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기정

 

 

 


1. 오늘

 

 


 끝도 없이 올라가는 듯 하던 엘레베이터가 어느새 목적지에 가까와지고 있었다. 감속에 들어가며 몸이 가벼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자 웅성이던 사람들의 목소리는 어느새 잦아들어, 엘레베이터의 내부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윽고 스피커로부터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 이제 곧, 정상에 도착하겠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벨트를 풀지 마시고, 완전히 정지한 후에 자리에서 일어서 주시기 바랍니다."

 

 엘레베이터의 구석쪽 좌석에 앉아있던 남자는 목이 타는지, 홀더에 놓인 물컵을 집어들었다. 긴장된 눈빛을 보이는 것은 그만이 아니었지만, 유난히 초조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와는 대조적으로, 그의 옆에 앉아있는 갈색머리의 여자는 편안히 눈을 감고 있었다.

 

 철커덩.

 

 육중한 기계음을 내며, 엘레베이터가 멈춘다. 사람들은 벨트를 풀고, 자리에서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벨트조차 풀지 않은채, 좌석에 앉아 있었다. 그의 손은 손잡이를 꽉 쥐고 있었으며, 손잡이의 금속부분은 땀으로 번들거렸다. 그의 얼굴은 흥분으로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옆좌석의 여자가 문득 눈을 떴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보았다.

 

" 내려야죠. "

 

 그녀는 담담하게 벨트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보리색 레인코트가 갈색 머리와 잘 어울렸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녀가 일어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내리고, 엘레베이터에는 그들 둘만 남아 있다.

 

 " 안 내려요? "

 

여자는 남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남자의 입술은 뭔가를 말하려는 듯, 달싹거렸다.

 

 

 

 

 

2. 어젯밤

 


딸칵.

 

라이터의 불빛이 어두운 방안을 순간적으로 붉게 물들이고는 사라졌다.

담배연기는 창가에서 쏟아지는 푸른 달빛을 흐뜨리고는 사라진다. 호텔의 커다란 창 밖으로 비치는 하늘에는 두 개의 창백한 달이 떠 있었다. 어디선가 마지막 밤을 즐기려는 듯한 음악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 내일이면 담배도 끊는 건가요? "

 

뒤를 돌아보자, 알몸의 여인이 침대 시트에 몸을 반쯤 가린채, 이쪽을 향해 돌아누워 있다. 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대답했다.

 

" 글쎄.... 20년이 넘게 피워왔는데, 그럴 수 있을까?"

 

여자는 몸을 일으켜 테이블 위의 담배갑에 손을 뻗쳤다.

 

" 그럼 난 끊을 수 있겠군요, 피우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니까."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 습관조차 잊게 될까? 담배 취향 같은..."

 

그녀의 담배끝이 빨갛게 타올랐다. 그녀는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 아닐 거에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다시 한모금 연기를 빨아들인 후, 말을 이었다.

 

" 하지만 난 다른 담배를 피울거에요. "

 

" 잊고 싶은 거야? "

 

" 지워버리고 싶어요. 담배도, 담배를 피우게 된 이유도. 모든 걸 다. "

 

그는 아무말 없이 다시 창가로 얼굴을 돌렸다.

그녀는 담배를 눌러 끄고, 배게에 얼굴을 묻었다.

 

 

 

 


3. 어제

 


그녀는 손을 내저었다.

 

" 아뇨, 안돼요. 사진을 찍으면 안된다는 걸 알잖아요."

 

그는 카메라에서 눈을 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 등록한 사람들은 사진을 찍지 않는다구요, 그건 규칙이에요. "

 

" 그런 규칙이 있단 말이야? "

 

"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지만..... 보세요, 아무도 사진같은 건 남기지 않잖아요? "

 

그는 카메라를 든 손을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사람들이 산책을 하고 있었으나, 아무도 사진을 찍는 사람은 없었다. 잠시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피식, 웃으며 카메라를 집어넣었다.

 

" 그렇군, 맞아. 바보같은 생각이었어. "

 

그녀는 두 손을 등뒤로 맞잡고 앞서 걸어갔다. 그는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일 미터쯤 떨어져서 그녀의 뒤를 따랐다.

 

" 정말 아름다운 곳이에요, 그렇죠? "

 

" 그래, 정말. "

 

부부로 보이는 노인들이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길 건너편의 벤치에선, 한 남자가 뭔가를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그 옆에서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위로해 주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 여긴 마치 정신과 병원같아. "

 

" ? "

 

" 그 왜, 집단으로 심리치료하는 거 있잖아. 환자들이 둥글게 둘러 앉아서 한명씩 자기 얘기를 하고, 그러면서 카타르시스로 치료되는 거 말야."

