전신주에서 수많은 다른 전신주들로 전선으로 연결되어 있듯이 말야. 마치 가시가 잔뜩 뻗어있는 성게처럼."

" 그런데요? "

" 그런데 뭐랄까.... 정작 그 전신주를 뽑아버려도, 그 전선들만 남아 있으면 아무런 문제 없이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단 말야. 그러니까.... 사람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 다른 기관과의 관계가 어쩌면 그 사람의 존재를 규정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져."

" 그렇지요. 다른 전신주들로써는, 그 전신주가 아직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겠죠."

빌은 천천히 고개를 갸우뚱했다.

" 만약에 말이야... 모든 전신주가 다 없다면 어떻게 될까...그러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존재하지 않고, 행정적인 관계들만 존재하는 거야. 그리고 자동화된 시스템에 의해서 모든 법적인, 행정적인 사안들이 운영되는 거지."

" 오, 빌. 그건 너무 무서운 생각인걸요!"

" 만약 그러고도 시스템이 잘 돌아갈 수 있다면.... 도대체 인간이란 뭐지?"

" 그만해요, 빌. 너무 이상한 생각을 하는군요. 당신은 우선 조나단의 배후를 찾아야 하지 않겠어요? "

" 참, 그렇지.... 그래, 너무 생각이 새어버린 거 같군. "

" 커피라도 한잔 하면서 잠시 쉬는게 어때요?"

" 그럴까? "

빌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나 메리와 함께 휴게실로 향했다.





"모든 건 끝났네, 케네스."

침통한 목소리로, 칼 박사는 화상전화로 비치는 동료 케네스에게 말했다.

" <그들>에게 접촉할 수단조차 없는건가? "

" <그들>은 우리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아.... 인류에게 남은 건 종말뿐이네."

" 상부에서는 뭐라고 하던가?"

" 상부에서의 반응도 비슷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개념이란 거지. 상부에서도 나름대로 방법을 찾고는 있겠지만.... 아마 곧 현실을 받아들이게 될 걸세."

"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그래! 수천년간 지구의 지배자라고 생각해 온 인류가,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배경에 불과했다니 말일세."

스크린속의 케네스는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 아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라. 그건 거대한 진화의 한 흐름일세. 우리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방심했던 것이지."

" 알고 있었다니, <그들>이 방문할 것을 말인가? "

" 아니.....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 말일세. 호모 사피엔스는 단지 도구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사실 20세기부터 알 수 있었던 사실일세."

" 그게 무슨 소린가? "

칼은 천천히 서랍에서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 자네, <이기적인 유전자>라는 개념을 알고 있겠지? "

" 그야 물론이지. 사실은 우리 세포속의 유전자가 생명의 주인공이고, 표현형인 우리는 그 유전자를 보호하고 전파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이론 아닌가? "

" 그렇지... 말하자면, '닭은 또 하나의 달걀을 만들기 위한 달걀 자신의 수단에 불과 하다'라는 격언으로 표현되기도 하지. 즉, 우리가 볼 수 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사실상

그 속에 숨겨진 유전자들을 위한 '생존기계'에 지나지 않는 거야. "

" 한때 그 이론 때문에 나도 많이 인생에 회의를 품었었다네. "

칼은 천천히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주체가 유전자라는 건 아니네. 우리는 애초에 유전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졌지만, 우리의 정신과 이성은 그러한 태생적 속박에서 벗어나서 유전자의 의도가 아닌, 우리 자신의 의지에 의해 문명을 건설해 온 것이 아니겠나. "

" 그렇지..... 물론 '본능'이란게 남아있긴 하지만, 인간은 유전자의 명령으로부터 많이 자유로와진 유일한 종족이니까. "

" 인류는 그런 식으로 우리가 스스로 유전자를 소외시켜왔다고 생각해 왔다네. 물론 생명의 근본단위가 유전자인것은 확실하겠지만, 그리고 우리는 그 유전자로부터 비롯되었지만, 우리 인류는 그 단순한 DNA분자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능력을 발달시켜 왔고, 결국 지구의 지배자가 된 것이잖는가..."

" 사실 유전자는 아무 생각없는 고분자에 불과하니까....."

" ....바로 그와 같은 일이 우리에게 벌어진 거라네."

화면속의 케네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 그게 무슨 뜻이지? "

"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보게나. <그들>은 태양계의 붕괴로부터 지구인을 구하기 위해 지구에 왔지만, 정작 우리 인류를 지구인으로 인정하지는 않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인정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낸 네트워크, 시스템, 보이지도 않는 상호관계들이란 말이야! .... 그들이 보호해야 할 대상이라고 여겨지는 건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기반으로 해서 이루어진 <추상>들 뿐이라고!..... 그들은 '나'를 원치 않아. 그들이 인정하는 건 나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관계들, 나를 포함한 사회의 네트워크, 그리고 그 연결들간의 상호방식일 뿐일세.... 우리가 없으면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문명의 부산물들을 그들은 지구인으로 받아들이고 있단 말이야. "

" ........."

