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999년, 인공지능에 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일반인을 대상으로 쓴 설명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이브한 전개나 논리적 비약이 많을 것입니다. 만약 이 글을 통해 인공지능의 진짜 문제들에 대해 관심이 생긴다면, 다른 글들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0.기본 가정들 - 이해를 돕기 위하여. 

 

저는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상적 배경으로 논의를 진행할 것입니다. 

첫째, 세상에 영혼이나 기, 생명력 등의 신비주의적인 요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 그러므로 철저히 유물론적이고 환원적(?)으로 접근합니다. 또한 인간을 다른 동물과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로 보지도 않습니다. 

둘째, 인간의 사고과정을 포함한 모든 현상은, 물리학적인 방법으로 분석(적어도 표현)될 수 있다. - 즉 철저한 인과율에 따른 결정론적 입장입니다. 여기서 양자적 수준의 불확정성효과는 무시합니다. 


셋째, 지능이란 기본적으로 ‘특정 목적을 위한 일반적 문제해결 능력’으로 정의한다. - 즉, 저는 존재할지도 모르는 모든 일반적인 형태의 지능이 아니라, 인간수준, 혹은 그 이하의 현존하는 지능형태에 관해서만 언급할 것입니다. 

 

넷째, 생명체는 진화하였다. - 모든 생명체의 구조와 기능(지능 역시)은 자연적으로 진화되어 발달해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몇몇 부분에서 진화의 흐름을 타고 지능을 추적할 것입니다. 


다섯째, 인간에게 가능한 기능은, 이론적으로는 구현 가능하다. - 우리는 ‘인간’이란 완성품에 대한 reverse engineering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최소한 ‘정답’이 존재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한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1. 이유들 - 어느 세일즈맨의 이유 


장기 둘 줄 아십니까?


장기의 룰이 많죠.. 차는 직선으로 가구, 포는 뛰어넘고, 졸은 앞으로만 전진...등등. 
하지만 그 많은 룰들은 실은 하나의 목적을 위한 겁니다. 즉 왕을 잡기 위한 수단일 뿐이죠. 사실 장기의 모든 말들과 규칙과 작전들은 결국 ‘왕을 잡는다’라는 단일 목표를 위한 수단입 겁니다. - 그런데, 과연 왕을 잡는 게 장기의 목적일까요? 

더 근본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사실 장기의 목적은 ‘이기는 것’이죠. 왕을 잡는 것은 결국 이기기 위한 수단입니다. 물론 장기의 경우에는 ‘왕을 잡는것’이 ‘이기는 것’과 같지만 - 예컨데 바둑의 경우, ‘집을 많이 내는 것’이 목적이지만, 사실 집이 적게 나더라도, 많이 따먹어서 이길 수 있다면, 그게 더 바람직한 방법 아니겠습니까? 집을 많이 내고 지는 것보다, 집이 적게 나더라도 이길 수 있다면, 그게 바둑을 잘 두는 것이지요. 즉, 이기는 것이 게임에서의 룰보다 더 ‘게임의 목적’에 가깝다는 겁니다. 

하지만 사실 장기의 목적은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목적이 있죠. 그것은 바로 ‘즐거워지는것’입니다. - 장기를 비롯한 모든 게임의 목적은 사실 이겁니다. 재미있을라구 하는 거지요. 장기를 기껏 두고 싸워서 기분 나쁘거나, 엄청 지저분한 방법으로 해서 짜증이 난다면, 누가 게임을 하겠습니까? 게임을 통해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 이것이 사실 장기의 근본적인 목적이 되는 셈이죠. 그러니까 그 모든 장기말들의 룰과 전략은, 결국 ‘즐거움’을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조금 더 파고들어볼까요? 그러면 ‘즐거워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더 근본적인 이유가 존재하는 걸까요? - 짐작하셨겠지만, 분명히 이유가 있습니다. 놀이를 하는 것, 즉 유희란 스트레스 해소라든가, 혹은 일상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노는 것도 너무 많이 하면 지겹죠.^^;) 비교적 간단히 말하자면 승부욕, 자기능력의 발휘, 일상의 스트레스 해소, 혹은 인간관계의 유지등 여러 가지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놀이를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이유들도 또 이유가 있을테지요... 예컨데 승부욕같은 것은 무엇을 위한 걸까요? - 그것은 아마도 오랜 진화의 역사를 통해 필연적으로 습득하게 된 욕구일 겁니다. 인간은, 특히 남성은 늘 식구나 부족을 위해서 먹이를 구하고 안전을 지키는게 역할이었죠. 그러므로 그러한 능력이 보다 강한 남자가 더 인정받고, 선호되고, 남들보다 권력을 갖거나 예쁜 여자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경쟁을 하게 되는 거지요. 그러한 경쟁심리가 승부욕이라는 형태로 발전한 것입니다. 뭐, 쉽게 추측이 가는 과정이지요. - 하지만 우리의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남들보다 우월해지려고 하는가? 

인간이 남보다 우월해지려는 이유는 재미있게도 ‘자식을 많이 퍼뜨리기 위해서’입니다. - 사실 인간의 모든 행위를 분석해보면 대부분 이 이유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볼까요? 셀러리맨이 영어학원을 다니는 이유는? -> 영어실력을 높이기 위해서 -> 직장영어시험에 패스하려고 -> 직장에서 안 짤릴려고 -> 월급을 계속 받으려고 -> 생계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 가족들 먹여 살릴려고 - > 보십시오, 결국 애 키울려고 영어학원 다니는 건데,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즉 자식을 많이 퍼뜨리려는 노력이지요. 다른 행동들도 비슷하게 해석되어 질 수 있어요. 

그냥 우스개 소리처럼 설명했지만, 이 이론은 결코 농담이 아닙니다. 동물행동학이나 이기적인 유전자 설, 친족 선택설등 현재 학계에서 정설로 인정되고 있는 내용이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의 행동은 결국 ‘자손을 더 퍼뜨리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해석되어집니다. 사실 그것이 생명의 기본 원리이자 존재이유이고, 우리의 인공지능구현을 위한 긴 논의도 바로 이 사실을 바탕으로 시작됩니다.

 

2.이기적인 유전자 - 우리는 유전자의 복제를 위한 생존기계이다.


리차드 도킨스의 명저 ‘이기적인 유전자’는 이미 고전이 되어 버렸죠. 그는 그 책을 통해 생명의 원인과 전략을 명확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논의를 위해, 혹은 교양으로도 반드시 필요한 내용이니 설명하겠습니다. 

앞 절에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의 목적은, (즉 삶의 이유는) ‘자신의 자손을 번식시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 과연 왜 그럴까요? 그리고 단지 그것이 생명의 이유일까요? 

태초를 생각해봅시다. 아주 오래 전, 지구상에 생물체가 없었을 때를 말이죠. 아마도 추측컨데, 지옥같은 풍경 속에서 짙은 독성 대기와 바다, 그리고 격렬한 지각운동을 하는 대륙이 존재하겠죠. 아시다시피, 많은 종류의 단순한 화합물들이 우주복사선이나 번개 등을 통해서 저절로 합성됩니다. 암모니아같은 간단한 것에서부터, 아미노산이나 핵산 같은 것까지 생기기도 하지요. 아무튼 다양하고 많은 분자들이 서로 뒤엉켜 반응하고, 결합하고, 분해되는 거대한 용광로였을 겁니다. 그 중에는 다양한 성질을 가진 분자들이 있겠죠. 서로 결합하려는 놈이라든가, 다른 분자결합을 깨는 놈이라든가, 혹은 태양의 빛을 받아서 분자구조를 변화시키는 놈.... 뭐 별의별 놈들이 다 있겠죠. 


그런데 그 중에 하나, ‘자신과 똑같은 화합물을 복제해내는’ 능력을 가진 화합물이 있다고 칩시다. 아마 뭐 도장처럼 요철이 딱 대칭적으로 들어맞게 생겼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암튼 이놈이 가진 능력은 다른 수만가지 능력과는 뭔가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구요? 바로 ‘불멸’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화합물들은 생기고 없어지고를 반복하면서 그냥 그렇게 존재하지만, 이 ‘복제자’의 수는 계속 늘어나는 겁니다. 즉, 자신의 존재비율이 전체중에서 계속 늘어나는 거죠. 다른 것들은 어떠한 특이한 기능을 가졌어도 그놈만 깨어지면 흔적도 없이 스러지지만, 이놈은 본질적인 특성상, 스스로를 복제하는 것이 성질이기 때문에 세월이 흐를수록 오히려 숫자가 늘어나는 겁니다. - 이것은 아주 강력한 기능입니다. 결국은 거의 대부분을 이 '복제자’가 차지하게 되겠죠. 

그런데 아마도 복제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종류의 ‘오류’가 발생할 겁니다. 일부가 제대로 복제가 안됐다거나, 자외선에 의해 좀 망가졌다거나, 혹은 복제자들끼리 서로 붙어서 안 떨어진다거나 등등의 이유로요. 그러면 대부분의 경우에는 다 기능을 잃고서 스러져버리겠지만, 그 중에 우연히 극소수의 어떤 변종들은 오히려 더 잘 복제하는 놈이 생길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이젠 ‘신복제자’가 대세를 장악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점차 다양한 종류의 복제자가 나오게 됩니다. 어떤 놈은 다른 복제자를 깨서 자신을 복제하는 놈도 생기구, 한번에 두 개씩 복제하는 놈도 생기구... 암튼 잣대는 오직 하납니다.- 다른 놈들보다 더 잘 복제하는 놈이 더 번창하는 겁니다. 여기서 복제자들이 무슨 의도나 생각을 하는 건 결코 아니죠 - 그냥 단순히 복제만 하고, 더 효율적인 것이 더 잘 늘어나는 것일 뿐인데도, 그들은 마치 경쟁을 하고 전략적인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들의 ‘우연적인 경쟁’은 점점 치열해져서, 아예 복제와는 별도로 자신의 ‘보디가드’를 만들어내는 복제자까지 생겼습니다. 이놈은 보디가드를 만들어서 자신은 그 속에 쏙 숨죠. 마치 마징가에 탄 쇠돌이처럼. 그리고 그 안에서 안전하게 지내다가 적당한 때 자신을 복제해서 내보내는 겁니다. 그러면 그 복제자는 또 자신의 보디가드를 만들게 되는 거죠. 

이 방법은 아주 효과가 좋아서, 많은 복제자들이 이 방식을 채택하게 되었습니다.(채택하였다기 보다는 그런 놈들만 남게 된거죠) 다들 이제 타고 다닐 로봇을 만들기에 정신이 없어졌죠. 그러다보니 ‘누가 더 성능 좋은 로봇을 만드는가’가 관건이 되었습니다. 더 복제자를 잘 보호하고, 더 많이 복제할 여건을 능동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로봇을 만들게 된 거죠. 

어떤 복제자는 빠르게 움직이는 로봇을 만들었습니다. 어떤 복제자는 단단한 껍질의 로봇을 만들어 보호하고, 앞에는 강력한 무기를 달아서 다른 복제자의 로봇을 파괴했습니다. 다른 복제자들이 파괴되는 것이, 자신을 복제하는데 유리하니까요. 그러다보니, 파괴로봇이 오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이를 감지하는 센서를 부착한 로봇도 나왔습니다. 소리, 빛, 진동....점점 다양하고 고도의 로봇들이 등장하게 된거죠. 어떤 로봇은 육지로 올라올 수도 있었고, 어떤 로봇은 나무를 타고 다니기도 합니다. 어떤 로봇은 하늘을 날아다니기도 하지요. - 하지만 이 모든 로봇들은 결국 복제자의 복제를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걸 잊어선 안됩니다. 단순한 화합물에 불과했던 복제자들은 엄청난 하인을 부리게 된 것입니다. 

점점 복잡하고 정교한 로봇들이 등장하면서, 로봇의 ‘행동패턴’이 점점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파괴자 로봇’을 발견하면 바로 운동기관이 움직여서 다른 곳으로 피한다던가, 하는 행동패턴 말이죠. 즉 <센서로부터 온 신호를 적절하게 운동기관에 적용시키는 방법>이 경쟁의 관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우연’이란 방식을 통해서, 복제자들은 로봇의 센서와 운동기관 사이에 복잡하고 정교한 회로를 만들어나갔습니다. 그래서 주위의 상황을 감지하고 보다 적절한 행동을 하는 로봇들만 살아남게 되었죠. 그러다보니 로봇이 ‘메모리’를 가져야 유리했습니다. 예컨데, ‘부릉부릉’하는 소리는 ‘파괴자로봇’의 소리다, 하는 식으로 기억하는 것이 더 유리했거든요. 그런 기억들은 다른 기억들과 연결되어 ‘예측’을 하게 되었습니다. 로봇이 앞으로 가면 눈 앞의 물체가 시야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라는 예측, 저 온순한 로봇은 잠시 후엔 왼쪽으로 이동할 것이라는 예측 등등 말이죠. - 그러한 예측과 기억은 점점 정교화되면서, 마침내 복잡한 추리를 하게 되고, 다양한 사물들은 분류하고, 분석하고, 추측하는 능력까지 갖게 되었던 겁니다. 

그 중에서 가장 정교한 로봇이 있었습니다. 이 로봇은 매우 복잡한 능력을 가졌고, 같은 복제자의 같은 동료 로봇끼리 의사소통을 통해 집단적 전략까지 구사할 수 있었으므로, 단연 최고의 복제자-로봇으로 부상했죠. 근데 이 로봇이 워낙 능력이 뛰어나지다 보니까, 단순히 추리와 기억을 넘어서, 의문을 갖거나 탐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것은 무엇일까, 왜 저런 일이 벌어질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는 무엇일까.... 아, 우리의 불쌍한 로봇이 드디어 ‘자신’을 깨달은 겁니다. 이미 로봇들은 엄청나게 방대하고 복잡해져서, 깊숙한 곳에 숨은 복제자는 보이지도 않았죠. 로봇은 열심히 복제자를 보호하고 번식시키지만, 정작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모르고 있는 겁니다. 괴로운 비극의 시작이었죠. 

그 로봇은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물 속에서 돌아다니는 로봇을 ‘물고기’로, 나무 위를 돌아다니는 로봇을 ‘원숭이’로, 하늘을 날아 다니는 로봇을 ‘새’로, 그리고 자기와 같은 로봇들을 ‘인간’이라고 불렀습니다. 
복제자들은 인간의 깊숙한 곳에 숨어 있다가, 때가 되면 자신을 복제하여 로봇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인간은 그것을 ‘섹스’라고 불렀지요. 복제된 복제자는 다시 안전하게 다른 로봇안에서, 자신을 보호할 새 로봇(아기)을 만듭니다. - 인간이 지속적으로 그 행동을 하게 하기 위해서 복제자는 인간에게 ‘섹스를 좋아하도록’ 설정했지요. 그러나 불쌍한 인간들은 섹스를 하면서도, 왜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하는지, 왜 섹스가 좋은지, 왜 아기가 사랑스러운지(아기를 좋아하도록 복제자가 다 프로그램해 놓았지요)를 몰랐습니다. - 최근까지는요. 

- 이것이 ‘이기적인 유전자’의 개략적인 내용입니다. 아니, 어쩌면 지구의 생물들의 진화의 역사라고 볼 수 있겠지요. 
우리는 인생의 주인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체는 단지 유전자라는 복제자의 ‘생존기계’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모든 신체와 능력과 지능은, 오직 하나의 이유, ‘유전자를 퍼트려라’라는 목적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지요. 즉, ‘닭은 또 하나의 달걀을 만들기 위한 달걀 자신의 수단’에 불과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인 유전자는 영원합니다. 자손의 번식을 통해서 끝없이 불멸을 누리지요. 마치 자동차를 옮겨 타듯이 - 그들은 계속 새로운 생존기계로 옮겨 타면서 영생을 누립니다. 아무런 의식도, 지능도 없는 화학물질이 말이지요. 

이 이야기는 학설의 수준을 넘어선 ‘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제 왜 인간의 모든 행동이 자손을 번식시키기 위해서인지 이해가 가실 겁니다. 또한 이러한 역사적인 이해가 있어야, 왜 지능이란 것이 탄생했는지, 어떤 과정으로 탄생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이는 인공지능을 구현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중요한 질문에 봉착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것이죠.

 

<지능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번식’을 하고자 하는 욕구가 필요한 것인가?> 

지능이 번식을 위한 도구라면, 과연 원인 없이 결과만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인공지능을 만들려고 덤비기 전에, 우선 이 질문에 어느 정도 대답을 해야만 할 것입니다. 지능은 과연 생명의 기본원리인 ‘복제’와 독립적인가, 하는 문제인 셈이죠.