 

" 사이코 드라마처럼요? "

 

" 그런게 사이코 드라마였던가? ... 아뭏든 그런식의 자기고백이 치유효과가 있는 것 같아. 여기에선 어떤 비밀도 숨김없이 다 이야기 할 수 있으니까. 귀환영업소 사내가 그러는데, 20% 정도는 산에 오르지 않고 되돌아 간다더군."

 

" 기억을 그냥 가진채로요? "

 

" 응. 그들은 여기에서 지내면서 기다리는 동안 스스로를 치유시킨 거지. 어쩌면 막판에 자신이 없어졌을 수도 있고.... "

 

그녀는 소녀처럼, 리조트의 꽃밭으로 뛰어 들어갔다. 

 

" 그런 사람에게 비밀을 털어놓았다면, 난처하겠네요."

 

" 상관있나. 어차피 그런 사실조차 기억못할텐데."

 

훗, 그녀는 웃으면서 꽃밭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더니, 뭔가를 찾으려는 듯 유심히 바닥을 살폈다.

 

" 후회하진 않겠죠? "

 

그녀가 문득 뒤돌아 보며 물었다. 그는 천천히 그녀를 향해 걸었다.

 

" 후회할 수도 없겠지. "

 

" 내일, 몇시죠? "

 

" 17시. "

 

" 그럼, 이제 딱 스무시간 남은 거네요. "

 

" 그렇지. "

 

" 키스해줘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두 팔을 벌려 부드럽게 안았다. 그는 천천히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여섯개의 태양이 한점을 향해 모여들고 있었다.

 

 

 


4. 이틀 전.

 


"걱정 마세요, 손님. 저희집은 정부로부터 직접 허가를 받아서 하는 업소라서, 결코 우려할 만한 일은 없습니다, 내 장담하지요."

 

턱수염의 남자는 호탕히 웃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뚱뚱한 체구에서 나오는 웃음소리는 자그마한 귀환영업소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는 계약서를 턱수염사내쪽으로 밀어주며 물었다.

 

" 만약 깨어나지 않을 경우엔 어떻게 돼죠? "

 

" 그럴 경우는 거의 없죠, 제 기억으론 딱 한번 있었는데, 알고보니 그 양반은 간질을 앓던 환자였지 뭡니까? - 그 뒤론 간질이 있는 사람은 등록이 아얘 불가능해졌지요. 손님도 등록하실때 의사한테 검진을 받으셨죠?"

 

그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 실패하는 경우도 있습니까? "

 

" 뭐, 간혹 있지요. 그건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만, 대개는 다 잘 됩니다. 실패하실 경우엔 기간에 따라서 환불해 드리지요. 그리고 제우스여행사 배로 오셨죠? 거기 상품은 자동으로 보험에 가입되는 거니까, 안 되면 보험금도 받으실 수 있을 거구요. "

 

" 계약 파기는 어떻게 됩니까? "

 

" 손님들 중 20% 정도는 기다리시는 며칠 동안에 등록을 철회하시죠. 그리고 나머지 분들 중에서도, 마지막 순간에 그만두시는 분들이 또 20%정도는 돼요. 그럴 경우에는 계약금만 포기하시면 됩니다. "

 

" 20%나? 그렇게 많나요? "

 

" 그럼요! 손님도 보셨겠지만, 지금 여기 온 양반들, 얼마나 양순해졌습니까? 저들도 처음 왔을 땐 저렇지 않았어요. 매일같이 술이다 마약이다 파티다 하며 흥청망청하죠. 그러다가 점점 마지막 순간이 오니까 다들 뭔가를 깨달은 겁니다, 말하자면 경지에 이른 거지요. - 어차피 며칠 뒤면 다 잊어버릴거, 서로서로 믿고 털어놓고 울면서 다 벗어버리는 겁니다. 내 아들이 죽었어, 그녀가 날 버렸지, 난 사람을 죽였어! 뭐 이런 비밀들을 다 털어놓고 나면 속이 후련해지니까요. 그러고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받고 돌아가는 거지요. 그게 바로 기적입니다! 기적이 별건가요? 다 치유됐는데 뭐하러 '그 산'에 올라갑니까? 이 별은 고해의 별이 아니라 기적의 별, 부활의 별이라니까요! "

 

사내는 껄껄대며 웃는다. 그도 재미있다는 듯이 따라 웃었다.

