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기정, 2002

 

 

 

 

I shot an arrow into the air


화살 하나 공중에 쏘았네


It fell to earth, I knew not where;


땅에 떨어졌으련만, 어딘지 알 수 없어라


For, so swiftly it flew, the sight


너무도 빨리 날아, 날아가는 화살을


Could not follow it in its flight.


눈으로 좇아갈 수 없었네 

 


I breathed a song into the air


노래 하나 공중에 띄워보냈네


It fell to earth, I knew not where;


땅에 떨어졌으련만, 어딘지 알 수 없어라

 


For who has sight so keen and strong,


어느 눈이 그처럼 날카롭고 강하여


That it can follow the flight of song?


날아가는 노래를 좇아갈 수 있으랴 

 


Long, long afterward, in an oak


오랜 뒷날 한 참나무에


I found the arrow, still unbroke;


아직도 성하게 박혀 있는 화살을 보았네

 


And the song, from beginning to end,


노래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I found again in the heart of a friend.


벗의 마음 한 가운데 그대로 남아 있었네. 

 

 


The Arrow and the Song - Henry Wadsworth Longfellow


화살과 노래 - H.W.롱펠로우 
 

 

1

 

자신의 이야기를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그건 무척 어려운 문제이다. 특히나 그것이 오래전에 일어났던 일이라면, 그래서 이제서야 그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사람들은 한 때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의 의미를 그 순간에는 깨닫지 못하고, 또한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훗날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역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와의 만남 역시 나에게는 마찬가지였다. 

당시, 내가 아직 젊고 이름 없는 작가이던 시절, 그 때는 정말이지 모든 것이 절망적이었다. 나에게는 가족도, 직장도, 돈도 없었으며 계속되는 가난과 무관심 속에 지쳐 작가의 길을 접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하던 때였다. 아니, 그 어떤 고민도 내게는 사치로 느껴질만큼 힘들고 절망적인 시절이었다. 

가랑비가 내리던 10월의 초순이었다. 그때는 런던 외곽의 작고 허름한 4층의 하숙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미 몇 달째 밀린 하숙비 때문에 그나마도 쫓겨 나고 말았다. 쌀쌀해져가는 가을의 거리로 나선 나에게 가진 것이라고는 달랑 외투 한벌과, 펜과 잡동사니가 약간 들어있는 낡은 가방이 전부였다. 

규칙적인 무늬를 반복하는 포석이 깔린 우울한 거리를 하염없이 걸으면서,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나에겐 아무런 생각을 할 여력조차 없었다. 어디로 간단 말인가. 내가 지금까지 해 온 것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의 재능과 노력이란 건 결국 이런 것이란 말인가. 

....죽어버릴까. 

어차피 하루를 더 버틸 방세도, 한 끼를 더 먹을 돈도 없었다. 글쓰기에 대한 더 이상의 흥미도, 의욕도 없었다. 도대체 왜 이 세상을 살고 있을까, 지금 어디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걸까. 

그저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는지, 아니면 어떤 운명적인 계시가 나를 이끈 것인지는 모른다. 낡은 외투깃사이에 떨구었던 고개를 들어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나는 어느새 외곽의 오래된 공동묘지앞에 와 있었다. 그곳은 무척이나 적절한 위치라는 생각이 들었고, 무언가에 이끌리듯 녹이 슨 철장문을 밀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고, 어차피 빗방울을 피해야 할 곳이 필요한 것 아닌가. 이 곳이라면 아무도 찾지 않을 것이고,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가난한 작가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휴식처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만약, 혹시 잠들 듯 죽게 된다면, 그 역시 이곳처럼 적절한 곳은 또 없을 것일 테니. 

납골당의 벽은 누렇게 말라가는 담쟁이 덩굴로 뒤덮혀 있었지만, 무척이나 평화 로와 보였다. 하지만 들어가는 입구의 철문은 굵은 자물쇠로 잠겨있었기에, 나는 그 문에 기대어 지친 몸을 쉬게 했다. 세상은 이대로 끝나버릴 것만 같았다. 망자들의 오래된 휴식처에 깃든 고요와 평화로움이, 가을밤의 어둠과 함께 나를 잠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스르륵,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가 나타났다. 

얼마나 잤을까, 처음엔 아직 꿈을 꾸고 있다고 여겼다. 불현듯 뜬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어느새 맑게 갠 밤하늘에 환히 빛나고 있는 달이었다. 그리고 달빛에 비친 납골당의 굳게 잠긴 철문에서, 왠 사람의 그림자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몇 초간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화들짝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순간 온 몸에 쭈뼛한 소름이 돋았다. 

- 유령인가. 