 

3. 감각계 - 박쥐는 소리로 세상을 본다

 

유명한 소설 ‘사람의 아들’은 아하스 페르츠라는 신을 찾아가는 청년의 얘기를 그린 이문열씨의 작품입니다. - 주인공은 진리를 찾기 위해 세상을 헤메다가, 어느날 우연히 한 동네에서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을 듣게 되죠.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마을 어귀의 나무 밑에 사람들이 모여 토론을 벌였습니다. 토론의 주제는 ‘해는 어디에서 떠서 어디로 지는가?’하는 것이었지요. 한 나무꾼은 말하기를, “해는 산에서 떠서 계곡속으로 진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선원이, “아냐, 해는 바다에서 떠서 바다로 진다구.” 그러자 다리불구로 평생 동네 밖을 못 나가본 소년이 “아니, 해는 건물사이에서 떠서 건물들 사이로 져요.”라고 주장했습니다. 해에 대한 논의는 또한 ‘해는 아침에 가장 가까운가, 점심때 가장 가까운가’로 이어졌습니다. 한 청년이 “점심때 해가 가장 뜨거우니, 가장 가까운 것이 틀림없다.”고 말하자, 다른 노인이 “점심의 해는 손톱만한데, 아침의 해는 쟁반만하게 보이니 아침에 가장 가까운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듣고 있자니 다들 그럴듯한 이유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해는 무엇인가’로 논의가 이어졌습니다. 한 사람이 “해는 거대한 불덩어리다.”라고 말했고, 다른 사람은 “아니다, 해는 빛이 모인 것이다.”라고 했으며, 어떤 사람은 “해는 위대한 라몬신의 얼굴이다.”라고 주장했지요. - 한창 토론이 뜨거워지는데, 한 장님노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들 틀렸소, 해는 없소.” 

이 황당한 말에 다들 의아해하며 해명을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말했죠. 
“나도 눈이 보였을 때는 해는 빛이며 신의 얼굴이라 생각했소. 하지만 이렇게 눈이 멀고 나니 나에게 해란 단지 ‘따스함’일 뿐이오. 만약 따스함조차 느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는 해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오. 그러니 해는 그가 가진 감각계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오. 지렁이에게 해는 단지 미약한 따스함일 것이고, 핏빛 각막을 가진 생물에게는 흐릿한 보랏빛 원일 것이고, 만약 우리보다 월등한 다른 감각기관을 가진 생물에게는 해란 전혀 다른 그 무엇일지도 모르오. 그러니 아무도 해의 실체를 알수는 없소. 그러니 해는 없는 것이오.” 
사람들은 알듯말듯했으나, 적어도 명백한 모순점만은 찾을 수 있었죠. 
"당신, 눈만 먼 게 아니라 정신까지 돌았구려. 그럼 하늘의 저것은 뭐란 말이요?” 
사람들은 그 말에 웃어댔으나, 듣고 있던 아하스 페르츠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정확하진 않을지 몰라도 뭐 비슷한 내용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중요한 내용이죠.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정말로 세상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감각계에 의해서 ‘변형되고 걸러진’정보만을 (그것도 일부만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대상’의 정보 일부분만을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감각계가 하는 일이죠. 우리는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맡고, 만집니다. 즉 일정영역의 전자기파와, 일정영역의 음파와, 특정 몇 가지 액상 화합물과, 상당수의 기체상 화합물과, 일정세기이상의 물리적인 충격을 감지하는 센서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지요. - 하지만 그것조차 왜곡된 것이죠. 지금 눈앞에 빨간 사과가 있다고 칩시다. 사과는 특정 영역의 스펙트럼을 반사할 겁니다. 그러면 그것이 공기중에서 산란되고, 우리의 각막과 수정체, 유리체를 통과하면서 흡수되고 산란되고, 약해집니다. 그리고 우리의 각막에 닿으면서, 수용체 자체의 보랏빛 색깔 때문에 스펙트럼은 또 왜곡됩니다. 암튼 그렇게 해서 결국 닿은 것이 우리가 빨간색이라고 부르는 스펙트럼이지요. 하지만 그게 처음에 사과에서 출발한 스펙트럼은 아닙니다. 서울에서 닭을 보냈더니 부산에선 오리가 도착한 셈인데,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해서 전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사실 쓸 필요도 없구요. 


장님 뿐인 나라에선 사과란 둥근 모양과 맛, 느낌, 부딪힐 때의 소리 - 뭐 이런 이미지들로 되어 있겠지요. 그들은 색깔이란 것을 상상조차 못할 겁니다. 장님나라에 가서 내가 ‘흠, 오른쪽 사과는 좀 납작한걸’하고 만져보지도 않고 얘길 한다면, 그들은 사과를 만져 보고 나서 경악할 겁니다. “아니, 어떻게 그걸 알 수 있지?”하고 말이죠. 난 간단히 대답합니다. “어떻게 아냐구? 보이잖아?” 나는 단지 사과가 나에게 주고있는 수많은 정보 중에서 조금 더 포착했을 뿐인데 말이죠. - 입장을 바꾸어서, 어느 외계인이 오더니, “오른쪽 사과는 어제 열 일곱 명이 만졌었군”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경악할 겁니다. “아니 그런걸 어떻게 알지?” 그랬더니 외계인이 왜 그런걸 모르느냐는 듯이 반문할지도 모르죠. “어떻게 아냐구? 꾸라리잖아?” 


- 도대체 ‘꾸라린다’라는 감각이 어떤 건지 저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적어도 확실한 것은 우리는 세계가 주고있는 정보를 다 포착하지도 못하고, 또한 왜곡된 형태로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정보들을 다 받아들일 수도, 그럴 필요도 없지요.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정보를 이용하여, 잘 살아가면 되는 겁니다. 둥글고 단단하고 빨갛고 맛있는 저것이 사과의 ‘본질’은 아닐지 몰라도, 우리는 ‘그것’에게 그런 이미지를 부여하고, 다른 사람들도 다들 비슷하게 ‘그것’을 감지하고 느낄 것이라는 가정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둥글다, 단단하다, 빨갛다, 맛있다 - 이러한 이미지란 결코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피부세포의 진동이나 혀의 세포의 화학반응을 이용하여 우리가 내적으로 ‘창조해낸’ 이미지이지요. 모양도, 색깔도 마찬가집니다. ; <객체>가 있고, 그 객체는 세상을 향해 ‘정보’를 뿌립니다. 그러면 <지능체>는 그 정보를 자신이 가진 감각계로 받아들이고 처리하여, 자신이 사용하기에 적절한 형태의 ‘이미지’(색,형태,소리 등등)를 내적으로 ‘생성’해냅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내부 안에 세계를 만드는 거지요. 그리고는 그 객체가 준 위치정보를 통해, 공간상에 적절한 위치에 ‘자신이 그 객체에게 만들어준 이미지’를 생성시킵니다. - 그러면 그것이 바로 ‘세계’가 되는 것이죠. 세계는 결코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존재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계상’을 형성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독립적인 ‘외부세계의 실체‘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저 주어진 정보를 이용하여 적절한 세계상을 형성하여 그 안에서 살아가는 거지요. 그렇다면 사람과 개구리의 세계상은 같을까요? - 같을 리가 없지요! 이 빨간 사과를 개구리는 전혀 다른 그 무엇으로 느낄 것이고, 이 모든 세계가, 어쩌면 시간과 공간조차도 개구리에겐 다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계상을 형성함에 있어서 특정한 감각계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이 살아가기에 충분할 정도의 세계상을 형성한다면, 그것으로 그에겐 충분히 ‘정상적인 세계’이니까요. 예를 들어 박쥐는 초음파를 반사시켜 사물의 위치를 파악하는데, 우리가 ‘박쥐는 소리로만 날아다닐려니 피곤하겠군. 눈으로 보는 게 더 낫지 않을까.’하고 동정할 필요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박쥐는 소리를 통해서 우리가 눈으로 보듯이 세상을 ‘보고’있으니까요. 박쥐는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청각적 이미지로 구성된 장면을 보면서 날아 다니는 것입니다. 즉, 다른 감각계는 다른 세계상을 제공하게 됩니다. 

- 그런데, 과연 이글을 읽는 당신과 나는 같은 세계상을 가지고 있을까요? 쉽게 말해서, 이 빨간 사과를 당신이나 나나 둘다 ‘빨간색 사과’라는 데는 이의가 없지만, 어쩌면 나는 당신이 ‘초록색’이라고 부르는 색으로 이 사과를 느끼고 있지만, 나는 늘 그것을 ‘빨간색’이라고 불러왔기 때문에, 서로 빨간사과라고 동의하는게 아닐까요? 아니 어쩌면 나는 당신의 빨간색이라고 하는 목소리조차, 당신이 느끼기에 고양이 울음소리 같다고 느끼는 소리로 듣고 있는데, 나는 처음부터 원래 인간의 말소리란 그런 것으로 알고 살아왔고, 또한 별 문제없이 그 뜻을 해석해내기 때문에 아무문제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닐까요? - 혹시 형태는? 맛은? 당신은 내가 썩은 맛이라고 느끼는 맛을 사과로부터 느끼면서, ‘맛있다’고 느끼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안구를 이식해보면 되지 않겠는가’하는 대답은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눈은 정보를 수집하는 센서에 불과하니까요. - 우리가 세계상을 형성하는 이미지는 모두 뇌에서 만들어집니다. 그렇다면 뇌를 바꿔치기 한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아무 것도 달라지는 게 없겠지요. 

말도 안되는 소리같지만, 사실상 우리가 같은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각자의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 즉 ‘세계상’이 같으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내가 이러니까 남들도 이러려니’하고 추측하는 것 뿐이죠. 그리고, 그런 차이가 어쨌든 별 충돌을 일으키지 않으니까 관심을 안 둘 뿐이지요. 하지만 실제로 이런 건 있잖습니까? 눈이 날카로운 이승 엽 선수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공도 보고, 위대한 미술가는 남들이 못보는 작가의 역량을 작품에서 찾아내고, 에스키모에게는 눈이 33가지로 쉽게 구별이 된다지요....도시에서 자란 아이들은 수직/수평선에 시각피질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천막생활을 하는 몽고의 아이들은 사선에 더 민감하답니다. - 모르긴 해도, 아마 사람들의 세계상은 분명 천차만별일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학습과 성장과정을 통해서 역동적으로 변화합니다. 

즉, 감각계가 달라지면, 세계상이 달라진다 - 그렇다면 당연히 세상을 느끼는 것도, 혹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도, 반응하는 방식도 달라지겠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인공지능구현을 위한 두 번째 질문에 맞닥트리게 됩니다. 


<인간과 같은 인공지능을 위해선 인간수준의 감각계를 구현해야 하는가?> 


이 질문 역시 매우 중요하고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인간에겐 대략 30가지가 넘는 감각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어디까지 모방할 수 있는지, 혹은 어느정도까지가 필요한지를 결정하는 것은 선결되어야 할 문제겠지요.

 

 

4. 복잡성 - “보통사람들이 분수의 신비를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옛날 중세의 어느 수학자가 자신의 노트에 쓴 말입니다. 
그는 최초로 분수(1/2, 3/4같은 것들)를 생각해 내었는데, 그 오묘하고 고차원적인 개념에 감탄하면서, “보통 사람들이 분수의 신비를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라고 말했지요. - 흠, 그러나 지금은 초등학교 3학년 때 배우던가요? 그 수학자가 이걸 알면 기절 초풍하겠지만요. 

그러면 요즘 아이들이 옛날 사람보다 똑똑해진걸까요? 그래서 그 어려운 분수도 척척 해내는 걸까요? - 진화적으로 보기에 사람의 두뇌가 몇 백년만에 그렇게 변화할 리는 없지요. 그럼 어떻게 된 걸까요?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하도 멍청해서, 사람들이 ‘3 이상’은 못 센답니다. 손가락으로 대충 표시하는데, 하나,둘,셋....많다! 뭐 이런식 이래요. 글자는 물론 모르고... 똑같은 인간인데 그들은 왜 그럴까요? 인종이 원래 멍청해서 그럴까요? - 만약 그런 부족의 어린아기를 문명세계에 데려와서 기른다면, 그 아이는 정상적인 지성인으로 자랄 수 있습니다. 숫자도 잘 세고 미적분도 하고, 철학도 연구할 수 있지요. 그런데 그런 아이가 왜 미개세계에서 살면 세 개 이상이면 셈을 포기하게 될까요? 

그 차이는 그 아이가 접하는 세상의 ‘복잡성’에 있습니다. 인간은, 아니 모든 동물은 자신에게 요구되는 만큼의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 거지요. 그것은 두 가지 요인으로 분석할 수 있는데, 첫째는 그 개체가 가진 감각계의 복잡성이고, 둘째는 그 개체의 주변환경의 복잡성입니다. 

더 다양하고 정교한 감각계는 더 다양하고 세련된 반응을 유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개구리가 지렁이보다 더 지능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은, 더 다양한 정보는 당연히 보다 구체적이고 정교한 예측과 분석을 가능하게 하니까요. -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닙니다. 지능의 많은 부분이 ‘내부’가 아닌 ‘외부’에도 존재합니다. 즉, 그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복잡성에 의해서 영향을 받게 됩니다. 

생존을 위해서 세상에서 요구하는 만큼, 각 개체는 자신을 적응시켜 나갑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세상에선 보다 복잡하고 지능적인 전략이, 단순하고 쉬운 세상에선 단순하고 저급한 전략이 필요하니까요. 생각해 보세요, 만약 세상이 온통 밋밋한 흰색 벽뿐이고, 먹을 것은 얼마든지 널려있으며, 아무런 적이나 장애도 없다면, - 그런 세상에 사는 생물에게 지능이란게 필요할까요? 아마 꿈틀거릴 몸뚱이와 입만 있으면 충분할 겁니다. 감각계라고는 배부름을 느낄 정도면 충분하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복잡한 생활과 사회, 문화는 고도의 지능을 생성시킵니다. 인류가 석기시대나 지금이나 진화적인 차이는 거의 없지만, 언어를 발명함에 따라, 배우고 익혀야 할 것들이 엄청나게 많아졌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지능을 갖게 된 거지요. 뭐랄까, 뇌끼리도 경쟁이 붙었다고나 할까요... 


그러므로 고차적 지능의 구현을 위해서는 다양하고 풍부한 감각계와 더불어서, 충분히 복잡하고 풍성한 주위 환경이 필요합니다. 갓난아기의 침대 위에 흔들거리는 모빌을 달아놓는 것이 아이의 지능 발달에 좋은 이유도 그런 것이지요. - 계속 아이에게 관찰하고 신경 쓸 정보를 제공하게 되니까요. 



이러한 주변환경의 복잡성을 무시했기 때문에, 컴퓨터 내에서 가상환경을 통하여 진화를 시도하는 인공생명의 연구가 진척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전자와 진화이론, 신경망까지 동원하여 인공생명체를 코딩했지만, 지능에 요구되는 복잡한 환경과 다양한 변화들을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인공생명의 가상 생태계는 오직 설계자가 설계한 수준의 복잡성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것은 실생활의 복잡성과는 비교가 되지 않지요. cog 로 유명한 MIT의 로드니 브룩스는, “일상생활의 복잡성을 무시한 체, 모든 걸 단순화시키려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반드시 하드웨어적인 구현이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이지요. 우리가 실세계를 이해하고 반응할 지능을 원한다면, 반드시 실세계의 복잡성을 제공해줘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기 위해선 반드시 몸체body가 필요한 것이지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문제가 존재합니다. 일상세계의 복잡성이라고는 하지만, 예컨데 우리가 공기중의 아르곤농도 따위에 신경쓰지는 않습니다. 암석속의 규소의 결정구조에 의해서 우리의 정신이 발달한 것도 아니지요 - 요는,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중요하고 민감한 복잡성’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와 관계가 없는 것들은 아무리 복잡하고 풍부해 봤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기린에게 얼룩말은 관심 없듯이 말이죠. 
토끼에게 중요한 복잡성은, 풀의 위치와 맛, 시간에 따른 온도의 변화, 여우의 행동패턴, 근처의 지형, 덫의 고통...뭐 이런 것들입니다. 즉, 자신의 ‘유기적 생태환경’ 대부분이 토끼의 복잡한 환경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만들 인공지능 로봇에게 줄 수 있는 복잡한 환경은 무엇일까요? 


로봇이 뭘 먹지는 않을 테니 풀이나 토끼 같은 건 관심 없을 테고... 여우가 금속을 먹지도 않을 테니 여우도 관심 밖이고... 온도야 높던 말던, 습도야 어떻던, 지형이 어떻던 우리의 로봇에게 자극으로 작용할 환경을 찾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기껏해야 220V 콘센트의 위치정도가 아닐까요? -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자연환경과 조화할 만한 유기화합물을 이용한 하드웨어를 구현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현재 금속과 플라스틱을 이용하여 구현할 수 있을 뿐인데, 그것들과 주변의 유기환경과는 상호작용이 없기 때문이지요. 진정한 실세계를 로봇에게 제공하기 위해서는 로봇이 풀과 고기를 먹고, 호흡하고, 단백질을 생성하는 둥, 유기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어우러지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 그러나 사실 그 정도면 지금의 생물체와 다를 게 하나 없지요.... 그럴 기술도 없을뿐더러! 