 

" 이 별은 신의 축복입니다! 여기에선 모든 죄를 용서받으니까요. 우리로 말하자면, 에, 신의 천사들이라고나 할까요. 천국에 오신분들을 안내할 일손은 필요한 법이니까요. 않그렇습니까, 손님? "

 

사내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하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나가는 그의 뒤통수에 사내의 외침이 들렸다.

 

 "진정한 구원은 죄를 용서받는게 아닙니다. 죄를 지었다는 사실조차도 잊게 해주는 것, 그거야 말로 신의 선물이지요, 하하핫! "

 

몇발자욱을 나서자,  밖에서 기다리던 그녀가 반갑게 웃으며 맞아주었다.

 

" 다 됐어요? "

 

" 다 됐어.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군. "

 

 

 

 

 

 

5. 사흘전.

 

 


  그가 토해내던 통곡이 잦아들고, 목이 메이는 꺽꺽거리는 듯한 울음이 남았다. 그는 웅크린 채, 몸을 부들부들 떨며 앉아있는 그녀의 다리에 기댄채 흐느꼈다. 폭풍같은 격정이 지나가고 잔잔한 평화로움이 두 사람을 감쌌다.

 

 " 괜찮아요..... 괜찮아. 다 지난 일인 걸요...."

 

 그녀는 손을 들어 그의 웅크린 등을 감쌌다. 어린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토닥거리며 속삭였다. 그는 서럽게 맺혀있던 눈물을 흘리며 그녀에게 더욱 힘껏 매달렸다. 그런 그의 어깨와 머리를 품에 감싸안으며 그녀는 말했다.

 

 " 당신 잘못이 아닌 거에요. 어쩔 수 없었던 거니까.... "

 

 아이가 엄마의 품에 파고들듯, 그는 그녀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감싸 안은채 한참을 있었다. 그녀의 체온이 전해지자 그의 흐느낌은 잦아들었고, 간헐적으로 어깨를 떨 뿐이었다. 그녀는 손으로 그의 이마와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그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런 그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눈에도 가득 눈물이 고여 있었다.

 

 " 괜찮아요, 다 잊을 수 있으니까..... "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그를 더욱 강하게 끌어당겼다. 아기가 엄마젖을 찾듯, 그는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길고 뜨거운 키스였다.

 

 

 

 

 

 

6. 사흘전.

 

 


그는 테이블에 한쪽 팔꿈치를 괸 채, 약간은 뜻밖이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 잃어버린 사랑 때문에 ?"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는 머리를 쓸어올렸다.

 

" 그래요, 사랑. 왜요? 너무 유치해서요? "

 

그는 말없이 그녀의 잔에 술을 채웠다. 
  
잔을 받아 입가로 가져가던 그녀는, 술이 목에 걸렸는지 콜록거리며 술을 뱉어냈다. 그는 재빨리 티슈를 꺼내어 그녀에게 건네었다.

 

" 그거 알아요? 어디를 봐도 그 사람이 남아 있다는 거. 아침에 세수를 할 때에도, 아, 이건 그가 쓰던 칫솔이었지, 화장할 때에도, 이건 그 사람이 좋아하던 향수였는데,  여기 그 사람이랑 같이 왔었던 곳인데...... "

 

 " 사랑이라...하지만 정말 그토록 사랑했다면, 아프더라도 기억을 간직하는 게 더 낫지 않겠소? "

 

 그 역시 잔을 입술에 가져가며 말했다. 그녀는 어깨가 가볍게 들썩였다.

 

 " 훗, 그렇게 말하다니 당신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에요. 아니면."

 

그녀는 잔을 들이켰다.

 

 "... 아니면? "

 

 " 아니면, 그런 사랑을 아직 한 번도 못해봤거나."

 

 그는 천천히 몸을 뒤로 젖혔다.

 

 " 그럴지도 모르지. 난 전역한 이후로는 누군가를 사랑해 본적이 없소. 아니, 그 뒤론 난 누군가를 사랑할 수가 없었던 거지만."

 

 그녀는 약간 미간을 찌뿌렸다.

 

 "전역한지 얼마나 됐는데요?"

 

 " 이제 7년...아니 햇수로는 8년이군. "

 

 그녀는 몸을 비스듬이 앞쪽으로 기울인채 물었다.