순식간에 입안이 바짝 타들어가고, 식은땀이 흘렀지만 몸은 꼼짝할 수가 없었다. 검은 그림자는 천천히 납골당을 빠져나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나와의 거리가 지척으로 가까워지자, 푸른 달빛에 그의 모습이 비추어졌다. 40대 중반 쯤의 남자 - 프록코트에 중절모를 쓴, 콧수염을 기른 남자였다. 온몸에서 힘이 빠짐을 느꼈다. 

“ 당신 여기서 뭐하는 거요? “ 

남자가 말했다. 

후아. 그제서야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유령이 아니로구나. 

“ 당신이야말로 무슨 짓입니까?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 

남자는 성큼성큼 걸어와 내 앞에 섰다. 그러더니 나를 훑어보았다. 

“ 이런 곳에서 잠을 자고 있었던 거요? “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 갈곳이 없다보니 그리 됐습니다. 이곳 관리인이신가요? “ 

“ 관리인? “ 

남자는 갸우뚱하더니, 잠시 생각하는 듯 했다. 

“ 아니오, 관리인은. “ 

큼직한 체구에, 목소리가 낮고 매력적이다. 코트와 모자도 잘 어울렸고. 
직감적으로,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 그런데 여기서 무얼 하시는 겁니까? 전 유령이라도 나타난 줄 알고 어찌나 놀랐던지..." 

날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 유령 맞소.” 

- 뭐? 

“ 농담하지 마시구요. 정말 놀랐단 말입니다....! “ 

“ 농담이 아니오. 정말 유령이라니까. 믿기 어렵겠지만 난 지난 주에 죽은 사람이오.“ 

....이런 실없는 사람이 있나. 무슨 유령이 프록코트에 중절모를 쓰고 나타난다는 거지? 게다가 이런 신사적인 유령이 있다는 얘기는 도무지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필경 나를 가지고 놀리려는 것이 분명했다. 

“ 사람을 바보취급하시는군요. 제가 그런 말을 믿을 것 같나요? “ 

그는 잠시 바라보더니, 한숨을 한 번 쉬고는 말했다. 

“ 그럼 당신 이런 거 할 수 있소? “ 

그는 손을 들어 납골당 벽을 향해 내밀었다. 그의 손은 그대로 벽을 통과하여 안으로 쑥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곤 팔을 몇번 앞뒤로 움직이더니 다시 뺐다. 그러자 벽으로부터 다시 손이 쑤욱 빠져나왔다. 잠시 얼어붙어 있던 나는 황급히 납골당 벽을 만져보았다. 단단한 벽, 의심의 여지없이 회반죽으로 덮힌 벽이었다. 한가지 생각만이 온통 머릿속에 꽉 차 버렸다. 

....정말 유령이구나. 

너무나 놀라서일까, 잠시동안,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유령이구나. 정말 유령이구나.... 그는 그런 나를 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하나도 무섭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안도감이 드는 건 왜일까. 적어도 그와 같은 유령이라면 신사적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을까.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말을 했던 것은 꽤 시간이 지난 뒤였다. 

“ 좋습니다, 좋아요! 당신이 유령이라고 치죠. 그런데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죠, 미스터...?“ 

“ 할리벗, 다니엘 G 할리벗이오.” 

그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였다. 행여나 나의 손이 허공을 움켜쥐지나 않을까 걱정하였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손은 크고 차가왔으며, 힘이 있었다. 

“ 전 존 싱클레어입니다. 그냥 존이라고 부르세요. “ 

“ 그러지요. ...내가 여기서 뭘 하느냐고 물었소? 글쎄, 유령이 묘지에 나타난다는 건 당연한 것 아니겠소? “ 

“ 하지만.... 사람이 죽으면 천국이든 어디든 가야 하는게 아닌가요? 왜 유령이 되어 남아있는 거죠?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런 건가요? 다른 유령들은 다 어디있죠? “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소. 나 외에 다른 유령들을 본 적도 없고. 나도 왜 내가 이 곳에 있는 지 알 수가 없다오.” 

“대체 어떻게 된 건가요? 죽고 나니 영혼이 몸을 스르르, 빠져 나와 유령이 된 건가요? “ 

“ 그런건 아니오. 나는 지난 주에 죽었고, 눈을 떠보니 여기였소. 글쎄, 내가 죽었다는 것은 확신이 들었지. 그리고 내 몸이 이런 재간을 부리는 걸 보면 유령인 건 틀림없는 것 같고.... 하지만 나도 왜 내가 어디론가 가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돌고 있는지는 모르겠다오. 아무에게도 물어볼 사람은 없더군. “ 

점점 이 신사적인 유령에게 호기심이 느껴졌다. 