그렇기 때문에 로봇에게 지능을 부여하고 학습시킴에 있어서 세 번째의 질문에 봉착하게 됩니다. 


<우리가 로봇에게 제공할 수 있는 충분한 환경과 학급방법을 구현할 수 있는가?> 


기본적으로, 만화에서처럼 인공지능 로봇을 만들고, 스위치를 탁 올렸더니 슬슬 일어나서 말을 하고 시키는 데로 움직이고 하진 않습니다. 만들고 나서부터 기나긴 학습의 기간이 필요하지요. 그 과정에서 우리가 제공하는 환경과 학습방법에 의해서, 로봇이 셋 이상은 못 세는 바보가 되느냐, 혹은 철학박사가 되느냐가 달렸습니다. - 지능은 사실상, 객체의 내부가 아닌 외부에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5. 채찍과 당근 - “행복은 고통의 그림자이다 - 쇼팬하우어”

 

퍽이나 오래도 살았던 염세주의자인 쇼팬하우어는, 세상이란 근본적으로 고통이고 비극이기 때문에 삶은 고통스럽다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늘 세상은 고통과 행복이 있고 기쁨과 슬픔이 있어서 그 둘 사이를 저울처럼 흔들리며 살아가지만, 실은 존재하는 것은 고통뿐이고, 행복은 고통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고통은 실재합니다. 배고픈 고통, 맞아서 아픈 고통, 목마른 고통, 금욕의 고통, 피곤한 고통... 그리고 그에 대응되는 행복들도 있지요. - 맛있는 쾌락, 몸이 건강한 기쁨, 섹스의 쾌락, 편안함의 쾌락 등등... 쇼팬하우어는 여기에 의문을 던집니다. 과연 그러한 쾌락이 고통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하고 말이죠. 
여기 개 한 마리가 있다고 칩시다. 우리가 이 개에게 고통을 주기란 매우 쉽습니다. 그저 발로 옆구리를 한방 차주면 되지요. - 우리는 원한다면 원하는 만큼 계속 개에게 고통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계속 때리거나, 밥을 안주거나 뭐 등등의 방법으로요. 죽지만 않는다면 말이죠. 
하지만 우리가 그 개에게 행복을 줄 수 있을까요? 만약 개가 굶주려 있다면, 우리는 개에게 먹이를 줌으로써 ‘굶주림의 고통에서부터 해방시켜’주는 방식으로 행복을 줄 수 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개가 배고프지 않다면, 우리가 개에게 고통을 줬듯이 원하는 만큼 ‘행복’을 줄 수 있을까요? 

소금밭에서 괴로워하는 지렁이를 꺼내줌으로써 ‘아픔에서 벗어나는 행복’을 줄 수는 있지만, 별 문제가 없는 지렁이라면 우리는 어떤 행복도 줄 수 없습니다. -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고통은 실체요, 행복은 그림자라고 한 겁니다. 우리는 고통이 마이너스고 행복이 플러스로서 작용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마이너스인 고통만이 존재하고, 그 마이너스를 제로로 돌려놓는 과정이 ‘행복’인 것이지요. 즉, 고통을 전제로 하지 않는 행복은 없다는 말입니다. 
배부름과 맛있음의 기쁨은 배고픔을 전제로 하고, 편안함은 피곤함을 전제로, 섹스는 욕구불만의 고통을 전제로 합니다. 군대에서 고생하다가 휴가 나오면 고생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행복하듯이, 잔인하게도 신은 우리에게 적극적인 고통과, 소극적인 쾌락을 준 것이지요.- 고통을 먼저 주고, 그 고통에서부터 벗어나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행복입니다. 

그런데 쇼팬하우어에게는 안타깝게도, 적극적이고 실체적인 쾌락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한 신경과학자와 그의 쾌락주의자 쥐에게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는 쥐의 뇌의 여러부위를 전기자극하고 반응을 살피기도 하였지요. 그런데 어느날 우연히 쥐의 뇌에 전극을 심어놓고는 관찰하였는데, 특이한 사실을 관찰하였습니다. 쥐가 우리에 설치된 레바를 누르면 뇌의 전극에 전기자극이 주어졌는데, 이놈이 레바를 건드려서 전기자극을 맛보더니, 이윽고 돌아와 다시 한번 눌러보곤, 도대체 어떤 황홀한 쾌락을 맛보여주는지 지칠 때 까지 수천 번을 계속해서 레바를 눌러대는 것입니다. 이에 놀란 박사는 전극으로 자극된 부위를 ‘쾌락중추’라고 명명하였죠. 
그러한 것이 사람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이 밝혀졌는데, 변연계의 특정부위를 자극하거나, 혹은 약물등을 통하여 사람에게 인위적으로 행복한 감정을 유도할 수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마약같은 것이, 인간에게 쉽게 행복을 제공하죠. 

인간은, 아니 모든 동물들은 그들의 주인인 유전자를 복제하겠다는 지상목표아래, 다양한 전략과 평가방식으로 세상을 재며 살아가는데, 그 기본적이고 공통적인 잣대는 두 가지입니다. - 바로 ‘고통’과 ‘쾌락’이지요. 고통은 최대한 피하고, 쾌락은 최대한 추구하여라 - 이것이 유전자가 자신을 더 퍼뜨리고 보호하기 위해서 생존기계에게 부여한 규칙입니다. 다만 고통이란 ‘유전자를 퍼뜨리는데 해로운’ 것이고, 쾌락은 ‘유전자를 퍼뜨리는데 유리한’ 것들이라는 교묘한 설정이 있지만요. 

그렇기 때문에 개체가 죽거나 위험해지는 것, 성행위를 못하는 것, 경쟁에서 뒤쳐지는 것등은 고통이 되고, 개체가 건강하고 활동적인 것, 생행위, 자식을 돌보는 것,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 등은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철저하고도 치사한 유전자의 농간인 셈이지요. 그렇다면 인간은 이러한 기쁨과 쾌락을 어떤 식으로 조작할 까요? 

기본적으로 인간의 행동은 조건반사를 일으킵니다. 어떠한 상황 - 사과를 따서 입안에 넣었다 - 라는 것은 혈당량을 높히고 개체의 건강에 도움을 주므로 ‘행복’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사과를 먹는 것 = 좋은 것 이라는 조건반사를 형성하지요. 그런 식으로 엄마, 먹는 것, 따뜻함, 이성, 돈, 토크쇼 등등은 ‘좋은 것’이라는 개념을 형성하고, 맛없는 음식, 물리적 충격, 뜨거운 물, 못생긴 이성, 빈 지갑, 해고 통지서등은 ‘나쁜 것’이라는 개념을 형성합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신경망에 의한 조건반사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좋은 것에 대해선 그 상황을 강화하고 반복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고, 나쁜 것에 대해선 그런 상황을 피하고 예방하려는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엔돌핀과 같은 내뇌마약 성분은 기쁨을 주고, 아세틸콜린과 같은 어떤 물질은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는 고통과 쾌락이라는 채찍과 당근에 의해서 조종되어지는 정교한 조건반사 기계인 셈이지요. 
이러한 사실은 지능로봇을 구현함에 있어서 하나의 돌파구가 될 수 있습니다. 로봇에게 번식의 욕구를 넣어주기보다는, 그보다 한 단계 위인 ‘고통과 쾌락’을 제어함으로써 로봇의 기본적인 동기를 제어할 수 있는 것이죠. 예컨데,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에 쾌락을 느끼게 하고, 그렇지 않은 일에 고통을 느끼도록 설정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실제적인 면을 들여다 보면 이러한 작업이 만만치 않음을 깨닫게 되는데, 도대체 


< 로봇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고통과 쾌락을 부여할 것인가? > 


하는 문제입니다. 이 네 번째 질문은 점점 실제적인 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셈이지요. 이는 로봇에게 가장 기본적인 행동지침과 동기부여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하지만 - 내부 코드에 세팅된 ‘고통변수’의 수치가 올라간다고 해서, 로봇이 정말로 ‘고통스러워’하고, 수치가 올라가는 걸 ‘싫어하게’될까요?

 

6. 기억 - 저장하지 말고 만들어라!

 

예컨데, ‘이러이러한 상황은 쾌락지수를 10 올리니까’ 가능하면 반복하고, ‘저러저러한 행동은 고통지수를 8 올리니까’ 회피하도록 해라, 라고 코딩을 해 놓으면 될까요? ...글쎄요, 얼핏 보기엔 그럴 듯 해 보이기는 합니다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문제가 참 많지요, - 그럼 사과를 먹는건요? - 쾌락지수 5점. - 그럼 덜익은 사과는요? - 음...그건 3점. - 그럼 덜 익은 사과에 시럽 발라먹으면요? - 음...그건 4점. - 그럼 덜 익은 사과에 시럽 발랐는데 파리가 앉았다 갔으면요? - ....죽을래? --; 

이 세상의 모든 상황을 미리 예측할 순 없습니다. 그걸 다 점수 매겨서 분류해 놓을 수도 없구요. 동물도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진 않습니다. 그럼 그러한 기호(좋고 싫음)들은 어떻게 생성되고, 분류되는 걸까요? - 그것은 그 개체가 평생동안 살아오면서 겪었던 많은 상황들을, 그때 그때 하나씩 분류하고 점수를 매긴 겁니다. 즉, 처음 겪는 상황이 자신에게 주는 이익과 불이익을 따져서, 그 ‘상황’에 나름대로의 평가를 내린 후 - 다음을 위해서 ‘기억’하는 겁니다. 그 상황과 평가를 한덩어리로 묶어서 말이죠. 그러면 다음 번에 유사한 상황에 직면했을 경우, 그 상황기억을 떠올리면, 함께 그 당시의 ‘평가표’도 딸려오니까, 다시 그 상황을 ‘경험’하지 않고도 알아서 행동을 결정할 수 있게 되니까요 - 아무래도 배운 놈은 뭔가 달라도 다르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상황’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좀 자세히 알아볼까요. 
이 상황이란 것은 전적으로 ‘감각상황’을 뜻합니다. 그것은 한 순간에, 입력된 모든 감각계로부터 온 신호들의 총합을 말하죠. 예컨데, 시각정보로는 빨갛고 넘실대는 움직임이 들어오고, 후각정보로는 뭔가 텁텁한 냄새가 나고, 촉각정보로는 높은 온도가 느껴지는 감각상황이 있다고 칩시다. 그리고 그 감각상황과 함께, 내부로부터의 감각 - 즉 '고통스러움’이라는 평가가 뒤따르는 경험을 했다면, 로봇은(인간은) 그러한 상황에 고통이란 꼬리표를 달아서 기억합니다. 그리고 다음에도 비슷한 상황에 접하면 회피하겠죠. 아울러 그러한 ‘상황’일 때, 다른 동료들이 내는 소리 - 청각신호 - 도 같이 하나의 상황으로 묶습니다. 음, 동료들이 내는 소리는 ‘불!’이라는 거군요. 이렇게 되면 그는 ‘불’이라는 청각신호로부터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게 되는 겁니다. 


즉, 기억이란, 이러한 감각상황의 총합인 것입니다. 특정한 감각상황에다가, 자신의 평가를 덧붙혀서 저장하는 것이죠. 물론 그렇다고 컴퓨터에서 메모리에 저장하는 방식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경망’이라고 불리우는 특수한 형태의 구조의 망 안에, 각 매듭간의 연결강도를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기억시키는 거죠. - 그 이야기는 다른 기회가 있으면 자세히 하도록 하고, 일단은 감각상황이 어떻게 평가되는 지 알아보도록 하죠. 

동물은 언제나 ‘감각상황’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감각기관이 제대로 작동하는 한, 언제나 뭔가 신호가 입력되고는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일상의 모든 것들을 기억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그럴 능력도 없고요. 우리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 관심있는 것들만을 골라서 기억하게 되지요. 물론 의도하지 않게도 잘 기억되는 것도 있지만요. - 그렇다면 무엇이 그러한 감각상황들을 기억하거나, 혹은 무시하도록 취사선택하는 것일까요? - 감각상황의 중요도를 평가하는 것은 전적으로 내부의 ‘흥분’, 즉 쾌락과 고통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어떠한 감각상황이 그에게 쾌락이나 고통을 주었다면, 그 상황의 평가는 ‘강해지고’ 그것은 강하게 기억을 남습니다. 즉, 우리의 생존에 필수적인 것, 뭔가 자극적인 것, 내적인 동요나 흥분을 일으킨 감각상황은 ‘저장해 놓을 필요가 있기 때문에’ 쉽게 기억되는 것이죠. 

이 ‘평가’를 우리는 일반적으로 ‘감정’이라고 부릅니다. - 기억을 되살려 보세요. 당신의 마음속에 강하게, 또 쉽게 기억되어 있는 것들은 뭔가 감정적으로 격양되어 있었던 경우일 것입니다.(좋든, 나쁘든요.) 친구에게 뺨맞았던 기억, 첨으로 복권 당첨되었던 기억, 괴상하게 생긴 선생님을 보고 의아해 했던 기억, 얼핏 스쳐갔던 매력적인 그녀의 모습, 길거리에 나뒹굴던 죽어 가는 고양이... 이 모든 것들은 당신의 ‘감정’과 함께 겪어졌던 상황이기 때문에 강력하게 각인된 거죠. 그에 비해, 열심히 외었던 ‘국민교육헌장’의 마지막 문단 척 구절은 영 안 떠오를 겁니다. - 감정적 고양 없이 의도적으로만 암기했던 사항은 기억이 쉽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수업시간에 대답을 못해서 망신을 당했던 문제의답은 절대로 잊지 못합니다. 

우리의 두뇌 안에는 이러한 수많은 감각상황들이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생각이 다른 생각을 낳고, 또 엉뚱한 기억과 연상되는 것은 이러한 감각상황들의 ‘흐름’에 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세히 관찰해 보면 이 ‘기억’이라는 현상에 재미있는 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어요. 

일반적인 기억 - 예컨데, 며칠전에 있었던 데이트 장면 같은 것을 떠올려 봅시다. 상대방의 모습과, 행동, 했던 얘기들, 같이 식사한 식당의 내부 분위기와 메뉴.... 많은 것들이 떠오르죠. 그러면, - 예를 들어 식당 장면 - 그 장면을 한번 자세히 탐색해 볼까요? 음... 약간 어두운 듯한 분위기에 부드러운 노란 조명... 재즈음악이 흘렀던 거 같고, 테이블은 통나무 느낌이 드는, 전체적으로 산장같은 분위기였어... 테이블 위엔 녹색 체크무늬 식탁보가 있었고... 은색 설탕통과 은빛 식기들... 그리고 초록색 액체가 담겨져 있던 예쁜 촛대.... 흠, 저 액체가 뭐길래 저걸로 촛불이 탈까, 하고 의아해 했던 기억이 나는군.... 

사진을 훑어보듯, 자세히 생각할수록 그 장면이 점점 명확하게 그려질 것입니다. - 그러면, 식사 때 나온 접시는 총 몇 개 였나요? 혹은 상대방의 옷에 있던 단추는 몇 개였죠? 이런, 그런 세세한 걸 어떻게 기억하냐구요? 

-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시각상황, 즉 그 장면을 저장하여 기억하다면, 왜 같은 장면인데 어느 부분은 기억이 잘 나는 것 같고, 어느 부분은 흐릿하거나 기억이 안 날까요? 그림화일을 저장하듯, 혹은 사진을 찍듯이 장면을 기억한다면, 왜 그런 부분적인 차이들이 날까요? 

잘 생각해보면, 우리의 모든 기억이 다 그런 식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예스터데이’란 노래의 음은 다 기억하지요. - 하지만 그때 반주로 쓰인 악기가 무엇인지는 기억이 잘 안 날 겁니다. 왜일까요? 분명히 들었기 때문에 멜로디는 기억이 나는데, 분명 동시에 같이 입력되었을 반주의 음색은 기억이 안나는 것일까요? 친구의 얼굴이 상상이 잘 되고, 분명히 알아 볼 수 도 있는데, 종이위에 그려보려고 하면 영 막막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기억’이라는 현상이, 결코 ‘저장’이 아니라 ‘재구성’하는 과정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 우리는 저장하지 않습니다. 단적인 증거로, 우리의 뇌 어디에도 RAM(메모리칩)과 같이 규칙적이고 조직된 기억장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정보를 뇌의 어느 곳에 일련의 코드로 전환하여 ‘저장’하였다가, 필요할 때 그것을 ‘인출’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기억이란 것은, 고도로 절제된 ‘인상’으로부터, 우리의 필요에 따라서 필요한 정밀도로 즉석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기억은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이며, 대단히 변형되거나 왜곡되기도 하고, 우리의 의지가 반영되는 적극적인 과정인 것입니다. 