 

 " 긴 시간이네요... 왜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는 거죠?"

 

 " 그건......"

 

 표정이 어두워진채, 그는 손을 미간으로 가져갔다.

 

 "기억하고 싶은 않은 일이 있었소. "

 

 그녀는 훗, 웃으며 그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 기억하고 싶지 않다.... 그게 당신의 이유로군요? 이 별에 온."

 

 " 그래요. 당신이 사랑때문이라면, 난 군에서의 기억때문에 왔소."

 

 " 얘기해봐요. 어떤 일이었는지..."

 

 "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그의 빈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 바보같은 소리 말아요. 여긴 누구나 당신같은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구요.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결국은 떠올려야만 해요. 알잖아요? 기억을 지우려면 '산'에서 계속 그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걸..."

 

 " 그 땐 생각할 거요."

 

" 그럼 지금 애기해봐요. 연습처럼. 아니, 어쩌면 그 기억과도 사흘 뒤면 안녕이니까.... "

 

 그녀는 잔을 들고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 한명쯤, 당신의 비밀을 같이 가지고 '산'에 오르는 것도 괜찮지 않겠어요? "

 

그는 천천히 다시 담배를 물었다. 담배가 반정도 타들어갈 때까지, 그는 말이 없었다.

 결심한 듯, 그는 담배를 끄고 입을 열었다.

 

"7년 전이었소. 난 행성반란지역에 투입된 특수부대의 소대장이었지...."

 

 

 

 

 

 

7. 나흘전.

 

 

"....정말 놀랍지 않소? 여섯 개의 태양이라니! "

 

 그는 창밖을 내다보며 탄성을 질렀다. 여객선의 창밖에 펼쳐지는 놀라운 풍경에, 그는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 정말 그러네요. 눈이 부실 정도에요. "

 

 크고 작은 여섯개의 붉은 태양이 한 눈에도 시야에 들어올 만큼 모여 있었다.  어느새 그의 등 뒤로 온 그녀는, 한손에 마티니 잔을 들고 그의 어깨에 살짝 기대었다. 그는 순간 마음이 두근거렸으나, 가만히 있었다. 어깨를 통해 그녀의 체온이 전해졌다. 전망창의 앞에는, 6개의 태양을 배경으로 M411 행성이 보였다. 수년만에 한번씩 찾아오는 밤 때문인지, 행성의 어두운 면엔 빛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 이제 몇시간만 있으면 착륙하겠군. "

 

 " 긴 여행이었죠. 당신 덕분에 지루하진 않았지만요. "

 

 그녀는 생긋 웃으며 마티니를 홀짝였다. 살짝 뒤돌아본 그녀의 웃음은 무척이나 해맑았다. 

 

 " 그러게. 당신을 어제야 처음 만난게 아쉽군. "

 

 그는 어깨를 들썩하며, 뒤돌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전망대의 사람들을 부산하게 움직이며 채비를 갖추려 객실로 돌어가고 있었다.

 "

 " 호텔을 잡을 수 있을까 모르겠어, 아무래도 늦게 도착한 거라.... "

 

 그의 혼잣말을 들었는지, 콧수염을 기른 바텐더가 다가와 얘기했다.

 

 " 걱정 마십시오! 저희 배의 홀리데이호텔 체인과 계약이 되어 있어서, 우선적으로 방을 배정하고 있습니다. "

 

" 그런가요? "

 

 " 그럼요, 5년에 한번 있는 대목인데 소홀히 할 리 없죠. 그리고 만약 방이 없다면, 원하시는 고객께는 여객선의 선실을 사용하시도록 임대해 드리기도 한답니다."

 

 그는 문득 생각난듯 질문했다.

 

 " 아.....그럼 승무원들은 '그 날' 어디에 있죠? "

 

 " 이 별 주민들을 포함해서, 등록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지하실에 내려가 있게 되지요. 그리고 혹시 밖에 있게 되더라도, '그 산'에 있지만 않는다면 별 문제는 없다고 하더군요."

 

 " 하긴, 그렇지 않다면 주민들로서는 위험한 일이겠지요..... "

 

 순간, 스피커를 통해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이제 곧 도착지인 시리우스 감마의 M411 행성, 일명 <고해의 별>에 도착하겠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객실로 돌아가셔서, 도착준비를 서둘러 주시기 바랍니다. "

 

 

 

 

 

 


8. 닷새 전 오후.