“ 그것 참 희안한 일이군요, 할리벗씨. 그런데, 어떻게 죽은 건가요? 병으로? “ 

“ 아니, 심장마비였던 것 같소. 내가 원래 고혈압이 좀 있었는데, 파티에서 좀 과음하고 말았지 뭐요. 간신히 집까지 와서 침대에 쓰러졌는데, 그게 그만 마지막이 된 거요.” 

“그랬군요..... 지난주라면....” 

“ 지난주 화요일. 벌써 열흘째 이러고 있다오. 밤만 되면 돌아다니는 게....“ 

순간, 무언가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 잠깐만요, 할리벗? 다니엘 할리벗이라구요? 그 유명한 작가인 할리벗?! “ 

“ 글쎄, 유명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작가였던 것은 사실이오. “ 

“ 맙소사....! <줄리안의 회상 >을 썼던 그 할리벗인가요? 맞아.... 그가 얼마 전에 죽었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 내가 쓴 것 맞소. 알아주니 고맙구려.” 


세상에. 

당시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중 하나였던 그를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나 같은 무명작가로서는 도저히 꿈도 꿀 수 없었던, 그런 동경의 대상을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그의 강한 문체와 강렬한 메시지에 감동하며, 꼭 한번 만나보고 싶어하던 그를 죽은 다음에야 만나게 되다니. 

한동안 할말을 잃은채 멍하니 서있었다. 

“ 괜찮소? 낯빛이 안 좋은 거 같은데….” 

“ 괘, 괜찮습니다. 당신을 이렇게 뵙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군요. 당신은 제가 존경하는 작가 중의 하나였지요….. 이런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저도 작가랍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3류 작가지만요. “ 

“ 저런! 댁도 작가시오? 그래, 어떤 작품들을 쓰셨소? “ 

“ 장편인 <어느 카바레 가수의 사랑>과, 작년엔 희곡인 <젊은 로체스터의 죽음 >을 썼지요! “ 

“ … 희곡을? 그래, 어느 극장에서 초연을 했었소?“ 

“ … 아직 공연된 적은 없었습니다. “ 

그는 약간 무안한지, 험험, 헛기침을 했다. 부끄러움과, 대가를 만나 이야기한다는 설레임이 뒤섞여 묘한 감정을 만들었다. 잠시 뒤 그가 입을 열었다. 

“ 당신 이야기를 해 보구려, 존. 어쩌다가 여기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거요? “ 

그의 말에, 난 내 사정에 대해서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3류 작가라는 것, 아무것도 가진 것도 없고 가족도 없으며, 하숙집에서마저 쫓겨나와 죽을 작정으로 이 곳을 찾았다는 것. 당장 빵 하나를 살 돈도 없어 하루종일 굶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하고 나자 이상하리만치 속이 후련해졌다. 이야기를 다 듣더니 할리벗은 안타깝게 느낀 모양이었다. 

“ 안된 일이오, 젊은 친구가 그런 일로 좌절하다니! 그렇게 쉽게 인생을 포기하면 안되지! 나도 한때 그토록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오….. 사흘동안 빵 한조각으로 연명한 적도 있었고, 전쟁 때는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맨 적도 있었지만, 꿋꿋하게 버텨냈다오. 젊을 때 겪은 인생의 고난들이 창작의 밑거름이 된다는 걸 왜 모르는 거요? “ 

“ 당신도 그런 시절이 있었군요….. 말씀을 듣고 보니 제가 나약하고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맞아요. 버텨내야죠….. 하지만 당장 먹고 살일이 막막하니…..” 

그는 주섬주섬 코트 주머니를 뒤지더니, 반짝이는 동전을 꺼내어 내게 주었다. 1실링짜리 은화였다. 

“ 이걸 받으시게. 이 돈이면 며칠 버틸 수 있을 거요. “ 

“ 이런, 동정을 받으려는 건 아닙니다.” 

“ 받아 두시오. 어차피 내겐 필요 없는 걸….. 대신 부탁을 하나 해도 되겠소? “ 

“ 어떤…? “ 

“ 괜찮다면, 내일 밤에도 찾아와 주겠소? 무척이나 답답했는데, 얘기할 상대가 있으니 훨씬 낫구먼. “ 

“ 내일 밤이요? 여기서 말입니까? “ 

“ 그래요, 내일 밤. 와 준다면 방을 빌릴 수 있게 도와 드리리다.” 

…..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잠시 망설였다. 어차피 내겐 별다른 계획도 없지 않은가! 잠시 침묵이 흐르자, 그가 입을 열었다. 