아마 데이트 때의 기억은, 식당의 분위기와 상대의 인상, 대화내용등 몇몇 인상적이었던 내용들만 ‘감각상황’을 형성하여 기억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것을 회상하려고 하는 순간, 뇌는 놀랄만한 묘기를 부려서, 그 적은 정보를 바탕으로 순식간에 ‘적절한 수준의 장면’을 생성해 냅니다. - 기존의 경험들과 다른 기억들을 바탕으로 해서 말이죠.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뇌의 기능인데, 사실 우리는 꿈을 꾸는 경우, 외부의 작은 자극만 가지고도 뇌가 엄청난 상황을 창조해 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냉각과 굽기’를 반복하는 엽기적인 <인간 통조림 공장>의 콘베이어 벨트 위에 놓여지는 악몽을 꾼 적이 있었는데, 깨어나 보니 제 옆에는 선풍기가 ‘회전’상태로 돌아가고 있더군요. 

이러한 사실은 기억이라는 현상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능동적인 구조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사실은, 우리가 ‘현재’라고 말하는 상황조차도, 주어진 감각정보를 통해서 뇌가 순간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는 ‘세계상’인 것입니다. 기억, 현재상, 상상하기, 꿈, 환각.... 이 모든 것이 어떤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기능임이 분명합니다. 그 기본적인 바닥에 ‘기억’이란 기능이 있고, 이는 분명 해부학적으로는 ‘측두엽’과 관계 있습니다. 
- 이제 그럼 인공지능을 위한 다섯 번째 질문을 해볼.까요 


<인공지능 구현을 위한 기억의 메카니즘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어쩌면 두뇌의 전체적인 구조에 관한 의문이지요. 단순한 메모리나 신경망이 아닌, 훨씬 어렵고 구체적인 대답이 필요할 것입니다. 사실 이쯤 되고 나면 왠만한 동물수준의 지능에는 필적할 능력이 아니겠어요? - 하지만 인간에게는 동물과 완전히 구별되는 특별한 능력이 있지요. 모든 문화의 원천이자, 진정한 인간성의 근원인 것 - 그것은 무엇일까요?

 

 

7. The Sixth Sense : 인간이 창조해 낸 새로운 감각

 

'와슈’라고 불리는 암고릴라가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데려가서는 여러 가지를 가르쳤지요 - 아무래도 고릴라는 똑똑하니까, 쉽게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손을 들면 일어선다거나, 다리를 두드리면 앉는다거나....뭐 돌고래 쇼나 서커스에서 볼 수 있는 것들 말이죠. 

이번엔 사람들이 와슈에게 언어를 가르쳐 보려고 했습니다. 물론 도저히 고릴라의 구강구조로는 음성을 낼 수 없으니까, ‘아메슬란’이라고 하는 수화를 가르쳤지요. - 그랬더니 이거보게?! 상당히 많은 단어들 - 약 300여가지의 -을 수화로 구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이 정말 사람과 같은 ‘언어’일까, 라는 질문에는 회의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와슈는 단지 그 단어와 대상을 ‘연결’한 것일 뿐이었으니까요. 마치 빨간 단추는 바나나, 하는 식으로 말이죠. - 와슈는 의문문이나 감탄문, 혹은 순서의 차이에 의한 의미 변화등 언어적인 문장을 구사하지는 못했습니다. 


뒤를 이어 ‘침스키’라는 침팬지가 말을 배웠습니다.(침스키란 이름은 유명한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에서 따온 것이지요.^^) 와슈보단 더 똑똑하긴 했으나, 그 역시 언어적 의미를 깨닫진 못한거 같아요. 예컨데 ‘나는 너를 때린다’와 ‘나를 너는 때린다’와 같은 것을 구별 할 수 없었죠. 그래서 사람들은 ‘아, 역시 원숭이는 안돼’하며 실망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침스키의 새끼 침팬지들이, 단지 엄마가 공부하는 걸 옆에서 어깨너머로 배워서는 매우 정교한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들은 마치 문장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된 걸까요? 사람들은 고민하다가, 아! 이놈들은 매우 어릴 때부터 ‘언어환경’에 노출되었기 때문이구나, 하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 이들은 유아기 때, ‘언어’라는 감각을 뇌에 형성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언어란, 단지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닙니다. 의사소통이라면야 고래도 하고, 사자도 하고, 하다못해 아메바도 동료들과 의사소통을 합니다. 심지어는 아카시아 나무조차도 기린에게 풀을 뜯어먹히면, 이상한 화학물질을 공기 중에 방출하는데, 그러면 그 화학물질을 감지한 다른 나무들은 기린이 싫어하는 쓴 맛이 나는 물질을 잎에 분비함으로써 위험을 피하지요. 그렇다면 이러한 의사소통과는 다른 ‘인간만의 언어’란 과연 무엇일까요? - 그것은 다름 아닌 ‘논리를 다루는 능력’입니다. 

논리적인 추론과 해석은, 거의 인간 특유적인 능력입니다. 인간은 유아기때부터, 언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논리적인 사고를 다루는 법을 배웁니다. 언어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감각기관입니다. 무엇에 대한 감각기관이냐 - 바로 논리에 관한 것이지요. 이는 진화의 과정을 거쳐서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논리감지기관’을 형성한 것이 아니라, 대뇌의 기능을 바탕으로 ‘가상적’으로 형성된 기관입니다. 뭐랄까, 마치 OS가 멀티태스킹을 위해서 ‘가상머신’을 생성하는 거 같은 거지요. - 그렇기에 우리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에서 살게 된 겁니다. 우리는 논리적 명제와 추론이 충만한 세계에서 살지만, 동물들은 단지 오감이 제공한 경험적인 세계에서 살게 된 거지요. 

어떠한 말도 떠올리지 않고 무언가를 생각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언어란, 이미 우리의 사고과정을 지배하고, 혹은 사고과정 그 자체가 되기도 하지요. 우리의 대뇌는 끊임없이 논리적 명제를 생산하고, 또 그것을 다시 받아들이고 다시 변형시켜 생산해내는 과정을 반복함으로 해서, 감각계 - 운동계간의 단순한 조건반사를 넘어서는 복잡하고 고차원적인 추론과 사고를 하게 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언어란 그러한 논리적 명제의 매개체로 작용하기 때문에, 언어는 단순한 의미전달의 도구를 넘어서, ‘논리’를 받아들이는 새로운 감각계로서 해석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이크를 통해 입력된 음향정보를 분석하고 처리하고, 메모리의 단어사전과 연결시키고, 수십 가지 통사구조규칙을 통해서 문장을 생성시켜 해석하는 식은 언어처리는, 말 그대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언어는 결코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니까요. 언어는 우리의 뇌가 만들어낸 가상적인 ‘논리공간’에서 논리명제들은 생성하고, 변형하고 받아들이는 가상적인 기관 organ입니다. 그러므로 언어를 발생시키는 신경세포들은 어쩌면 ‘운동신경세포’로 분류해야 할 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활동이 내부의 ‘논리공간’을 향해 ‘분출’되는 것이니까요. 
인간은 아무런 자극이 없는 곳에서조차, 스스로 논리적 자극을 생성시키고, 그것을 다시 받아들여 자극으로 삼아 새로운 자극을 생성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일종의 자기 순환적인 회로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논리적 명제들은 가상적 논리공간에서 이루어지며, 우리는 이 과정을 ‘사고 thinking'이라고 부릅니다. - 우리는 우리의 내부에 하나의 공간 - 운동장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왜 인공지능의 구현이, 혹은 기계에게 자연어를 이해하도록 하는 작업이 그토록 어려운지를 대강이나마 보여줍니다. 사실 언어인식, 기계번역 같은 것들이 완벽해지기 위해서는, 기계에게 이러한 언어를 이해시켜야 하겠죠. 현재의 접근방식은 대개 언어 자체에 관한 것이라기 보다는, 껍질을 잘 조작하여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과 같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정말 인간수준의 인공지능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논리 감각계로서의 언어를 어떻게 구현시킬 것인가?> 


라는 여섯 번째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 이 문제는 굉장히 어려운 문제이며, 어쩌면 지구의 35억년 진화의 가장 절정이라고 볼 수도 있지요. 어쩌면 인간조차도, 언어의 탄생을 위한 준비과정이었을지도 모르니까요.

 

8. 통제 - 우리에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남북전쟁때, 노예들이 외친 구호지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음, 꽤 엄숙한 외침입니다. - 아마 노예를 산 농장주들은 꽤나 당황했을 거에요, 이 벌레같은 것들이, 뭐가 어째? 하면서 말입니다. - 그들에게 노예란 ‘검고 말 알아듣는 가축’정도 였을 테니까요. 그러한 노예들이 자신들의 자유와 인권을 주장했다는 것은, 주인들에겐 놀랄 일이었겠지만 - 사실 당연한 일이지요. 그들도 엄연히 생각할 줄 아는 인간이니까요. 

유명한 SF 소설가인 아이작 아시모프의 대작, <파운데이션 Foundation> 시리즈나, 그와 연결되는 우주 삼부작, 로봇 시리즈 등을 읽으면, ‘로봇’에 대해서 사실적이고도 일상적인 등장이 빈번합니다. 그의 20여권에 달하는 이 로봇 시리즈에 등장하는 R.다닐 올리버라는 로봇은, 완전한 인간형 로봇으로써 자그마치 2만년 가까이나 생존하는 주인공이지요. 그는 인간과 똑같은 외형과 감성을 가졌기 때문에, 그의 파트너로 등장하는 일라이저라는 사람은 다닐이 정말 로봇일까, 하고 심각하게 의심을 품게 됩니다. 
암튼 우리의 꿈만 같은 그러한 완전 인간형 로봇 - 게다가 똑똑하고 강하며, 불노불사의 능력까지 갖춘 - 이 그의 소설에는 등장합니다. 그리고 아시모프는 그 로봇에 대해 세부적으로 묘사를 해 놓았지요. 예를 들어서 두뇌는 수학적으로 예측이 불가능한 연산을 해내는 양전자 두뇌라던지,(미래에는 그런 게 개발되는 모양입니다) 그는 음식을 삼켜서 식사는 하지만, 위의 음식물 주머니에 넣었다가 나중에 꺼내서 버린다던지 등등..... 


그 중에서 참 재미있고, 또 그의 소설 전반을 통해서 하나의 커다란 맥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그 유명한 아시모프의 ‘로봇공학 3원칙’입니다. 
이것은 아시모프가 장차 로봇이 인간과 공존하는 사회를 상정했을 때, 그 로봇을 설계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간에 대한 로봇으로부터의 위협이나 사고를 막기 위하여 규정되어야 할 근본적이고도 중요한 3가지 원칙을 말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 1원칙 : 로봇은 인간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할 수 없다. 
제 2원칙 : 로봇은 제 1원칙에 위반되지 않는 한, 인간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제 3원칙 : 로봇은 제 1원칙과 제 2원칙에 위반되지 않는 한, 자신을 스스로 지켜야 한다. 

이 세 가지 원칙이 그의 소설에서 로봇들을 지배하며, 또한 상당히 현명한(?) 고안이라고 생각되어 현실적으로도 로봇공학의 3원칙이라고 받아들여지고 있을 정도지요.


- 자 그럼, 이 세 가지 원칙이란 것이 과연 진지한 숙고의 결과인지 검토해 볼까요? 

파운데이션의 마지막에 가면, 다닐은 심각한 갈등의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어떤 나쁜 놈이 다닐에게 지시를 내리는데, 그 지시는 직접적으로 사람을 해치는 것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을 해치게 되는 거였죠. - 그것을 피하는 방법은 그 자를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 그러나 그것은 인간을 죽이는 것이므로 1원칙에 어긋나고, 그의 지시가 직접 인간을 해치는 것도 아니므로, 2원칙에 의해서 그의 지시에 따라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다닐은 갈등합니다. 왜냐면, 다닐은 바보가 아니므로 자신이 행동의 의미와 결과를 예측하고 알기 때문이죠. - 결국 다닐은 자신을 억압하는 내적인 힘을 이겨내고(이 장면이 참으로 감동적인데....) 인간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를 죽입니다. 다닐은 스스로 판단하여 로봇공학 1원칙을 어긴 것이죠. 그리고 다닐은 자신이 깨달은 바 - 인간의 행복보다 더 중요한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스스로 로봇공학의 제 0원칙 : 로봇은 인류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할 수 없다,를 설정하게 됩니다. 
이 대목까지 책을 읽으면 - 자그마치 10여권에 달하는 - 그야말로 감동의 물결에 휩싸이고 그 거대하고 전체를 이어주는 로봇공학과 휴머니티의 승리에 대한 웅장함이 느껴져서 아시모프에 대해서 ‘역시!’를 연발하게 되는데..... 

바로 그 점이 중요한 겁니다. - 다닐은 스스로의 판단으로 법칙을 어겼지요. 그것은 그가 심사숙고하고 판단한 결과였습니다. 자신의 행동의 결과에 대한 예측과 그 의미를 파악한 것이었죠. 왜냐하면 그에겐 그러한 지적인 능력이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의심을 가지고 숙고하였고, 그 결론에 따라서 행동을 한 거지요. 

다닐은 우리가 기대하는 진정한 인간형 로봇입니다. 인간과 같은, 혹은 그 이상의 사유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인간인 우리도 자신의 존재와 삶의 목적과 의미, 행복과 자유에 대해서 고민하고 투쟁하는데, 그 이상의 사유능력을 가진 다닐이, ‘왜 내가 인간의 명령에 따라야만 하지?’하고 회의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 
그 뿐 아니라, 자신의 존재 의의와 로봇공학 전반에 걸친 회의, 인간과 자신의 관계와 의미 등등 상당히 철학적이고 사회적인 생각을 갖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의 지능이 적어도 인간의 것과 대등하다면, 그는 아마도 자신은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존재이며, 로봇공학원칙이란 절대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 인류의 역사가 그러하였듯이. 

물론 기술적으로 그에게 로봇공학 원칙을 지키도록 조작할 수는 있겠지요. - 예를 들자면, 영화 ‘로보캅’에서 보이듯이, 상사에게 저항하면 이를 기계가 감지하여 그의 운동능력을 마비시키는 것처럼요. 물론 다닐도 그런 식으로 프로그램되어 있기 때문에, 그가 로봇공학원칙을 어기려는순간, ‘프로그램되어진’ 괴로움과 정신적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인간에게 주입되어 있는 ‘본능’과 비슷한 겁니다. 인간은 어찌되었건 성욕이 있고, 섹시한 이성을 보면 섹스를 하고 싶어지지요. 그것을 억제하는 것은 ‘프로그램되어진’고통을 수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따르지만, 그에 대해서 회의를 품고 생각할 순 있지요. - 내가 왜 그 본능을 따라야 하는가? 무조건적인 본능의 충족이 옳은가? 아니 바람직한가? 내가 이 본능으로부터 자유로와질 수 있는가..... 적어도 인간은 그 본능을 가지고 있지만, 이를 제어하기도 하고, 지배당하기도 하는 융통성을 가집니다. 

본능으로부터 자유로와지기 위해서 섹스를 안 한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고명하신 분들이야 모르겠지만) -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그 본능에 대해서, 그 메카니즘과 의미에 대해서 판단하고 거부할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우리와 같은 지적인 존재에게는 가능하고, 하다못해 반항적이고 똑똑한 개에게도 어느 정도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로봇에게 사유능력과 추리능력을 부여한다는 것은, 당연히 그가 자신에 대해서 사유하고 추리할 기회를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로봇이 철학적 의문을 갖는 것, 자유와 복종에 대해서 회의하리라는 것, 혹은 인간에게 반항할 수 있다는 것을 막는 다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만약 그러한 것에 대하여 기술적으로 제한한다는 것은 동등한 사유능력을 주지 않는다는 뜻이며, 이는 우리의 추구하는 바와 어긋나니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인공지능을 구현할 수는 있으되,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영화 ‘터미네이터’에서처럼 인간을 정복하고 지구를 지배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말이지요. - 이것은 미래예측 중에서 대단히 신빙성 있는 시나리오로, 음성인식 프로그램과 맹인용 독서기, 신디사이저등의 발명으로 유명한 천재, 레이 커즈와일 같은 사람은 이러한 미래를 예견하고는 러다이트 운동가가 되어 ‘기술이 인류를 파멸시킬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공지능의 개발에 앞서서 


<지능로봇에 대한 사회적 입장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라는 문제에 대해서 미리 충분히 생각해 두어야 합니다. 기술적으로만 자제한다면, 인간보다 조금 떨어지는 지능을 구현하여 노예처럼 부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자기회의가 가능한 지능은 근본적으로 인격을 갖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 이는 지난 세대의 핵무기의 개발과 같아서, 인류의 발전과 함께 파멸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위험한 양날의 칼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두 번째 위협은 핵무기와는 다르게, 아주 조용히, 보이지 않게 인류를 잠식해 들어올 것입니다. 
우리가 기계에게 지배를 당하든, 혹은 노예로서 부리게 되든, 인공지능의 등장은 분명 윤리적, 사회적, 법적으로 상당한 논란과 혼란을 일으킬 것이며, 또한 그 순간에, 우리는 충분히 현명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 글은 2000년 가을, 인공지능연구의 올바른 방향에 관하여 쓴 에세이입니다. 인공지능은 '설계'가 아닌 '창발'의 형태로 탄생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 로봇으로 이루어진 인공생태계의 설립이 도움이 될 것이며, 이를 '바이오스피어3'로 명명을 제안합니다.