 

 

이제 나흘 뒤면, 저 여섯개의 태양은 정확히 일렬로 배치된다. 그것은 5년에 한번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그리고, 그 특별한 천문학적 이벤트는 5년마다 한번씩 황량한 이 별로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그는 안내 팜플렛의 그림을 가르키며 설명했다.

 

 " ....그러니까, 이렇게 여섯개의 태양이 일직선이 되면, 뭔가 강력한 전자기 장이 형성되면서 이 별의 한 지점으로 통해 에너지가 집중되는 것 같소. "

 

 " 그게 '그 산'이로군요? "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질문했다.

 

 " 그래요, 우리의 목적지, 바로 '그 산'이 바로 그 지점이죠! "

 

 " 왜 하필 거기일까요? "

 

 " 책에서는 그 산에 매장된 철광석이, 말하자면 전극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 같아요. 하지만 왜 그렇게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더군요. "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팜플렛을 들여다보았다. 

 

 " 설마, 자기 이름같은 것도 다 잊어버리게 되는 건 아니겠죠? "

 

 " 그렇지는 않다더군요. 대개 5년에서 10년 정도의 기억만을 상실하게 된답니다. 아무래도 개인차라는건 있겠지요."

 

 그녀는 커피잔을 들어 카푸치노의 거품을 한모금 마셨다. 하얀 거품이 입술에 묻은 모습이 귀여웠다.. 그녀는 여객선의 창을 통해 멀리 보이는 밝은 별을 바라보았다.

 

 " 어떤 걸까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건? "

 

 " 글쎄요..새로 태어나는 건 아니지 않을까요?. 오히려 몇년 전으로 돌아가는 것이겠죠.... "

 

 " 몇년 전으로 돌아간다..... "

 

 그녀는 침묵에 잠겨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런 그녀의 옆모습을 세밀히 관찰했다. 어차피 며칠 뒤면 모두 지워질 모습이겠지만, 하며 그는 피식 웃었다.

 

 

 

 

 

 

9.닷새전 오전

 

 

 

그는 천천히 빠의 의자에 앉았다. 젊은 바텐더가 그에게 다가왔다.

 

".....롱 아일랜드 아이스티."

 

그는 짧게 주문했다. 바텐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죄송합니다만 손님, 무엇이라고요?"

 

"롱 아일랜드 아이스티."

 

그는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했다.

 

"롱 ..아일랜드 아이스티...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바텐더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넓은 전망창이 있는 전망대 로비에는 사람들이 가득차 있었다. 오랜 여행에 지친 여객들은, 드디어 도착지가 가까와오자 저마다 들떠 로비로 모여든 것 같았다. 처음에는 대부분이 혼자 이 배에 탔었지만, 지금은 어느새 서로를 알게 되었는지 대부분 몇몇이 모여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손님. 그 음료는 레시피가 없는 것 같은데요. 너무 오래된 술이라.... 만드는 법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남자는 어차피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손을 내져었다.

 

"됐소. 그럼 대신..."

 

그는 빠에 놓인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그 때, 그의 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  보드카, 드라이진, 화이트 럼, 그리고 데킬라를 같은 양으로. "

 

그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그의 뒤엔 웨이브진 긴 머리에, 아이보리색 트렌치 코트를 입은 약간 키가 큰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가볍게 미소를 지어보이곤 옆에 앉았다.

 

" 그리고 레몬 쥬스와 콜라를 넣어요.."

 

그녀는 바텐더에게 얘기했다.

 

" 아, 예. 알겠습니다. 만들어 보지요"

 

바텐더는 잊지 않으려는 듯 재료들을 중얼거리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차분해 보이는 하얀 얼굴에 긴 속눈썹. 그가 좋아할 법한 스타일이었다.

 

"놀랍군요. 이 술을 아는 사람조차 흔치 않은데...?"

 

" 예전에 관심이 좀 있었죠.....저도 좋아해서 간혹 만들어 마시곤 했구요."

 

약간 의외의 표정이었지만, 그도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주방을 향해 외쳤다.

 

" 웨이터! 여기 같은걸로 한 잔 더 만들어 주게!"

 

 

 

 

 

 

10. 지금

 

 

 

".....?"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아직 자리에 앉은 채, 그녀의 팔을 잡고 있었다.

 

" 안 나갈거에요?"

 

그녀가 물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 ...내려가지 않겠소?"

 

그의 말에, 그녀는 흠칫 굳었다.