“ 나는 이제 갈 시간이 된 것 같소. 내일 마저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 

“ 가다니? 어디로요? 어디로 간다는 말씀이죠? “ 

“ 내가 원래 왔던 곳으로. 내게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거든…. ” 

말을 마치더니 , 스르륵 몸을 돌려 납골당을 향했다. 그리고 그의 모습은 처음 나왔을 때처럼, 미끄러지듯 철문을 통과하여 안으로 사라졌다. 황급히 철문을 붙잡아 보았지만, 어느새 그는 사라지고 철문에는 차가운 감촉만이 남을 뿐이었다. 


…..멀리서 새벽을 알리는 첫닭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떴을때는 이미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눈부신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며 눈을 간지럽혔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묘지에는 산새 몇 마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쪼르륵, 다람쥐 한마리가 오래된 떡갈나무의 가지위를 가로질러 달아났다. 

‘ 꿈을 꾸었던 건가…… ‘ 

몸을 일으키며, 어젯밤 있었던 일을 회상하곤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재밌는 꿈이군. 유령이라니…… 그것도 중절모를 쓴. 

호젓한 가을의 묘지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득, 내가 어제의 절망적인 기분 으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깨달았다. 배고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세상은 평화로왔으며, 어쩌면 그렇게 절망적인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벌떡 일어나서, 천천히 주변을 걷기 시작하였다. 인적이 없는 적막한 침묵이,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찾아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납골당에 안치된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놓은 묘비들이 서있는 곳까지 걸었다.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넣은 나는, 뭔가가 손가락에 잡히는 것을 느꼈다. 뭘까? 그것을 꺼내어 보았다. - 1실링 짜리 은화. 순간, 온몸이 굳어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묘비를 읽었다. 

< 다니엘 G 할리벗 >

납골당 입구에 있는 비석에 새겨진 이름이었다. 









“ 다시 와줘서 고맙소, 존! “ 

“ ….역시 꿈은 아니었군요, 할리벗씨! “ 

할리벗은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게 맞았고, 나는 낮에 준비했던 얘기들을 꺼내었다. 

“뭔가를 잔뜩 들고 왔군, 그게 뭐요?” 

“ 서점과 도서관에 들려서 이것저것 좀 조사해 보았지요. “ 

“ 뭘 말이요? “ 

“ 유령에 대해서죠, 할리벗씨. 어떤 경우에 유령이 되는가. 유령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등등에 관해서요.” 

콧수염을 만지며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 그래, 뭘 찾아내셨소? “ 

“ 책에 의하면, 대개 죽은 영혼들은 뭔가 이승에 남겨둔 것이 있을 때 유령이 되어 떠돌게 된다더군요. “ 

“ 남겨진 것? “ 

“네. 예를 들자면 사랑을 못 다 이루고 죽었다거나,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거나, 혹은 해야 할 일을 다 못하고 죽었을 때 말이죠. “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 글쎄….. 최근에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심장마비로 죽었으니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것은 아닐 텐데….. 또 뭐라 그랬소? “ 

“당신이 해야 할 일을 다 마치지 못했을 경우.” 

“아직 내가 다 하지 못한 일이 남아 있었던 건가? “ 

“ 뭐, 꼭 그런 거라는 건 아니지만…. 당신이 천국으로 가지 못하고 남아 있는 건, 뭔가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그 이유를 찾아내야죠. 생각해 보세요… 뭔가 짚히는 부분이 없는지…… “ 

그와의 만남으로 인해, 이미 죽을 생각은 잊은지 오래였다. 일단 배를 불렸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죽은 대가의 유령과 만난다는 것은 너무나 흥미로운 일이었고, 그런 그의 존재는 자칫 사그러질듯한 나의 삶에 유쾌한 열정을 되찾아 주었다. 인생은 얼마나 예측불가능한 것이란 말인가! 

“ 어쩌면 빚을 못 갚은 것일지도 모르죠. 혹은 작품을 완성을 못했다거나….. “ 

문득, 할리벗이 고개를 들었다. 

“ ….그건가? “ 

“ 그거라뇨? “ 

그는 턱을 어루만지며 천천히 생각했다. 

“ 실은 말이오…. 내가 최근에 구상하고 있었던 작품이 있었소…. 그래서 막 앞부분을 쓰던 무렵이었는데, 그만 죽은 거란 말이오. 혹시 그 일을 다 마치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겠소? “ 

“ 그런가요? 혹 그 작품이 필생의 역작이라든가, 뭐 그런게 아니었나요? “ 

“ 필생의 역작 정도는 아니지만, 뭐랄까, 내 사상과 인생관을 잘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글이었소…… 맞아. 난 그 글을 완성하고 싶었소. “ 

- 그거다. 직감적으로 제대로 찾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 그럴 줄 알았어요! 뭔가 있을 줄 알았죠…. 분명히 그게 이유일 겁니다! 맞아요…. 당신은 그 작품을 완성해야만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일지도 몰라요. “ 

“ 과연 그런 것일까…? 글쎄…..” 