 

1. 무대 장치

 

TV만화영화를 생각해 보자. 어느 과학자가 홀로 로봇을 만든다. 수년간의 연구 끝에, 드디어 전원 스위치를 올리면(대개 번개를 이용하던데...),삐그덕 거리면서 로봇이 일어나서 걸어다니며, 자신의 아버지를 인식하고 말을 하거나 시키는 일을 한다. 

애석하게도 이러한 화려한 출발은 불가능하다. 만약 우리가 훌륭한 몸체와 기억장치, 적절한 알고리즘의 신경회로망 뇌를 구현시켜 전원을 올린다 하더라도, 이 로봇은 그저 간헐적으로 몸을 꿈틀대며, 눈만 껌벅거릴 것이다. - 왜냐하면, 그는 가진 것이라고는 몇가지 반사작용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그 로봇은 전적으로 갓 태어난 유아와 똑같다. 

가장 이상적인 구조를 가진 인간조차도, 갓 태어나서는 거의 철저하게 무능력하다. 지능체란 그것이 장차 발달하고 학습할 가능성을 가진 것이지, 탄생할 때부터 모든 것을 알고, 훈련된 채로 만들어지지는 못한다. 물론 훈련되고 성장한 뇌를 ‘복제’하는 방식으로 기계를 대량 생산하는 것은 가능할 지 모르겠지만, 지금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최초의’ 인공지능로봇이기 때문에, 제공받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유아의 감각계는 불완전한 상태에서 발달해 간다.

 

유아의 입장이 되어보자. 유아는 주위환경을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반응할까? - 사람은 오이디푸스기 이전에 ‘유아기 기억상실’이라는 메카니즘에 의해 유년기의 기억을 대부분 상실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는데, 예외적으로 그러한 유아기의 기억을 간혹 보고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기억을 회상하는 한 여성의 표현에 의하면, 젖먹이 때의 기억이란 “모든 것이 몽롱하고, 확실치 않다. 시야에 뭔가 둥근 것이 다가오면, 그것이 막연히 ‘좋은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 여기서 둥근 것이란 엄마의 얼굴을 말한다.

 

혹은 시각발달에 관해서는 좋은 예를 찾을 수 있다. 유아에게서 시각피질이 형성되는 과정을 물어볼 수는 없지만, 성인에게서 그 과정을 들을 수 있다. 선천성 백내장으로 장님이었던 사람이, 성장 후에 수술을 통해 시각을 회복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수술을 끝내자 마자 모든 것이 훤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정상적인 시각피질과 이에 관계된 뇌의 발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뒤늦게 그러한 발달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는 유아의 시각발달과정과 유사할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그러한 환자의 보고에 의하면, “처음엔 모든 것이 뿌옇고 보이지 않아 마치 ‘회색의 스크린’으로 덮혀 있는 듯 하다. 점차로 그러한 스크린이 없어지면서, 불확실하고 모호한 명암만을 구분 할 수 있다. 그리고 점차 색깔이나 모양을 인식하게 된다.” - 이 과정은 수개월에 걸쳐 일어나는 회복이며, 설사 아무리 오래 훈련을 하더라도 정상인만큼의 시각회복은 기대할 수 없다. 그는 정상적으로 발달해야 할 시기를 놓쳤기 때문이다. 

한 소년은 그가 유아기때, 눈병으로 인하여 약 2주간 한쪽 눈에 안대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영원히 한쪽 눈이 실명하게 되었다. 유아기때는 모든 감각기관에 대한 피질 형성과 뇌의 발달이 중요한데, 한쪽 눈으로부터의 감각자극이 차단되자 뇌는 융통성을 발휘하여, 그 한쪽 눈에 할당될 뇌의 영역을 다른 쪽 눈에 모두 할당하는 바람에 그는 한쪽 눈이 시각감각을 획득할 기회를 영원히 차단당한 것이었다. 이런 경우, 그는 차라리 양쪽 눈에 다 안대를 했다면 시각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뇌의 융통성이란 이처럼 막강하다. 

어린아이가 시각정보를 받아들이면서 손을 내뻗거나, 시선을 돌리고, 몸을 트는 둥 여러 가지 행동은 그의 감각과 운동의 발달, 나아가 지능의 창조에 대단히 중요하다. 자신의 운동신호가 자신의 감각기관을 통해 피드백 되는 과정을 통해서, 예컨데 자신의 팔의 움직임이 시야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목의 운동이 시야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하는 방식의 기본적이고 반복적인 훈련은, 유아에게 세상을 이해하는 법과 자신과 세계를 구분하는 법을 배운다. 성인이 매우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각종 감각이나 공간감각, 시간감각 역시 모두 이 때 획득되고 학습되어지는 것으로, 이것들은 모두 뇌가 세계로부터 정보를 받아들여 그것을 적절히 가공해 세계상을 만들어 내는 것을 기가막히게 익숙한 솜씨로 해내는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이유로 유아에게 지적인 발달을 촉구하기 위해서는, 다양하고 흥미로운 장난감을 제공하는 것이 유용하다. 딸랑이, 천장에 달아놓은 흔들이, 나무토막등 많은 자극물들이 유아에게 대상에 대한 형태, 색, 운동성, 소리, 촉감등의 정보를 부지런히 처리하고 뇌를 발달하게 자극하며, 그런 이유로 시각이 완전치 않은 유아에게는 뚜렷한 원색의 장난감들이 더 유리하다.

 

로봇은 어떻게 세계상은 만들어 갈 것인가?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인공지능 로봇을 만들 때도 똑같이 적용되며, 우리는 유아나 다름없는 로봇에게 적절한 자극과 공간을 제공하여 그들이 정상적인 지능발달을 할 수 있도록 유도 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의 예와는 달리,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존재한다.

 

첫째, 이들은 인간과는 달리 전례가 없기 때문에, 어떤 식의 심리적 발달과정을 거칠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이는 시행착오와 관찰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둘째, 이들에게 중요한 동기를 제공하기 어렵다. 어린아이에겐 모유나, 혹은 따스함, 또는 아픔등을 통하여 그들의 행동이 평가되고 자극받는다. 그러나 로봇에게 배고픔이나 온도, 물리적 충격등은 별로 신경쓰이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즉, 로봇에게 유의미한 환경이란 어떤 것인가? 

이는 지능로봇의 심리발달에 필요한 적절한 환경을 제시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동물은 자연 속에서 성장하면서 자연과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한다. 토끼에게 풀은 좋은 것, 여우는 피할 것, 그늘은 시원한 것, 같은 토끼는 경쟁상대, 소는 관심 없는 것등, 자신에게 영양과 기쁨, 고통을 주는 많은 구성원들로 가득한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만약 토끼에게 혼자 넓고 풍부한 풀로 가득한 세상을 제공한다면, 토끼의 지능은 발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는 간단한 작용 - 입을 오물거리는 것- 만으로 모든 욕구를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자연계의 토끼는 수많은 변수와 복잡성과 경쟁하며 전략을 구축할 필요성을 느끼기 때문에 지능이 발달한다. 사람도 마찬가지인데, 언어와 문명의 발달에 의해 배워야 할 것이 많아지면서 인간의 두뇌는 더욱 발달하였다. 

그렇다면 지능로봇에게 적절한 환경은 어떤 것이며, 그것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러한 환경은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가? - 그에 대한 세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2. 바이오스피어3

 

첫째, 기존의 세계를 환경으로 제시한다. 이 경우에는 기존의 유기환경에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는 완전한 유기체 기반의 로봇을 제작하여야 한다. 즉, 그는 주위의 유기물로부터 에너지원을 얻고, 생화학적 대사를 하며, 다른 동물들에 의해서 위협받거나 경쟁되어야 한다. 쉽게 말하면 음식을 먹고 잡아먹히는 단백질 기반의 로봇이어야 한다. 이러한 경우 생체조직으로부터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는 대사계를 위한 효소계가 있어야 하고, 이는 분자생물학적인 시스템을 요구하며, 결국 DNA와 조직적인 세포체계를 필요로 한다. - 이는 결국 현존하는 생물체를 재구성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시도가 의미가 있는가? - 생체공학적으로 혹은 생물학적으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에겐 전혀 그러한 기술이 없다. 생체공학이야 말로 진정한 나노테크놀러지인데, 우리는 원하는 단백질을 만들 수 있기는커녕, 아미노산 순서로부터 단백질의 구조조차 예측하지 못한다. 물론 현재에도 음식물(예컨데 설탕)을 이용하여 동력을 얻는 로봇은 개발되어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 생물체인 박테리아를 이용하여 그 생화학 대사계를 빌려서 에너지를 얻는 방법이므로, 움직이는 ‘발효통’정도의 의미밖에 없는 셈이다. 

결론적으로 이 방법은 현재 실현시키기엔 요원한 방법이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이루어져야 할 방항이며, 이러한 생체공학적 로보틱스는, 인류의 기본적인 구조와 기능을 바꾸어 놓을 인공진화의 주요한 기술이 될 것이다.

 

둘째, 전적으로 컴퓨터내의 가상세계를 이용한다.

이 방법은 매우 이상적인 방법이며, 실제로 두 가지 방식으로 적용되고 있다. 첫째는 컴퓨터 바이러스이고, 둘째는 인공생명이다. 

컴퓨터 바이러스는 물리세계에서의 바이러스와 거의 똑같은 생명체이다. 컴퓨터 바이러스는 증식하고, 돌연변이를 일으키며 진화하고, 죽는다. 그들에게 메모리공간은 실제로 ‘공간’이며, 네트워크의 전송속도는 ‘거리’가 된다. 그들은 완전한 가상세계에 적합하게 적응한 생물체이며, 이는 이미 우리세계보다 하부의 세계 속에서 발생한 창세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창조주가 있는 경우이긴 하지만, 앞으로 컴퓨터가 스스로 코드를 만들어 내다보면, 그 안에서 저절로 자기복제를 하는 코드가 튀어나올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인공생명은, 생명체의 원리인 ‘복제’를 그대로 가상공간 안에 적용시켜 그 활동과 진화과정을 살피는 것이다. 이는 크리스토퍼 랭턴에 의해서 창안된 매우 최신의 분야이며, 생명의 원리와 창발성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매우 흥미롭고 발전 가능성이 높은 분야로 각광받고 있다. 

이렇게 아예 등장인물과 무대장치를 모두 가상공간에서 처리하는 것은, 그들에게 일관성 있는 세계와 상호작용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편리하다. 또한 그 세계의 ‘물리법칙’을 제공하는 것도 매우 쉬우며, 예컨데 그들이 죽으면 그 시체(코드와 메모리)를 취해서 자신이 성장하는 등의 먹이연쇄도 쉽게 이루어 질 수 있다. 

이러한 가상세계가 안 좋은 점은 너무 단순하다는 점이다.

이 세계는 철저히 프로그래머에 의해서 디자인되며, 물리법칙과 세계의 복잡성도 마찬가지이다. 세계를 복잡하게 하기 위해서는 물론 규칙과 구성물을 추가하면 되지만, 그럴수록 컴퓨터에게 요구되는 계산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며, 결국 방대한 연산량을 따라잡을 수가 없게 된다. 이는 본질적으로 우리세계의 모든 ‘물질’들은 병렬연산을 하기 때문인데, 가상세계에서는 하나의(혹은 몇 개의) CPU가 그 모든 것을 다 계산해야 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 물론 대용량의 병렬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정교한 가상세계를 만든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정교하게 하더라도 실제 세계의 복잡성보다는 떨어진다.

 

셋째, 실제 세계에 인위적으로 로봇에게 적합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다.

즉, 무기물 로봇에게 상호작용하며, 유의미한 것들로 꾸며진 무기환경을 조성한다. 예컨데 로봇에게 전기에너지를 필요로 한다며, 에너지의 유지와 물리적 충격을 싫어하게 설정해 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에 적절한 생태계를 꾸며 줄 수 있다. 다양한 지형과 더불어 전기 콘센트들로 이루어진 ‘풀밭’을 조성하거나, 혹은 등에 콘센트를 달고 움직이는 작은 '먹이’로봇들을 방목한다. 혹은 로봇에게 달라붙어 전기에너지를 빼앗아 가는 ‘포식자’로봇이나 ‘기생’로봇을 함께 제공할 수도 있다. 

또한 고통스러운 가시밭, 이동이 어려운 늪지 등 다양한 지형을 제공하고, 경쟁상대인 동료나 혹은 다른 로봇을 투여하여, 이들이 주어진 세계 안에서, 한정된 에너지를 획득하기 위해 어떻게 전략을 바꾸어나가며 학습하고 살아가는지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진화의 과정에서, 급진적이며 폭발적인 진화는 대부분 포식자와 피식자, 혹은 경쟁자들 간의 ‘군비확장경쟁’으로 비롯되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러한 로봇들끼리의 경쟁과 먹이사슬은 그들이 전략을 향상시켜야 할 좋은 동기가 된다. 또한 그러한 환경에서 사회성과 일관된 세계상을 형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태계는 매우 세밀하게 계획되어 조성되어야 하며, 적절히 조성이 된다면, 일정수준의 지능의 구현을 위해서는 최적의 환경이 될 것이다.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르게 되면, 천천히 인공생태계를 실제 생태계와 융합시켜 나감으로써, 두 개의 세계를 통합해 결국 실제의 세계에 적응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계획의 가장 큰 난점은 규모가 크기 때문에 예산이 막대하리라는 점이다. 이는 하나의 독립된 생태계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인데, 이는 마치 콜롬비아 대학에서 우주공간에서 자급자족적인 독립 생태계를 유지할 수 있는가를 실험하기 위해 콜로라도 사막에 건설한 인공 생태계인 <바이오 스피어2>(바이오 스피어 1은 지구 자체이다)와 비슷하다. 그런 의미에서, 인공지능의 진화적 발현을 위한 이 생태계 계획을 <바이오 스피어3>라고 명명해보자. 그리고 이 계획을 실질적으로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중요한 사안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바이오스피어 2의 모습

 

3. 아키텍쳐 / 로봇 / 밈풀

 

아키텍처

첫 번째 사항은 전체적인 아키텍쳐 - 즉 바이오스피어 전체적인 규모와 모양, 각종 생태계의 크기와 종류, 각 군집의 배치와 수, 전체적인 룰, 지형과 서식지 등을 연구하고 결정하는 일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작업인데, 이러한 아키텍쳐가 적절히 결정되어야만 생태계가 제대로 유지되며 돌아갈 것이다. 적절한 긴장과 생존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생태계를 기획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며, 이는 상당한 시행착오를 거쳐서 만족될 것이다. 물론, 초기에는 매우 작고 단순한 크기의 인공생태계를 실험적으로 운영하며 점차 개선시키며 확장시켜야 할 것이며, 이 세계에는 번식과 육체의 성장이 없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하여 설정되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전기 에너지’의 획득을 룰로 하게 될 것이며, 필요에 따라 일정한 룰이 추가될 수도 있다. 적절한 양을 유지하도록 에너지는 외부에서 공급되며, 가장 기본적으로는 ‘식물군’(생산자)에게 에너지는 충전된다. 이러한 식물군으로부터 에너지를 취득할 수 있는 ‘초식동물군’(1차 소비자)과 초식동물로부터 에너지를 강탈하는 ‘육식동물군’(2차 소비자) 그리고 육식동물로부터도 에너지를 빼앗을 수 있는 ‘사냥꾼(3차소비자)’등으로 이루어 질 것이다. 

전형적인 먹이 피라미드의 형상으로 이들의 수는 조절될 것이며, 군집 전체가 얻은 점수에 따라서 군집의 크기가 결정될 것이다. 각각의 계층에는 여러종류의 행동패턴과 능력을 가진 로봇종으로 이루어지며, 이들은 무리를 이루거나, 혹은 독립 생활을 할 것이다. 

게임의 목적은 생존하는 것이며, 죽은 로봇은 생존자의 행동패턴을 학습하거나, 혹은 전혀 새롭게 변화되어 재 투입된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항이, 실제 개발 작업에 들어가면서 수정되고 확정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러한 로봇들의 ‘창발’에 대해서는 예측이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그들은 그냥 멍하니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 

 

로봇의 설계

두 번째 사항은 투입될 로봇의 설계이다. 