 

" 그냥.... 내려가자는 건가요? "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이 순간에 이런 말을 한다는 게 나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지만.. 뭔가.... 이대로 모든 걸 잊게 되면 안될 것만 같소. 이대로... 당신을 보낼 순 없어요."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당신과 보냈던 지난 며칠동안, 많은 생각을 했소. 난 내 기억을 가진 채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당신에게 털어놓고, 이해받으면서 다른 희망이 생겼소. 어쩌면 기억을 지우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말했다.

 

" ....무엇보다, 당신을, 당신이란 여자를 이대로 보낼 수 없소."

 

그녀는 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밋밋하고 광채가 없는 눈이었다. 그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양 팔을 붙들었다.

 

" 이런 말이 당황스러울 거요. 당신도 당신의 상처를 지우려고 온 거고, 나도 그렇소. 하지만, 단지 기억을 지운다고 행복해지는 것만은 아닐 거요... 어쩌면, 난 비겁한 생각을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소.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난 진심이요.... 만약 아픈 기억에서 벗어나는 것과 당신을 선택하라면, 난 당신을 택할거요.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을, 단지 우연으로 돌리고 영영 잊혀질 수는 없지 않겠소? "

 

그녀는 표정없이, 그에게 양팔을 잡혀 흔들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절박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그녀는 기운이 빠진 듯, 그의 팔에 몸을 의지하며 서 있었다.

 

" 정말인가요? "

 

그녀의 대답에, 그는 그녀의 팔을 꽉 잡고 대답했다.

 

" 물론이요! 지금처럼 확실한 느낌은 없었소... 난 당신을 잊고 싶지 않소!"

 

 말없이, 둘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깊이없이 밋밋했던 그녀의 눈빛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천천히, 눈물이 맺혔다. 그녀의 얼굴이, 어느새 잔잔한 떨림으로 흔들렸다.

 

" 그런데..왜,  그땐 날 떠났죠? "

 

".... ? "

 

 그는 순간 멈추었다.

 

" 날 잊고 싶지 않다면서.... 왜 나를 잊은 거죠? "

 

그녀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뺨을 타고 내려왔다.

 

" 당신은 5년전에 이미 날 한 번 버렸어요.  기억에서 벗어날 수 만 있다면, 나와의 모든 걸 잊어도 할 수 없다며 5년전에 이곳을 찾았었죠.... 모든 걸 잊기 위해."

 

그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져 갔다

 

 "그, 그게 무슨 소리지? 내가 당신을 알고 있다고? 내가 이곳에 온 적이 있다고? "

 

"...그래요. 난 이미 당신의 연인이였죠. 하지만 당신은 악몽으로 끊임없이 괴로워했고, 결국 모든걸 버리고 이곳으로 왔었어요. 내가 그토록 매달려도, 기억과 함께 모든걸 지워버리려 했죠."

 

그의 눈이 점점 커졌다.  머릿속에서 엉키는 생각을 찾아 더듬거리는 듯 했다. 한참만에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말도 안돼.. 난 기억을 지우지 않았소... 아직 악몽에 시달리고 있단.... "

 

" 이곳의 망각은 완벽하지 않아요. 당신은 운 나쁘게도, 군대에서의 사건 이후의 기억만을 상실한 거죠. 전역한 후 3년간...그리고 나와의 모든 기억을,.."

 

 그는 그녀를 잡은 팔을 풀었다. 그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 그럴리가.... 어떻게 그런...."

 

그녀는 천천히 뒷걸음 쳤다.

 

" 지난 5년간, 정말 지워버리고 싶도록 힘들었죠. 그래서 나도 이곳을 찾은 거에요. 하지만, 여기서 이렇게 당신을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리고 나도, 어쩌면 다시 당신과 함께 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요 며칠간, 나도 그런 희망을 품었었죠..."

 

그녀는 '산'의 정상으로 통하는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6개의 태양이, 한 점을 향해 모여들고 있었다. 밖은 이미 강렬한 빛으로 가득했다.

 

" 하지만 아니에요. 당신은 결국 견디지 못하겠죠... 그건 나도 마찬가지에요. 이젠 다, 모두 잊어버리고 싶어요. 당신도, 나도...그리고 무엇보다."

 

문이 열리자, 강한 빛살이 흘러들어왔다. 그는 눈이 부셔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녀의 모습이 빛 속에서, 실루엣처럼 보였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그 빛을 향해 걸어갔다.

 

" .....같은 사람에게서 두번 잊혀지고 싶진 않아요."

 

그녀는 문을 닫았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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