그는 못내 의심스러운 모양이었다. “ 뭐 어차피 할 일도 없지 않습니까? 밑져야 본전인 걸요! 한 번 시도해 볼만한 일이잖아요? “ 

“ 그렇긴 하군. 그런데 어떻게 마저 쓰단 말이오? 그 원고는 내 서재의 서랍속에 있는데……” 

“ 어떻게 하긴요? 가서 쓰면 되지 않나요? “ 

“ 그게 말이오….. 왠일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묘지 밖을 벗어나지 못한다오. 그러니 어찌 집까지 갈 수 있겠소? “ 

“ 그런 문제라면 제가 가져다 드리지요! 당신 집 주소만 가르쳐 주신다면요! 빨리 행동한다면 원고를 구할 수 있을 겁니다. “ 

“ 그래 준다면 나로선 정말 고마울게요, 존 “ 

“ 종이와 펜도 가져다 드리지요! 당신은 글을 완성할 수 있을 겁니다! “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생겼다. 그리고 그것은 중요한 일이라는 확신이 가득했다. 며칠전만 해도 온통 절망적이던 내게 열정이 솟아 올랐다. 그래, 어쩌면 내가 그날 이 묘지로 발을 옮긴 것은 이런 역할을 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뭔가 위대한 작품을 세상에 등장시키기 위해서. 



다음날, 그가 준 열쇠로 그의 집에 들어가서, 원고를 무사히 가지고 나올 수 있었다. 









무척이나 당혹스러웠다. 

“ 무슨일이오, 존? “ 

“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는데… 어제 당신이 분명히 글을 쓰셨지요? 저도 옆에서 그걸 지켜보았구요. “ 

“ 그랬지. 열 한페이지를 썼었소. “ 

“ 그런데 말이죠….. 그 원고를 분명히 제가 그대로 보관하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까 그게 전부 백지인 채로 있지 뭡니까.” 

그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뭐라고? 내가 쓴 글을 모두 잃어버렸단 말이오? “ 

“ 아뇨… 잃어버린 건 결코 아닙니다, 확실하게 보관했거든요. 다만 종이는 있는데, 글자만 사라져 버렸어요….. 마치 당신이 했던 일이 모두 무효였던 것처럼.”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그는 나의 손에서 원고뭉치를 가져가 몇 장 뒤적 이며 살펴 보았다. 그러나 온통 백지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내 냉정을 되찾고, 사태를 이해했다. 

“ 말하자면, 유령인 내가 쓴 글은 현실세계에선 남아있지 못한다는 뜻이로군. 그런거요? “ 

“ 뭐, 그런게 아닐까요. “ 

나도 비슷하게 추측하고 있었던 차였다. 

“ 그럼 도대체 어떻게 글을 완성한단 말이지…. “ 

글쎄.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그는 낙담한 듯이 두 손으로 머리를 싸쥐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답답해졌다. 하나의 희망이 싹트자마자 사그러진 꼴이었다. 어떻게 한단 말인가. 내가 대신 써줄 수도 없고……. 


대신? 

“ 이봐요, 할리벗! 이렇게 하면 어때요? “ 

급히 그의 어깨를 잡으며 소리쳤다. 

“ 어떻게 말이오? “ 

“ 제가 대신 쓰는 겁니다! 당신이 내용을 구술해 주면, 제가 받아 적지요! 그러면 그건 사라지지 않을 거 아니겠어요? “ 

그는 손바닥으로 무릎을 쳤다. “ 그렇군! 좋은 생각이야. 그렇게 하면 계속 글을 쓸 수 있겠구만! “ 

갑자기 모든게 맞아떨어져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 역시, 이 모든게 우연이 아니었던 거에요! 당신이 날 만난 이유가, 그리고 내가 당신을 만난 이유가 있었던 거죠….. 둘이 힘을 합쳐야만 그 일을 끝낼 수 있는 겁니다!” 









그 뒤로, 그와 나 사이의 기묘한 관계가 지속되었다. 