이들 로봇은 지능로봇들이며, 행동과 전략의 창발에 적합할만한 가능성을 구조적으로 가지고 투입되어야 한다. 군비확장경쟁과 같은 전략의 개발과 학습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로봇을 만드는 것은 바이오스피어 계획과는 독립적으로 미리 추진되어야 하며, 이러한 로봇이 어느정도 궤도에 이르렀을 때 바이오 스피어 계획을 기획하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다리를 이용한 이동, 다양한 감각기관, 학습능력, 의사소통 수단등이 기본적이며, 육식동물의 경우 양안시각과 공격기관이 제공될 것이다. 상황에 따라, 초식동물에게도 적절한 방어수단이 주어질 수도 있다. 다양한 구조와 기능을 가진 로봇의 투여가 바람직할 것이며, 그들의 집단적인 행동과 의사소통을 통한 일종의 사회성을 기대하는 것은, 이 계획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러한 로봇의 설계내용은 여기에서 언급할 만한 분량이 아닐 것이며, 다만 로봇의 최대 잠재력보다 바이오스피어의 복잡성이 조금 더 우월해야 할 것이다. 

 

밈풀

세 번째로 고려해야 할 사항은 밈풀(meam pool)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바이오스피어의 최대 약점은, 번식과 돌연변이를 통한 진화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기능을 제공하고 선택하는 것은 분명 진화적인 발전 방법이 아니며, 그렇다고 기계에게 번식의 능력을 부여할 수도 없다. 

물론 그러한 자기복제 기계에 대한 연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NASA에서는 우주개발 등을 위한 자기복제로봇을 연구한 적이 있으며, 그러한 기계는 최초의 아이디어를 낸 폰 노이만의 이름을 따서 ‘폰 노이만 기계’라고 부른다. 노이만 역시 그러한 기계를 구상하면서, 완전히 자가복제하는 로봇은 거의 불가능하고, 일부 필수적이고 공정이 까다로운 부품을 외부에서 제공받음으로써 - 이를 비타민 부품이라고 했다 -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 우리는 비타민을 음식으로부터 얻지만, 로봇은 어떻게 얻을까? 그것은 아마도 자신을 복제하기 위해서 먼저 실리콘 채굴공장부터 세워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자연적인 진화의 힘을 다른 방식으로 보충하여야 한다. 그것은 일종의 지식전달이다. 

생물체는 진화하면서, 선대의 구조적인 성과와 전략적인 성과를 이어받는다. 사자는 날카로운 이빨을, 얼룩말은 집단행동을 하는 지혜를 받게 된다. - 우리는 구조적인 성과를 우리가 분석함으로써, 더 나은 구조를 연구함으로써 제공한다. 이것은 진화만큼 안정적이지는 못하나, 매우 빠른 변화를 야기할 것이다. 그렇다면 전략적인 면은 어떻게 전수할 것인가? 

우리는 로봇을 디자인 함에 있어서, 빼놓지 말고 생각해야 할 것이, 그들의 신경회로망속에 기억된 정보를 쉽게 추출해내고, 수정하며, 기록할 수 있는 방법을 같이 구현하여야 한다. 물론 이를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한다면 매우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를 실제 뉴로칩과 같은 하드웨어로 한다면, 혹은 인공뉴런소자와 같은 것을 사용한다면, 각 연결노드의 수치와 구조를 추출해내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들은 컴퓨터 메모리와 같은 어드레스 형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상태 정보를 추출해 낸다 하더라도,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야기할 수 있도록 네트워크를 수정하는 것 또한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 왜냐하면, 신경망은 그 특성상, 망 자체가 어떤 정보를 기록하고 있는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정보가 전체적으로 분산되어 있고 전혀 명확하지 않은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방식의 정보를, 다른 정보들에 손상을 주지 않고 주입하거나 제거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는 심리학적인 방법을 응용해야 할지도 모른다. 

또한 이것을 원하는 신경망에 기록하는 것 또한 문제인데, 설사 마음대로 읽고, 기록하는 디바이스가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기록이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두 로봇의 구조가 똑같아야 한다. - 실제에 있어서 로봇의 구조를 바꾸고, 기존의 로봇으로부터 얻어진 정보를 넣는다면, 이는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러한 문제 때문에 우리는 신경망과 body, 그리고 정신 구조의 체계 속에 규격화되고 확장 가능한 ‘표준’을 구성해 나가야 한다. 

이러한 기술을 바탕으로, 우리는 한 개체가 일생동안 획득한 정보와 전략을 데이터베이스화 할 수 있다. (물론 정신의 표준이 구성된다면) 그러한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하여, 우리가 원하는 전략과 방식을 수정하여, 혹은 그 자체를 새로 투입되는 신종에게 주입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시간을 절약시켜 주며, 또한 전대의 전략적 성과를 이어받게 해준다. 

이러한 데이타들이 보다 확장된 두뇌로 자유롭게 이식되고 수정될 수 있도록 만든 ‘경험의 데이터베이스’가 밈풀(meam = 정보의 복제단위, 정보유전자. 이에 비해 유전자의 추상적인 집합은 gene pool이며, 우리의 유전자는 인간의 gene pool에서의 특정한 조합으로 형성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이며, 가능하다면 전체 경험으로부터 분리시킨 독자적인 meam들을 원하는 개체에 주입시키는 기술도 가능할 것이다.

 

4. 종의 다양성 

 

다양한 종의 존재는 생태계를 역동적으로 만들어 주는 것처럼, 다양한 기능과 구조를 가진 로봇들의 존재는, 바이오스피어의 존재목적을 보다 쉽게 이루어 줄 것이다. 더 많고 다양한 구성원들은 서로에게 자극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하나의 랩에서 그렇게 많은 로봇들을 생산해내는 것은 기술적으로나, 예산적으로나, 혹은 상상력인 면을 보더라도 거의 불가능하다. 이러한 문제점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가장 좋은 대안은 전세계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소규모의 바이오 스피어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보인다면, 이것을 기반으로 세계적인 ‘생존로봇 대회’를 개최할 수 있다. 이는 다양하고 많은 로봇을 시험해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될 것이며, 매우 다양하고 재미있는 시도들을 기대해 볼 수 있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본 설계와 표준규격이 공개되어야 하며, 너무 길지 않은 간격을 두고 새로운 종들이 투여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연 1회 이상의 개최가 필요하며, 하나의 종에 대해서 가능하면 많은 개체수를 투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집단적인 행동과 집단 내에서의 행동양식의 관찰은 매우 중요한데, 그러한 시도를 위해서라도 신경망의 정보추출과 복제기술은 필수적이다.

 

5. 의미

 

바이오스피어3는 그 안에서 완전한 지능이 발달하기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이 계획은 단지 그 안에서, 다른 세계를 적응할 수 있을 만한 지능정도만을 기대한다. 이런 목적은 결국 우리의 세계에서 살아갈 로봇을 만들기 위한 준비과정이다. 

만약 인간이, 모든 것이 전자기파로 이루어지고 사람들이 중력에너지를 먹고사는 외계의 이상한 세계에서 태어났다고 치자. 어쩌면 그러한 세계에서 적응해 살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십중팔구 정상적인 발달을 하지 못하고 말 것이다. 인간의 아기에게는 지구의 환경과 인간의 가정에서 정상적인 성장과 발달을 할 수 있도록 진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자신에게 유의미한 자극과 동기, 그리고 사회성이 부여되지 못한다면 정상적인 성장이 이루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늑대소년의 경우만 하더라도, 인간적인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으며, 그나마 육체적으로 살아있던 것은, 늑대들의 세계라도 기본적인 에너지원은 사람이나 늑대나 고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늑대들이 돌을 먹고 살았다면 늑대소년이 생존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성장한 인간이 그러한 외계세계에 노출된다면, 그들은 힘들더라도 그러한 상황을 이해하고 나름대로 규칙을 부여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들은 이미 어느 정도의 내적인 세계를 확립했기 때문에 붕괴되지는 않는다. 만약 혼자라면 외로움과 공포로 정신이 파괴될지는 모르나, 몇몇 동료와 함께라면 그는 이 새로운 세계를 이해하며 적응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바이오 스피어3가 기대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만약 전적으로 실험실에서, 로봇을 설계하고 에너지를 공급하며 연구원들 사이에서 성장시키면 어떻게 될까? 모르긴 해도, 이 세상은 로봇에게 자극적이며 동기를 부여하는 친근한 세상은 아닐 것 같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동료가 없이 혼자라는 것을 깨달을 수도 있고, 주위의 인간을 이해하기엔 무리일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일어나는 소외나 정신적인 충격이 어떠한 영향을 미칠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정도 정신적 구조가 형성되고, 얼마간의 지능을 발달시킨 후에 조금씩 이 세상에 노출시켜 나간다면, 그는 마치 신세계를 발견한 것처럼 놀라겠지만 그러한 쇼크로 파멸하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그는 새로운 세계를 탐구하고 적응할 만큼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실험실에서 성장시키는 것이 별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 로봇이 이 세상에 잘 적응하고, 나름대로 사람들 사이에서 길러진 어린 침팬지처럼 비교적 정상적인 발달을 이룰 수도 있다. 그럴 경우엔 바이오스피어3의 의미는 없어지는가? 

 

그럴 경우에라도, 바이오스피어3는 인류학적, 진화학적, 행동유전학적, 사회학적인 연구모델로써 유용할 것이다. 사회성과 계급, 룰이 어떻게 형성되어 나가는지, 전략적 경쟁이 어떤 식으로 발전하는지, 사회 내에서 문명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관습, 문화, 신앙과 같은 것들이 그러한 인공사회에서도 일어날 수 있을지 알아보는 것은 분명 매우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만약 그러한 인공사회가 언어를 탄생시킬 수 있을 만큼 발달한다면, 이는 과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매우 놀라운 일이 될 것이며, 우리는 그 에덴동산에서 그들이 선악과를 발견했을 때 해명해야만 할 대답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2006    

 

 요약

동물은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한지 불리한지 판단하는 데 감정을 사용한다. 가장 핵심적인 감정은 고통과 쾌락인데, 다른 감정들은 모두 여기에서 파생되어 나올 것이다. 동물의 신체내외부의 감각기관으로부터 발생하는 신경신호를 중추 신경계에 축적하게 되는데, 이를 ‘스트레스’라고 하며, 동물은 이를 방출/해소함으로써 체내의 낮은 스트레스 상태를 유지하고자 한다. 이때, 스트레스의 급격한 상승을 고통, 급격한 방출을 쾌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스트레스

 

단순하게 생각하면, 생물이란 외부로부터의 감각자극을 적절한 운동으로 바꾸어 생존해 나가는 존재이다. 이때 감각자극을 받아들이는 부분을 감각기관, 운동을 일으키는 부분을 근육과 내분비계, 그리고 감각자극을 적절한 운동으로 변형시키는 부분을 신경계라고 한다.

 

 감각기관(시세포, 청세포, 후각세포, 기계적 감각세포 등)은 신경세포의 변형된 말단이며, 내분비 세포나 근육세포 역시 신경세포와 유사성을 공유하는데, 전기화학적 신호에 의한 급작스런 변화(신경세포일 경우엔 흥분의 전달, 근육세포의 경우엔 수축)을 야기한다는 점이 그러하다. 또한 내분비세포 역시 호르몬의 방출을 외부세계에 대한 운동이라고 볼 수도 있다.(신경계의 관점에서 보면 혈관은 외부이다.)

 

 신호를 적절하게 변형시킨다고 간단하게 말했지만, 실제 신경계에서는 표상화, 학습, 기억, 판단, 추리 등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과정이 존재한다. 결국 뇌와 정신에 대한 연구는 이 과정에 대한 해석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단순하게 보면 외부로부터의 감각자극은 신경계를 거쳐 운동으로 방출된다고 볼 수 있으며, 이 경우 운동의 원천은 외부의 감각자극이 된다.

 

 단순하게 양적으로 보면, 당연히 많은 입력은 많은 출력을 낳는다. 즉, 많은 감각 신호는 많은 운동을 낳는다. 모기가 살짝 물었을 때에는 몸을 꿈틀거릴 뿐이지만, 칼에 찔리면 그는 소리를 지르고, 펄쩍 뛰고 도망가거나 맞서 싸우는 등 큰 운동을 방출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평온할 때는 굳이 움직이려고 하지 않으나, 많은 자극이 입력될 때 - 고통스럽거나 불편할 때 - 이를 움직임으로써 이 자극을 방출하고, 아울러 ‘적절히’ 움직임으로써 감각자극을 없애고자 한다.

 

 이 때 감각자극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일 수도 있으나, 신체 내부로부터의 자극 - 위장이나 근육, 혈관 - 일 수도 있다. 신경계의 입장에서 보면, 맹수의 습격이나 혈당량의 부족, 혹은 특정 호르몬의 증가 등은 똑같이 자신에게 주어지는 감각자극일 뿐이다. 그러므로 신경계는 외부 혹은 신체 내부에서 기인하는 감각자극을 최소화하고자 한다. 그 결과가 운동이며, 가장 효율적인 운동방식을 찾는 것이 중추신경(마음)의 역할이다. 이는 일찍이 프로이트가 주장한 바와 같다.

 

 유아는 주어진 감각을 적절한 운동으로 변형시키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무작위적인 방출이 이루어진다. 배가 고프면 그 감각자극(신경충동)은 경련적이고 발작적이며 체계화되지 않은 방식으로 방출된다. 팔다리를 휘젓고 소리를 지르는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그러나 점점 학습을 해 나감에 따라 그 에너지(감각자극)를 보다 효율적으로 쓸 수 있게 된다. 부모를 부르거나, 음식을 달라고 하거나, 혹은 스스로 음식을 찾아 먹는 등의 방법으로.

 

 프로이트는 감각신경자극을 ‘긴장 tension’이라고 표현하였다. 혹은 신경충동, 충동, 신경에너지 등의 다양한 표현을 하였는데, 이는 모두 유사한 개념이며 구체적으로는 신경세포의 흥분전도 action potential 이다. 프로이트는 이 개념은 추상적이지만 정량적으로 다룸으로써 그의 이론을 전개시켜났다. 나는 이 개념을 스트레스 stress라고 부르겠다. 즉, 감각계로부터 입력되는 신경자극은 모두 스트레스이며, 이는 가치중립적이다.(상처의 자극, 혹은 말소리, 음식의 맛 등 모든 자극은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스트레스의 발생

 

 모든 감각신호는 스트레스이다. 상처로 인한 통각세포로부터의 신호는 물론이거니와, 풍경을 바라보는 시각세포로부터의 감각신호 역시 스트레스이다. 즉, 스트레스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다. 스트레스가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전적으로 양에 기인한다.

 

 동물이 살아있는 한, 스트레스는 끊임없이 생산되고 유입된다. 이는 극히 정상적인 과정이며, 삶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배고플 때 먹이를 찾아 움직이게 하는 원천이며 짝짓기를 시도하여 종족을 유지하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사실 모든 운동과 생리작용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스트레스가 너무 많이 쌓이거나, 급격히 늘어나는 사태는 위험하다. 이는 비정상적인 상황이며, 적극적으로 해소해야하는 상황이다. 물리적 충격으로 인한 강한 자극을 받으면 감각세포는 맹렬하게 신호를 발산한다. 이는 급격한 스트레스의 유입을 일으키며, 비상사태라는 신호이다. 혹은 지속적 기아로 인해 위벽세포나 혈당량 감지세포가 맹렬하게 신호를 보내기도 한다. 정상적 성교의 부족으로 축적된 정액이 고환에 압력을 가할 수도 있다. - 모든 일상적 범위를 넘어서는 감각의 자극은 스트레스를 생성한다. 너무 밝은 빛, 너무 큰 소리, 지나친 추위나 더위, 혹은 중추신경계 내부에서 어떤 이유로 인해 생성되고 쌓여버린 신경충동의 증가 - 이는 마치 고무풍선 안에 채워진 물과 같아서, 쌓이면 쌓일수록 방출에 대한 강한 압력이 작용한다.

 

 

스트레스의 방출

 

 앞에서, 스트레스의 방출은 동물의 가장 원초적인 행동양식이며, 신경계의 기본원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어떤 방식으로든 스트레스를 방출하는 것은 동물에게 유리하다. - 그런데 스트레스를 방출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운동이다. 그렇다면 모든 운동은 동물에게 유리한 것인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가장 일반적인 세 가지 경우는 1)신체의 물리적 위해, 2)배고픔, 3)성적 불만족이다. 이들에 대해 스트레스의 방출을 고찰해 보자.

 동물이 배가 고파서 위장과 혈관 등으로부터 감각자극이 격렬히 발생하고, 이로 인해 스트레스가 증가하고 있다고 상정하자. 그렇다면 동물은 이 스트레스를 이용하여 뛰어다니거나 소리를 지름으로써 스트레스를 방출하고 만족할 수 있을까?