" 마치 유전자들에게 우리가 한 짓과 똑같지 않은가? 유전자들도 인간따위는 자신들이 없으면 존재하지도 못하는, 단순한 도구라고 여기겠지만.....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지금 인류의 기술은 단 하나의 세포도 사용하지 않고도 지능을 구현할 수도 있네. 

우리는 더이상 유전자를 필요로 하지 않아. 우리가 유전자를 완전히 따돌려 버린 거지. 

-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일어난 일도 똑같은 거야. 우리의 문명이, 우리의 사회구조,인간들로 이루어진 복잡한 네트워크가 스스로 지능을 얻고 정체성을 찾아내어 결국 우리를 따돌려 버린 거라네. - 이제 그들에게 인류는 필요 없는 거야. 언제부턴가 우리의 네트워크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지구의 대표자가 되어 버린거라네."

" 정말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야....."

" 이미 '그들'은 <우리사이에 존재하는 지구인>들과 협상을 다 끝냈다는군..."

" 하하.. 그렇지. 우리사이에 존재하는 지구인 - 그러고 보니 지금도 같이 있군 그래.."

칼은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 마치 기억이, 정보가 뇌세포 하나하나에 저장되는 게 아니라 그 연결패턴에 저장되는 것처럼..... 이 전지구적 지능에 있어서 우리들 하나하나는 중요한게 아닌 거라네. 오직 우리들 사이의 연결 패턴만이 중요한 거지. - 그리고 '그들'은 영리하게도, 그 패턴만을 추출해 갈 생각을 한 거지...."

" 우리는 버려두고 말이지. "

" 우리가 죽은 사람의 뇌로부터 기억을 추출해 컴퓨터에 담는 것과 똑같다네. 연결 패턴이 추출된 뇌는 더이상 필요하지 않으니까... 뇌는 버려지는 거지."

케네스는 할 말을 잃었다. 

칼 박사는 두번째 담배에 불을 붙히고는,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 정말 믿어지지가 않아.... 사람들의 관계가... 지능을 형성할 수 있다니..."

" 유전자들도 그랬겠지, 케네스. "

" ....우리에게 남은건 기다림 뿐이로군, 칼? "

" 그렇지. 하지만 너무 절망하지 말게. 이건 새로운 형태로의 진화이니까."

" 우리가 없어지는데도 그게 의미가 있을까? "

" 세포가 죽는다고 생명이 사라지진 않지. - 마치 체스판과 비슷한 거라네. 우리가 선을 그음으로써 비로소 칸이 생기지만, 일단 칸에 시선을 돌리는 순간 선들은 사라지고 마는

거지. 다시 선으로 눈을 돌리면 칸은 사라지듯이. 이건 칸과 선의 문제와 같은 거라네. 칸이 있어서 선이 있고, 선이 있어서 칸이 있을 수 있는 거야. 다만 그 바라보는 시선이,

한때는 칸에 있었다가 선으로 옮겨졌고, 이제 다시 칸으로 옮겨지는 것 뿐인걸세...."

" 그런 걸까..... 선과 칸은 그대로일 뿐인데 말야."

" 그런 거야, 케네스. 변하는 건 없다구. "

" 그래....하지만 어째 좀 서글프군. "

" 이야기의 나머지부분에 참여하지 못하는 서글픔이겠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네."

" 그렇군....."

케네스의 화면에서 뭔가 소리가 들리더니, 케네스는 고개를 잠시 돌렸다.

" 이런. 애들이 날 찾는구먼."

" 가보게, 케네스. 마지막까지 평안하기를."

" 그래, 칼. 자네도. "

" 그래. "

잠시 침묵이 흘렀다.

" 이보게 칼. 우리는 사라지더라도..... 자네와 나의 '관계'는 보존되는 거겠지? "

" ....그렇지. '그들'이 가져갈테니까."

" 나와 내 가족들과의 관계도....'

" 물론이야. "

" 묘하군. 우리는 사라지고 관계만 남는다...."

" 사라지지 않는다구. 체스의 흰칸만 제외하고 검은칸을 그릴수 없듯이."

" ....그래. "


케네스의 얼굴이 화면에서 사라졌다.



End

'SF'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가 쏜 화살은 어떻게 되었을까  (0) 2020.05.05
고해(告解)의 별  (0) 2020.05.05
Simulation Saturated  (0) 2020.05.04
오멜라스를 떠났던 사람들  (0) 2020.05.04
튜링의 두 번째 테스트  (0) 2020.05.0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