그가 내게 주는 돈으로 난 새 하숙집을 얻고,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낮이면 하숙집의 침대에서 자다가, 밤이 되면 묘지로 찾아가 그와 함께 새벽까지 글을 쓰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저녁이 되어 그를 만나러 가지 전까지는 원고를 깨끗하게 옮겨 적고, 전날의 느낌을 유지하려 애썼다. 이 하루하루의 일들은 아직까지도 나에게 결코 잊혀질 수 없는 인상적인 체험이었는데, 대가의 글을 쓰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참여할 수 있는 것은 무명의 작가였던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열정적으로 글을 썼으며, 때로는 깊은 생각에 잠겨 몇시간이고 작업을 중단 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급히 받아쓴 원고를 다시 읽어보며 교정을 보기도 하고, 또 영감에 가득찬 아름다운 구절들에 감탄하기도 하였다. 그는 종종 한 문장을 시작하기 위해서 오랬동안 고민하곤 하였는데, 그런 고민 끝에 선택한 문장은 우아하면서도 적절했고, 힘이 있으면서도 부드러웠다. 나는 그동안 내가 배워온 모든 시간들보다, 그와 함께 일한 시간동안 작가로서 알아야 할 것들을 더 많이 배울 수 있었다. 

“ 잠깐만요, 다니엘. 조금만 천천히 불러줘요. “ 

“ 그럴 순 없다네, 존. 시간이 없다면 대강 받아적게. ….그 인상만 남도록 말야. - 그런 다음에 나중에 채워 넣으면 돼. 영감은 순간이라네. 그걸 놓치고 문장을 완성해봤자 공허할 뿐이야.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그 스쳐가는 찰나는 놓치지 않는 것 뿐이지.” 

나는 그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글을 받아 적으면서 점차 내 자신이 그의 글, 그의 생각,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닮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면서 내가 이전에는 무엇이 부족했었는지, 작가로서 내가 추구하고 지양해야 할 것들이 무엇 인지를 깨달아갔다.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글에 관해서, 혹은 삶에 관해서. 

“ …..다니엘, 당신 소설에서 이 부분은 도저히 공감할 수가 없어요. - 굳이 이렇게 혹독하게 굴 필요가 있는 걸까요? 주인공도 사람일 뿐이잖아요. 인간적인 면을 너무 간과하는 건 아닌가요? “ 

“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인간은 인간이라는 이유로, 신이 되고자 하는 노력을 너무나 게을리 하였다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요인이 무엇이겠나? 소박하게 만족하며 인간적인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것? -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인간이면서 인간을 넘어서려고 노력하는 것…… 슬프게도 그게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라네. “ 

“ 슬프다구요? “ 

“ 그래, 슬픔. 그게 인간의 감성의 가장 밑바탕에 깔려 있다네.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슬픈 것이거든. 그걸 이해하지 못한다면 감동을 담을 수 없어.” 

물론 그와 나누었던 대화의 의미를 그때 다 이해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떤 것들은 바로 알아 들었지만, 어떤 것들은 한참 뒤에야, 혹은 몇 년이 지나서야 알게된 것도 있었다. 전에는 이토록 누군가의 글을 완전히 이해해 본 적이 없었다. 작업이 진행될수록, 과연 그가 글을 쓰는 것인지, 내가 쓰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모든 것이 나에게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자궁이 좁아지기 시작한 태아처럼, 무언가가 새로 태어나기 위해 나의 정신 안쪽 어딘가에서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자네는 아직 알아야 할 것이 많아, 존.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만은 아니라네. 성경을 생각해보게나. 만약 요한이 성경을 쓰면서 자신의 해석을 잔뜩 집어넣었으면 어떻게 되었겠나? 만일 모세가 성령의 말씀을 나름대로 해석하여 설명하려 들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나? “ 

“그럼 우리는 뭘 써야 하는 거지요?” 

“우리는 기록할 뿐이야. 우리가 쓴 글의 의미는 사실 자신조차 알 수 없는 법이라네. 마치 씨앗과 같은 거지. 씨앗이 오염되지 않았다면 언젠가는 싹을 틔우기 마련일세. 하지만 언제, 어디서 싹을 틔울지는 알 수 없지.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건강하고 썩지 않은 씨를 심는 일일세.” 

혼자 있게 되면, 그와 나눈 대화들과, 그의 글을 비교해 보며 많은 생각에 잠겼다. 이전의 나는 썰물처럼 사그러들어가고, 같은 바닷물이지만 더욱 풍성해져 돌아온 밀물처럼 나를 채웠다. 다듬어지지 못한 독한 열정을 제멋대로 헤쳐놓을 줄만 알았던 나의 작가적 감성은, 차곡차곡 채워져 가는 그의 원고들과 함께 익어 가고 있었다. 









“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 “ 

“ 잠깐만요, 그의….. 마지…막… 말…이 었….다. “ 

받아적는 손가락이 얼얼하다. 마침표를 찍고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얘기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다니엘은 나를 내려다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 끝이네. 글은 끝났어. “ 

난 눈을 커다랗게 뜨며 입을 벌렸다. 그의 말이 접수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끝이라.... 끝났구나. 