 

 답을 말하자면 ‘그렇다.’ - 내부에 쌓이는 스트레스는, 그 기원을 막론하고 모두 똑같다. 상처로부터 기인한 스트레스든, 배고픔으로부터 기인한 스트레스든 구분하지 않는다. 신경계는 어떤 방식으로든 이 스트레스의 수위를 낮출 수만 있다면 만족한다. 중추신경의 입장에선 이들 감각신호에 질적인 차이는 없다(non-modal) 내부에서는 오직 정량적인 관계만 존재한다. 감각의 성질의 차이는 사실 외부세계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배가 고플 때 소리를 치거나 성교를 하는 것은 스트레스를 감소시킨다. 아이들은 주사를 맞아 아플 때, 맛있는 사탕을 주면 울음을 그친다. 상처를 입었을 때, 비명을 지르는 것이 순간적으로 고통을 감소시켜 주는 것과 같다. 순식간에 급증한 스트레스를 소리를 지름으로써 황급히 방출시키려는 기작인 것이다. 화가 치밀 때 사람들은 물건을 파손하거나 소리를 지르는 행위가 그들을 진정시키고 스트레스를 해소시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원인과 관계없는 방출은 결코 원인을 제거하지 못한다. 소리를 지른다고 공복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식의 방출은 효과가 없다. 스트레스는 계속 유입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물은 그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운동을 계속하게 된다.

 

 

 감정

 

 

슬픔, 노여움, 번민, 연민, 동경 등 수많은 종류의 감정이 있겠으나, 감정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는 두 가지, 즉 쾌락과 고통이다. 이로부터 파생된 수많은 다른 감정들의 정체와 원리를 밝히는 것은 흥미로운 주제이나 여기서 논할 바는 아니다.

 

 쾌락과 고통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깊이 고찰해 보면, 쾌락은 생물로 하여금 그 상황을 계속 반복하도록(혹은 안주하도록) 하는 상태이고, 고통은 그 상황을 벗어나려고 하는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생물체는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거나, 혹은 이를 만끽하고자 하는가? 그것은 자신의 생존과 자손의 번식이라는 두 가지의 목적을 기준으로 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신체를 훼손하는 상황이나 번식을 방해하는 상황은 생물체에게 피해야 하는 상황이며, 이러한 상황은 고통으로 인식되어져야 한다. (이는 진화적 결과이다.) 반면,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상황은 쾌감으로 인식되어지고 이를 추구하도록 해야 한다. 진화는 생물체에게 이러한 절대명제를 기준으로 고통과 쾌감을 발달시켜왔으며, 이를 바탕으로 생물체의 모든 행동양식이 파생되어 나온다.

 

고통은 높은 스트레스 수준이다. 

 

그렇다면 고통과 쾌감은 어떤 원리로 작동하며, 그 발생과정은 어떠한지 살펴보자. 전술한 데로, 생물체는 신체내외에서 발생한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려는 존재이다. 예를 들어 낮은 혈당량이나 비어있는 위장은 끊임없이 신경신호를 발생시킨다.(이 역시 진화적 결과로, 선천적으로 구조화 된 기작이다.) 그러면 신경계에는 계속해서 스트레스가 축적된다. 이는 좋지 않은 상태이며, 신경계는 이 축적되는 스트레스를 제거하고자 한다. 유입되는 스트레스는 방출해야 하는데, 그 방법은 운동이다. 그러나 신경신호를 근육으로 방출하여 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인다고 해서 신경신호의 유입이 멈추지는 않는다 . 그런데 만약 근육이 적절히 움직임으로써 - 음식을 찾아 먹음으로써 - 배를 채운다면, 위장은 더 이상 신경신호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그러면 신경자극은 줄어들고, 신경계에 쌓이는 스트레스의 양은 점차 줄어든다. 그러면 운동신호의 원천이 사라지게 되며, 생물체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이 상황을 외부에서 관찰하자. 스트레스가 체내에 쌓이면, 동물은 운동을 하게 된다. 더 나은 환경을 찾아 이동하든, 혹은 먹이를 찾아 이동하는데, 이것이 바로 ‘불만에 대한 동물의 행동방식’이다. 동물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바로 일정 수준의 스트레스이며, 외부에서 보면 마치 동물이 불만으로 인해 다양한 시도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이 동물을 때려보자. 물리적 충격으로 인해 감각세포로부터 급격한 스트레스의 유입이 발생하면, 동물의 운동은 급격히 늘어난다. 급격한 방출을 위해 보다 격렬하고 강한 운동 - 근육의 경련이나 큰 소리를 낸다. 이것이 외부에서 보면 도망, 찡그림, 비명과 같은 형태로 관찰된다. 혹은 내분비세포도 일종의 운동기관이므로, 아드레날린과 같은 비상호르몬을 방출하기도 한다. 결국 우리는 급격한 운동방출을 ‘고통반응’이라고 부르는 셈이다.

 

 그러므로 체내에 스트레스가 많이 쌓인 상태는 ‘불만의 상태’이며, 스트레스가 급격히 늘어나는 상황은 ‘고통’이다. 그러면 ‘쾌락’은 어떤 것일까?

 

쾌락은 행동을 반복하도록 유도한다. 

 

쾌감은 일반적으로 고통의 부재에서 기인한다. 이는 쇼팬하우어적인 해석과도 일치하는데(쇼팬하우어는 ‘고통은 실체요, 쾌락은 그림자’라는 말로 고통의 부재가 곧 쾌락임을 주장하였다.) 실제로도 고통의 역과정 - 즉 스트레스의 급격한 방출이 곧 쾌락인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불에 데인 상처로부터 감각세포는 맹렬하게 스트레스를 생산하고, 이는 고통을 유발한다. 동물이 이 상처에 찬물을 붓는 순간, 감각세포는 활동을 멈추고 유입되던 스트레스는 중단된다. 이 때 동물은 고통반응을 통해 급격히 스트레스를 방출하고 있었고, 또한 급격한 유입중단으로 인한 상대적 효과가 스트레스의 급격한 하락을 유발한다. 그러면 동물은 순간 모든 공포반응(운동, 경련, 비명 등)을 멈추고 그 순간을 안주하거나 다시 반복하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쾌락이다. 외부에서 보면, 동물은 편안하게 그 순간을 만끽하는 것으로 보인다. 쾌락은 고통보다는 약간 애매한 형태이긴 하지만, 우선은 고통발생의 역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고통의 부재라는 소극적인 의미 대신, 적극적인 의미의 쾌락도 존재한다. 예컨대, 유아는 선천적으로 단맛을 선호한다. 혹은 마약과 같은 약물은 지속적인 쾌감을 제공한다. 이러한 종류의 쾌락에 대해선 다른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감정의 주관적 경험

 

 이것이 과연 ‘고통’의 진정한 기작일까? 물론 이것은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여기엔 ‘고통’이 주는 불쾌하고 부정적인 뉘앙스를 설명할 수는 없다. 이는 퀄리아의 문제이며, 전적으로 주관적 인식의 문제다. 어떤 (인공적인)시스템이 입력신호가 급격히 늘어난다고 정말 ‘고통’을 느낄 것인가? 하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는 마치 특정 주파수의 빛 자극이 과연 기계에게 ‘노란색’의 이미지를 유발시키는가,와 같은 종류의 질문이다. 철학적 난점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기술한 가정은 고통과 쾌락에 대한 일반적인 현상을 정확하게 설명한다. 급격한 스트레스의 증가를 해소하기 위해 시스템은 격렬하게 운동한다. (급격한 증가는 급격한 방출을 일으킨다) - 이것이 우리가 흔히 보는 고통에 대한 반응이다. 고통 받는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결코 알 수 없다. 고통 받는 사람이란 ‘고통 받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사람’이다.

* 이 글은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인공지능연구의 방향에 대한 비판과 대안제시를 위한 것으로, 현재 작성중이며, 그중 앞부분 일부입니다. 그러므로 거의 비판일색임을 양해바라며, 대안에 대해서는 현재 진행중인 다른 글들이 어느정도 완성된 후에 작성될 예정입니다.

 

 

                                                           2006

 

  

 

 이 글의 목적은 전적으로 진정한 인공지능을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인공지능의 구현은 이런 글이 아니라 실제의 로봇시스템의 형태가 되겠지만, 우선은 글을 통해 현재 지능연구의 한계를 지적하고, 현재 참고할 수 있는 연구결과와 내 자신의 견해를 밝힘으로써 나 자신과 이 분야에 관심 있는 이들의 연구에 한정적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한다.

 

 

 

 

1

 

처음으로 대도시의 호텔에서 묵게 된 사막의 족장들이, 수도꼭지만 틀면 펑펑 쏟아져 나오는 물에 놀라면서, 온통 목욕과 수영을 즐기다가 떠날 때가 되자, 수도꼭지를 떼어가려고 끙끙대었다. “왜 그것을 떼어가려 합니까?”하고 묻자, “사막에서도 마음껏 목욕을 즐기고 싶어서요”라고 대답하였다.

 오쇼 라즈니쉬의 '배꼽'중에서.

 

 여기에서 말하는 <진정한 인공지능>이란 일반적으로 SF영화 등에서 그려지는, 인간과 같은 지적 능력을 갖춘 인공지능, 또는 로봇을 말한다. 쉽게 말하자면 애니메이션 <아톰>에 나오는 아톰과 같은 (날아다니거나 하는 뛰어난 물리적 능력은 없지만) 형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인공지능이라는 말에는 많은 오해가 있어왔으며, 사실 현재 로봇산업의 오류도 이 말의 오해에서 비롯한다. 사람들은 쉽게 상상하기를, 지능로봇은 뛰어난 지적능력을 가지고 있으나 인간과 같은 감정과 창조성, 예술적 능력은 없으며, 그저 차갑고 냉철한 지능을 가지고 인간에게 복종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런 지능이 점점 발달하다보면 예외적으로 ‘감정’과 유사한 기능이 발생하기도 하고, 이에 따라 ‘로봇에게 감정이 있을 수 있는가?’하는 논란이 뒤따르곤 하는, 그런 상상을 하기 마련이다.

 

 나중에 자세히 논하겠지만, 이는 전적으로 잘못된 상상이다. 일단, 인공지능로봇은 <감정 없는 지능>이라는 개념은 허구이다. 이는 단순한 기능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컴퓨터나 기계로부터 유추된 근거 없는 연장일 뿐이다. 사실은 <지능 없는 감정>이 현실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 감정은 있지만 지능이 없는 로봇은 만들기 쉽지만, 감정이 없이 지능만 있는 로봇은 더 만들기 어렵다. 이는 마치 건물의 1층과 2층과 같아서, 감정이 있어야만 비로소 그 위에 지능이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지능>이라던가, <감정>이라던가 하는 단어들의 뜻이 정확하게 파악되어야 -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 할 것이지만, 우선 내가 말하는 <진정한 인공지능>은 일단 사람과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수준을 말한다. 혹자들은 여기서 튜링테스트를 떠올리며 이것이 과연 적절한 기준이냐에 대해 의문을 표할 수 있겠지만, 사실 튜링테스트는 충분히 훌륭한 방법이며, 다들 단어들 이상으로 오해받고 있는 - 심지어 비트겐슈타인 같은 철학자에게까지도 - 언어능력은 인간적 지능에 대한 적절한 지표라고 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전적으로 인공지능 시스템(로봇 - 로봇의 형태가 아니고는 인공지능을 구현할 수 없다)을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며, 나는 진심으로 인간과 같은 수준의 지능로봇을 만들 수 있기를 원한다. 그러나 글의 상당부분에서 전통적인 인공지능이나 로봇공학이 아닌, 오히려 철학과 심리학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할 것이다.

 

이는 결코 현학적인 논쟁이나 학술적인 의미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다. 철학과 심리학, 또는 생물학과 사회학은 인공지능의 본질이며, 오히려 컴퓨터나 기계공학은 부수적인 분야에 속한다. 이런 부분에서부터 오해가 발생해 있기 때문에 현재의 인공지능연구는 지리멸렬한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가장 먼저 논해야 할 것은, 현재 인공지능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오해들을 제거하고, 관련된 개념들을 명확히 하는 일일 것이다.

 

 

 

2

 

 당신은 단순히 지능형 로봇에 관심 있는 독자일지도 모른다. 혹은 실제로 제작하기를 원하는 기계공학이나 메카트로닉스의 대학원생, 혹은 연구진일 수도 있다. 아니면 국책사업으로써 로봇 공학을 육성하는 데에 고민하고 있는 정부 관련자나 연구소의 책임자일 수도 있으며, 차세대 주력 상품으로써 지능 로봇사업의 도입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는 경영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많은 경우는 지능형 로봇을 개발하려고 하는 컴퓨터공학자나 로봇공학자일 것이며, 그들이야말로 이 글이 가장 필요한 대상이다.

 

 현재 지능형 로봇은 우리나라의 신성장 동력으로 분류되어 정부차원에서 지원하고 있으며,

 매스컴에서는 곧 영화에서처럼 로봇이 일상화된 생활이 도래할 것처럼 말하고 있다. 인간형 로봇이 각 가정에 자동차처럼 보급되어 일상의 일을 돕고,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대화하며 생활의 일부로 자리잡아, 머지않아 자동차 산업만큼이나 거대한 산업으로 육성되리라 기대하고 있다. 인간처럼 춤추고 움직이는 혼다의 아시모나 사람과 거의 똑같은 외양을 가진 여자 로봇 등에 고무되어, ‘이런 식이라면 인간과 같은 로봇이 곧 등장하겠는 걸.’ 하는 생각은 자연스러운 듯 보인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이제 막 이족보행 로봇을 성공시켰고, 하드웨어의 파워는 나날이 급증하고 있고, 정부와 기업이 다각적으로 지원하고 있으므로, 조금씩 로봇의 움직임과 센싱 능력을 향상시키고, 좀 더 방대한 데이터 베이스와 정교한 패턴인식 알고리즘, 그리고 신경망과 기계학습을 발달시키면 조금씩 조금씩 인간에 가까운 형태로 발달하다가 종국에는 인간과 같은, 그런 진정한 인공지능 로봇을 개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만약 그렇게 믿고 있다면, 안됐지만 상대를 잘 못 골랐다. 일찌감치 링에서 내려가 다른 분야를 찾아보는 게 나을 것이다. 우리의 상대는 아직은 어렵지만, 어떻게든 해 볼만한 그런 상대가 아니다. 우리의 링 위에서 맞서야 할 상대는 마이크 타이슨이 아니라, 티라노사우르스나 항공모함에 가깝다. 열심히 운동하고 투지를 가지고 싸운다고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란 말이다. 이런 상대를 이기려면 완전히 다른 접근방식 - 예를 들면 예산을 모아 군대를 투입하는 방식의 - 으로 접근해야 한다.

 

 동의할 수 없는 말인가? - 그렇다면 당신은 반드시 이 글을 마저 읽기 바란다. 이 글의 목표는 ‘순진하게도’ 현재의 방식대로 연구하다보면 인공지능을 개발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단념시키고, 막막하더라도 올바른 접근 방식으로 안내하는데 있으니까.

 

 현재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곳은 대부분 컴퓨터과학, 전자공학, 기계공학 쪽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인공지능 로봇을 연구하는데 가장 적합하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다. 튜링머신을 확장하고, 논리추론과 다차원벡터로 표상을 다룰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분야는 그들의 것이 아니다. 비유하자면, 컴퓨터의 본체가 플라스틱과 철판으로 되어 있다는 이유로 컴퓨터를 플라스틱 사출공장이나 대장간에서 개발하려고 하는 것과 같다. 물론 결국엔 그들도 필요하긴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컴퓨터를 개발하기 위해서 가장 적합한 사람들은 논리학자나 수학자다. 가장 밑바닥에서 형식논리나 부울 대수 따위의 원리와 개념을 만드는 것은 그들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은 본래 철학자와 심리학자의 분야다. 컴퓨터과학이나 기계공학은 가장 나중에 투입되어야 할 분야다. 그들은 거의 완성된 이론을 테스트하는데 필요할 뿐이다. 그러니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어이없는 지 짐작하겠는가? “자, 저 근사한 3차원 그래픽의 네트워크 게임을 만들어 보자구!” 하며 팔을 걷어 올린 일군의 대장장이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곧 절망에 빠져 술이나 먹는 일일 것이다.

 

 아마도 지금 인공지능 - 로봇청소기 따위가 아닌 진정한 인공지능 - 을 개발하고 싶어하는 많은 컴퓨터과학의 실험실이 비슷한 상황일 것이다. 그들은 전통적인 내용들을 배운다. 패턴인식, 기계시각, 모터제어, 자연언어 파싱, 사이버네틱스, 신경망, 퍼지, 베이지안 네트워크, 히든마코프 모델, 합성캐릭터 등등. 그리곤 마이크로 마우스나 간단한 청소로봇, 혹은 어기적거리는 이족보행 로봇을 만든다. - 그리곤 멈춰 서서 절망한다. 이젠 도대체 뭘 해야 하는 거지?

 

 할 수 있는 데까지 하고는 그제서야 모든 게 비어있음을 깨닫는다. 도대체 지능이 뭐지? 기억이 뭐지? 언어는? 어떻게 물체를 인식하지? 인식, 이라는 게 뭐지? 자아는? 욕구는? 고통은 뭐지? 본능이란 건 뭘까? - 마치 열심히 철판을 두드려 컴퓨터 비슷한 모양을 만들어 놓고 그제서야 고민에 빠진 대장장이들처럼.