“ 축하합니다! 드디어 해내셨군요! “ 

원고를 내려놓고 일어나 그를 얼싸안았다. 그도 기쁜 듯이 웃음을 터뜨리며 나를 안았다. 어느새 11월도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었다. 묘지의 밤공기는 무척이나 차가왔다. 

“ 그래….. 다 자네 덕분이지. 드디어 일을 끝마친거야. “ 

“ 그래요, 결국 완성할 줄 알았지요! 이렇게 끝을 맺는군요.” 

“ 이제야 한 시름 놓을 것 같네…. 이제 내 할일은 마쳤으니 말일세.” 

“ 그렇군요….. 이제 당신의 임무는 완수한 거겠지요.” 

우리는 한동안 손을 맞잡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건 막 산고를 마친 여인과도 같은 만족감이었다. 하지만 뭔가가 이상하다….. 서로가 감지하고 있는 막연한 불안감이 우리를 엄습했다. 결국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다 끝난 건가?” 

“ 그러게요…. 어떻게 되는 걸까요? “ 

“ 글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걸? “ 

“ ….출판까지 완료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지요. 아직 오늘 쓴 부분의 교정도 봐야 하구요…. 참, 그러고 보니 아직 하나 남았군요?! “ 

“ 뭐 말인가? “ 

“ 서명을 해야죠, 다니엘! 작품을 끝냈으면 서명을 해야 할 거 아닙니까? “ 

“ 그렇군….. 그런데 서명을 어떻게 하지? 내가 하면 그냥 사라져 버리고 말텐데? “ 

“ 여기에 써주시면 제가 그대로 따라 그리지요. 몇 번 연습하면 될 겁니다. “ 

“ 그럴까? “ 

그는 펜으로 마지막 페이지에 서명을 했다. 그걸 보고, 몇 번 다른 종이위에 연습해 본 후에, 그의 서명위에 그대로 따라서 그려내었다. 그는 그런 나를 어깨 너머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천천히, 조심스레, 마지막 획까지 완성시켰다. 

“ 하하, 어때요, 다니엘? 근사하죠? 이정도면 당신 수표도 위조하겠는데요?! “ 

“ …..그럴 듯 하지 않아요? “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다니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다니엘? “ 

나는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싸늘한 11월의 묘지에는 나만 혼자 있을 뿐이었다. 

“ 다니엘!!! “ 

소리쳐 불러보아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차가운 늦가을 바람에 낙엽이 굴러가는 소리만이 대답할 뿐이었다. 나는 등잔을 들었다. 불빛이 납골당 주변을 구석구석 비추었지만, 어디에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인기척조차 없었다. 애초에 여기에 있었던 사람은 나 혼자였던 것처럼, 묘지안은 스산하고 고요하였다.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원고들이 몇 장 흩어졌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핥고 지나갔다. 그 바람은 달콤한 꿈에서 이제 막 깨어난 허탈함처럼, 싸늘하게 나의 온 몸을 얼어붙게 만들고 사라졌다. 

문득, 그가 이제 완전히 떠나버렸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는 만날 수 없으리라는 사실도 함께. 









우여곡절 끝에, 결국 그의 작품은 출판되었다. 특유의 문장과 서명으로 인해 그의 유고로 인정받을 수 있었으며, 공동저자로서 그의 마지막 작품에 대한 저작권 수입은 내가 누리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또 한번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구술을 받아 적은 나 역시 덩달아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에게 또 한번 빚을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나, 설사 알았더라도 흔쾌히 동의했을 거라 생각하고 스스로를 위안하였다. 

안정적인 수입과 그의 작품으로 인해 알려진 나의 이름, 그리고 그와 함께 보낸 두 달간의 경험으로 인해 나는 비로소 작가로서 성공할 수 있었다. 한참 뒤에서야 내가 얻은 것이 정말로 많다는 것, 그와의 경험이 나를 크게 성장시켰다는 것을 알았다. 

그후로도 오랬동안, 그는 내 마음속에 살아있었고, 많은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 해의 가을은 영원히 멈춰진 채로, 나의 뇌리에 고정되어 버렸다. 한가로울 때면, 그 묘지를 찾아가 그와의 기억을 추억하곤 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그에게, 나 자신에게 묻곤 하였다. - 왜 하필 나였을까. 내가 그 날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난 죽고 말았을까. 그가 해야 했던 일은 결국 해 낸 것일까……. 그의 마지막 작품은 훌륭한 것이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그의 최고의 작품이라 할 만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것이 그의 사명이었던 것일까. 그것이 그를 유령으로 떠돌게 할 만큼 중대한 일이었을까. 우리가 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다니엘, 당신은 답을 알고 있겠지요, 묘비를 바라보며 그에게 묻곤 하였으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고, 결국 쓸쓸히 홀로 되돌아오곤 하였다. 









세월은 흘렀고, 나는 나름대로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 아니, 어쩌면 한창 때의 그보다도 더 유명한 작가가 되어 있었다. 

- 인생에는 그런 것들이 있다. 당시에는 너무나 선명하여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던 일들. 눈이 시리도록 선명하여 그 윤곽을 잡아낼 수 없던 기억들. 흙탕물이 가라 앉아 물이 맑아질 때까지는 시간이 걸리듯이, 진정한 의미가 말로 표현할 수 있도록 형태를 잡아가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곤 한다. - 그것은 잡히지 않는 구름처럼, 기억나지 않는 새벽의 꿈처럼 두리뭉실하게 내 마음속을 떠돌다가 천천히, 조금씩 그 형상을 만들어 가곤 한다. 그리고 어느날인가, 아, 불현듯 그 모습이, 그 사실이 확연히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갑자기 모든 것이 명확해지는 것, 거기에는 아무런 새로운 것은 없다. 나는 이미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안에 깊이 묻혀있던 씨앗이, 완전히 잊어버린 먼 훗날 불쑥 그 떡잎을 피운 것이다. 거기에 필요한 것은 오직 오랜 시간, 적당히 닳아지고 적당히 색이 바래질 시간만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제는 안다. 그가 이 세상에 남아서 마저 해야 했던 일은, 그 소설이 아니었다는 것을. - 그가 세상에 남았던 이유는 바로 나였던 것이다. 그는 마지막 으로 나를 살려야 했던 것이다. 그것이 그가 죽어서도 죽지못하고 남았던 이유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어떤 논리적 추리도 아니었다. 그것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때가 되면 잊어버렸던 오래된 씨앗이 싹을 틔우듯이 저절로 알게 된 것이었다. 

물론 그것을 그가 선택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역시 이유를 몰랐으리라. 하지만 그는 절망속에서 죽어가던 나를 살려야 했고, 또 가능성 있는 작가로서 재기할 수 있도록 도와야 했다. 어떤 운명적인 이유가, 그 때 나를 그곳으로 인도하였고 다니엘을 만나게 하였다. 아니, 어쩌면 그의 존재와 그의 작품 모두가, 그 순간에 나를 살리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 단지 나를 살리기 위해서만이라면 그가 굳이 작가였을 필요는 없었으리라. 하지만 그 날 누군가 나를 살려내고, 나를 유명한 작가가 될 수 있도록 자극할 수 있어야 했다. 잔인하지만, 말하자면 그것이 그의 존재의 이유였던 셈이다. 

나는 이제 안다. 정교하게 맞물려 가는 이 세상의 운명적인 흐름에는, 어떤 고귀한 이유가 존재한다는 것을…. 물론 내가 궁극적인 이유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내가 살아남고, 작가로 성공한 것 역시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이리라.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지만, 추측하건데, 나의 작품이 요즘 젊은이들에게 많은 변화를 주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나의 생존은 그 어떤 누군가의 심경에 변화를 줄 책 한 권을 남기기 위해서일거라고 상상해 본다. - 그는 결코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젊은 시절, 자신의 사상에 영향을 끼친 어떤 책 한 권이 존재하기 위해 내가 태어났고, 그런 나를 살려내고 작가로 키우기 위해 또 한 작가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들이 어떤 운명적인 만남으로 그 역할을 완수해 냈는지를…… 

아마도 그는 대단히 중요한 사람이리라. 아니, 어쩌면 그 역시 더 큰 목적을 이루기 위한 중간단계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거대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로서도 알지 못하리라. 이해할 수 있는 의미를 빚어내는 데는 정말로, 정말로 많은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까. 

가끔씩, 다니엘을 떠올리곤 한다. 우리의 만남이 어떤 의미였는지, 내 생각들을 말해 본다면 그는 어떻게 반응할까. 그도 동의할까? 우리의 초현실적인 만남이, 단지 거대한 바다의 흐름를 연결하는 잔물결이었다는 걸 인정할까…..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우리의 작은 사명과, 그와의 만남을 감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 그래서 어떤 일들은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아직 그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래된 이야기들은, 어떤 추억들은, 주어지지 않은 나름의 의미를 만들어 가기도 한다. - 내가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겨우 그런 것들이다. 화살은 어디선가 커다란 나무가 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알 수가 없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같이 화살을 쏘아올리던 날의 기억, 함께 씨앗을 심을 때의 추억과 같은 것들 뿐이다. 그게 우리에겐 최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그와 다시 만나서, 의미있었던 우리의 만남을 다시 이야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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