 

 아마도 대부분의 인공지능의 연구자는 위의 상황에 동의할 것이라 믿는다. 여러분의 스타인 MIT의 로드니 브룩스나 한스 모라벡도 마찬가지이다. 그들 역시 거대한 벽 앞에 가로막혀 좌절하고 있으며 무엇인가가 근본적으로 빠져있음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이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성악가가 갑자기 장대높이 뛰기를 하려고 할 때의 막막함과 유사한 것이니까. 장대높이 뛰기는 육상선수의 분야다. 그럼에도 굳이 장대높이 뛰기를 하고 싶다면, 먼저 육상선수를 찾아가 조언을 구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이미 수 천년동안 인공지능의 본질에 대해 연구해온, 철학자들에게 말이다.

 

 

3

 

 철학은 우주의 원리나, ‘너 자신을 알라; 따위의 윤리적 경구를 생산해내는, 공학과는 전혀 관계없는 그런 분야가 아니다. 철학에 관심이 없는 공학도라면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말인가? 그야 당연한 거 아냐?” 정도로 치부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인공지능을 만들고 싶다면, 제일 먼저 시작해야 하는 것은 철학자들의 연구로부터 힌트를 얻는 것이다.

 

 철학은 인간이 던질 수 있는 가장 심오한 질문에 대한 학문이다. 우주의 기원이나 존재의 의미 같은 것도 있지만, 역시 전통적으로 인기 있고 핵심적인 질문은 <도대체 인간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세상을 인식하고 생각하는가?>, <자아란 무엇인가?>, <언어는 사고를 지배하는가?>와 같은, 인공지능에서 결국 풀어야 하는 과제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영국의 경험론과 대륙의 합리론으로 구분되는 서양 철학사의 주요 흐름은, 바로 이 문제에 관한 의견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봐도 틀리지 않는다. 즉, 서양 철학이란 <인간 정신의 본질은 무엇인가>에 관한 역사인 셈이다. - 그러니 현재 로봇공학자들이 어렴풋이 질문을 던지는 부분에 대해, 수 천년간의 인류역사를 통해 기라성같은 천재들이 이미 충분히 고민을 해 놓았는데, 어떻게 우리가 이러한 연구결과를 참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특히 인식론, 현상학, 의미론, 언어분석철학 등은 인공지능연구의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의 철학 역시 마찬가지이다. 예컨데 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마음에 관한 연구, 오히려 심리학에 가깝다. 불교의 유식론은 인간이 어떻게 세상은 인식하고 받아들이는가에 대한 연구이며, 감각과 표상을 제거해 순수직관을 얻는 수행을 강조하고 있다. 불교의 기원이 될 수 있는 힌두교 역시 바가바드기타와 같은 책을 보면 수없이 등장하는 마음의 구조와 원리에 관한 비유들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그들의 철학과 종교가 선각자들의 깊은 숙고와 통찰에 기인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실로 데이비드 흄과 쇼팬하우어 등도 이들 동양의 철학서를 늘 옆에 두고 참고하였다고 전해진다.

 

 

4

 

철학과 함께 도움을 받을 곳은 심리학이다. 사실 많은 로봇공학자들은 이미 심리학적 연구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에 관심을 두고 있긴 하다. 그들은 주로 인지심리학이나 지각 심리학, 학습, 교육, 언어 등의 심리학의 전통적인 분야에서 힌트를 찾고 있다. 물론 이는 매우 훌륭한 접근이다. 우리가 지능로봇을 만드는데 아마도 50% 이상은 심리학적인 접근을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것 외에도 사회심리학, 발달심리학, 이상심리학, 성격심리학 등 훨씬 - 거의 대부분의 - 심리학적 연구가 적용되어야 하겠지만. 우리는 로봇을 만드는 것 뿐만 아니라 성장시키고, 학습시키고, 기르고 사회화시켜야 한다. 이는 인간의 아이를 기르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런 만큼 심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적용은 필수적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심리학 중에서, 정신의 본질에 가장 깊은 이해와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는 분야는 의외로 <정신분석학>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일반인들에게는 대체로 꿈의 해석이나 상징,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정도로, 혹은 조금 관심이 있다면 <이드-자아-초자아>와 <의식-무의식>의 존재에 관해 말하겠지만, 사실 프로이트는 정신의 구조와 작동원리에 관해 어마어마한 연구와 통찰을 보여준 사람이다. 정신분석을 통해 신경증을 치료하거나 꿈을 해석하여 정신상태를 파악하는 것은 그의 <심리학적 통찰>을 임상적으로 사용한 것일 뿐이다. 그는 일생을 통해 인간정신의 구조 전체를 편견 없이 파악하려고 노력했으며, 당시로선 유일한 방법이었던 심리학적 (컴퓨터나 뇌 과학이 부족했으므로 - 오히려 결과적으로 그는 가장 적절한 선택을 하였다)인 방법으로 진실에 접근했던 것이다.

 

 신경생리 학자이자 의사였던 그는 모든 과학적, 의학적, 심리학적 방법을 동원하여 정신의 내부구조를 밝혔으며, 그의 <과학적 심리학 초고>를 보면 그가 충분히 자연과학적인(신경회로망에 가까운) 방법도 시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업적은 실로 지대한데, 비유하자면 컴퓨터를 만드는 작업에 있어서 OS(운영체제)의 존재와 작동원리에 대한 기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핵심적인 부분에 대한 연구를 선행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연구결과를 심도 있게 살펴봐야만 할 것이다.

 

 프로이드와 함께 주목해야 하는 사람은 장 피아제이다. 아동교육학자로 유명한 그는 실제로 성장하는 아이들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인간의 인지적 능력이 어떤 단계로, 어떤 방식으로 발달하는지를 정확하게 묘사하였다. 이는 정신의 구조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알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자료이다. 이 밖에도 많은 주옥같은 연구들이 심리학의 분야에 가득하다.

 

4.5

 

상부구조적 측면에서 정신분석과 함께 고려되어야 할 분야는 기호학이다. 특히 찰스 샌더슨 퍼스의 기호학(소쉬르가 아닌)은 의미와 내부 연상과정에 대한 중요한 힌트를 준다. 이는 우리의 정신구조 및 자아가 단지 개인의 테두리 안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주변 인물과 사회로 확장되어 있음을 파악하는데 중요하다. 이 점에 대해선 라깡의 연구도 함께 거론되어야 한다. 인간의 정신은 사실상 언어와 언어가 만들어낸 문화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5

 

 

뇌 과학 역시 중요한 참조분야이다. 우리는 뇌와 그 기능을 직접 관찰함으로써 많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컴퓨터 프로그램을 짤 때, 잘 이해하기가 어렵다면 한 문장씩 지우거나 추가시킨 뒤 실행시켰을 때 결과를 보고, 프로그램을 분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기계나 컴퓨터가 잘 돌아가고 있을 때보다, 뭔가 이상동작을 할 때 우리는 그 구조나 설계 방식에 대해 추측하기 쉽다. 예를 들어 컴퓨터게임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데, 음악파일은 잘 재생한다면, 우리는 무언가 프로그램에 따라 다르게 작동하는 음악재생 모듈이 존재하거나, 컴퓨터 게임의 어떤 모듈이 소리재생을 억제할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더듬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다리가 생긴 초파리를 본다면, 우리는 더듬이와 다리를 만드는 유전자가 따로 존재하며, 이들은 어떻게든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할 것이라 추축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뇌(혹은 신경계 전체)의 다양한 이상과 작동방식을 통해 정신의 원리를 추측할 수 있다. 10초만 지나면 더 이상 기억을 못하는 환자로부터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의 존재를 알아내고, 날아오는 물체를 손으로 잡을 수는 있지만 보이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환자로부터 운동지각과 형태지각이 다른 기작임을 추측한다.

 

 또한 다양한 유전적 질환, 약물에 대한 반응, 전기적 자극이나 해부학적 연구 등으로부터도 역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예컨대 감정을 주관하는 뇌 부위인 아미그달라는 측두엽의 아래 안쪽에 존재하는데, 이는 냄새를 맡는 신경과 바로 연접한 부위다. 우리는 냄새가 즉각적으로 감정적 기억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측두엽은 또한 기억을 관장하는 해마가 있는 부분이다. 감정과 냄새와 기억 - 이들에 관한 중대한 관계는 심리학적, 정신분석적 연구와 일치하며 우리는 로봇의 기억과 학습구조에 대해 이러한 사실을 적용해야만 한다. 그리고 나아가 로봇에게 감정을 부여하기 위해서 - 감정은 옵션이 아니라 필수사항이다. 에어백이 아니라 엔진에 가깝다 - 감정의 의미와 기억에 있어서의 역할을 숙고해야만 한다.

 

 

6

 

진화학을 포함한 생물학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분야이다.

우리는 <모든 형태의 지능>이 아니라, <인간형태의 지능>을 원한다. 인간처럼 갈등하고, 고뇌하고, 어울리고 의사소통하길 원하는 - 때로는 망각하고 실수하며, 창조성을 발휘하기도 하는 그런 지능을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어떻게 그러한 형태의 지능을 획득하게 되었는가. - 이에 대한 대답은 생물학과 진화학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 컴퓨터는 왜 필요하며, 어떤 기능을 하고, 어떤 역사를 거쳐 발달해왔는가를 안다면 컴퓨터를 개발하는 것이 훨씬 쉬울 것이듯이, 우리는 우리의 진화의 역사를 탐구함으로써 인간 정신의 출현과정을 연구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지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생물에게만 있고 무생물에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차이로부터 지능의 본질을 통찰할 수 있다. 또한 동물에게만 있고 식물에겐 없다. 이 사실도 우리에게 무언가 힌트를 준다. 척추동물, 특히 포유류나 고등 영장류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지능이라면, 그들의 구조적 특성이나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것이 많다.

 

 지능은 또한 눈에 보이는 부분 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한 연구도 필요로 한다. 사회성, 협동, 경쟁관계, 계급형성, 구애와 양육 등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봐야만 해석될 수 있는 인간의 많은 행동양식 - 행동양식은 정신의 일부이다 - 을 제외시키고는 도저히 진정한 인공지능을 구현할 수 없다. <구애>의 본질을 모르고서 남녀 간의 미묘한 대화를 로봇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수컷들 사이의 생태학적<경쟁관계>의 이해 없이 남자들의 사회에 팽배한 긴장의 느낌을 읽을 수 있겠는가? <상호호혜>의 사회적 관습 없이 이타적인 행동의 가치에 대해 판단할 수 있을까?

 

 이 모든 다양한 분야, 다양한 논의는 오직 하나의 실질적인 목표를 향해 겨누어져 있다. <진정한 인공지능 로봇을 만드는 것> - 지금까지의 관점을 무너뜨릴 준비가 되었다면,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chap.1   실패


 146cm의 아담한 체구에 미끈한 외양을 한 로봇은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윽고 나무문 앞에서 멈춰 서고는, 손을 뻗어 손잡이를 잡아 돌리고 문을 연다. 그리고 성큼성큼 문을 지나 계단에 이른다. 로봇은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가 내려온다.

 아시모. 일본의 자랑이자 현재 인간형 로봇기술의 최고봉으로 손꼽히는 이 인간형 로봇은 자동차 회사 혼다가 15년이상, 1000억원 이상의 예산을 들여 만든 최첨단 로봇이다. 불가능으로 여겨지던 이족보행을 1998년 아시모의 전신인 P2가 선보인 이래, P3와 아시모를 거쳐 현재의 버전에 이르기까지 혼다의 로봇들은 가장 인간에 가깝고 자연스러운 운동기술을 과시해 왔다.

 

 걷고, 계단을 오르내리고, 회전하고, 수레를 미는 이 로봇의 엄청난 퍼포먼스에 세계는 경악했고, 많은 로봇기술자들이 자괴감에 빠졌다. 혼다는 이족보행로봇 연구를 10년 동안 철저한 비밀에 붙힌 채, 창문조차 없는 연구동에서 끈질긴 개발 끝에 ‘깜짝쇼’를 터뜨렸기 때문이다. 충격에 이어 P2는 세계적으로 엄청난 이족보행로봇 연구의 붐을 일으켰으며, 이어 미국과 한국 등 많은 나라에서 이족 보행 로봇의 개발에 성공했다. 일본 역시 소니나 NTT토코모 등의 대기업과, 와세다 대학을 비롯한 많은 연구소에서 이족보행로봇을 쏟아냈다. 돌파구가 열렸다. 이제 로봇에게 보다 정교한 센서, 보다 많은 행동자료를 입력하면 모든 게 풀릴 것 같았다.

 이족보행 로봇은 혼다가 최초는 아니었다. MIT의 다리연구소에서는 이미 네다리, 두다리, 심지어는 외다리의 로봇이 달리고, 공중제비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재미있는 기계일 뿐, 로봇일 수는 없었다.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로봇은 인간의 형태를 가진 - 두 다리로 자연스럽게 걷는 형태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혼다의 로봇은 우리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온,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인간형 로봇이었다.

 

 혹자들은 인간을 닮은, 인간과 같은 이족보행 로봇이 왜 필요한지 의아해 한다. 바퀴나 6개의 다리를 가진 로봇은 제작하기도 쉽고, 이동이 용이하며 안전하다. 그리고 우리의 일을 돕는 것이 로봇이라면, 로봇은 꼭 인간형일 필요가 없다. 빨래를 위해선 세탁기가, 설거지를 위해선 식기세척기가 있으면 되지 왜 굳이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는 인간형 로봇이 필요할까?(게다가 그들은 세탁기나 식기세척기처럼 효율적이지도 못하다) 어쩌면 이미 우리는 많은 생활 로봇들에 둘러 쌓여 살아가고 있다. 자동차(이동시켜주는 로봇), 세탁기(빨래해주는 로봇), 청소기(청소해주는 로봇), 전자렌지(음식을 데워주는 로봇) 등등. 왜 이런 기능들을 굳이 하나로 통합하려 하는가. 어차피 로봇을 만들어도 로봇은 다시 전자렌지를 이용하지 않고선 음식을 데울 수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인간형 로봇의 개발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 인간형 로봇은 인간을 위해 디자인 된 모든 생활환경에 그대로 인간과 치환될 수 있다. 청소하는 로봇, 빨래하는 로봇, 교육용 로봇을 따로 만들 필요 없이, 인간형 로봇은 그대로 인간이 사용하던 진공청소기와 세탁기, 교과서와 연필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 로봇이 경운기에 타서 운전할 수 없다면, 우리는 밭을 가는 로봇이나 로봇에게 맞는 경운기를 새로 개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형 로봇이라면, 우리는 그에게 경운기 열쇠를 넘겨주는 것으로 해결이다. 인간이 지금껏 사용해온 모든 도구와 기계를 그대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자칫 로봇을 위한 환경과 인간을 위한 환경이 분리될 수 있는 상황을, 인간과 로봇이 자연스럽게 공유하며 어울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인간의 형태인 것이다. 누구든 로봇과 같이 야구시합을 하며 놀 때, 인간과 같은 형태와 시합하기를 원하지 배팅머신처럼 생긴 야구기계와의 경기를 공정하다고 느끼진 않을 것이다.

 

 둘째, 인간의 형태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로봇에 대응하는 법을 알려준다. MIT의 로드니 브룩스는 “코그 Cog 를 처음 봤을 때, 사람들은 코그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코그는 그가 제작한 상반신만 있는 인간형 로봇이다. 코그는 사람을 보면 사람을 향해 몸을 돌리며 눈을 움직이고, 사람들과 눈을 맞춘다. 브룩스가 ‘눈맞춤’이라고 부르는 이 행동은 사람들에게 ‘자신과 유사한 존재’와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런 느낌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대하고 있는 존재가 정체불명의 기계가 아니라, 살아있고 인간과 유사한 존재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 이것은 인터페이스(상호작용)을 위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인터페이스 할 때(혹은 대화할 때) 그 근저에 깔려있는 것은 ‘상대는 나와 같은 인간이다’라는 전제이다. 상대가 나와 같은 욕구와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이 둘 사이의 인터페이스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 남은 사과를 먹다가 누가 들어왔을 때, ‘미안해’ 라고 말하는 것은, 상대도 나와 똑같이 사과를 보면 먹고 싶어 하고, 자신만 먹고 있는 걸 보면 서운하게 느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미안해’라는 대화가 성립하는 것이다.

 우리는 ‘표준 윈도우 프로그램’이라는 인터페이스에 익숙해있기 때문에, 처음 보는 프로그램이라도 각 버튼과 메뉴의 기능을 짐작할 수 있다. 손바닥 모양의 아이콘은 분명히 화면을 이동하는 버튼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수만년 동안 익숙해져 온 ‘인간이라는 형태’의 인터페이스에 익숙해져 있다. 우리는 사람의 형태를 한 존재는, 당연히 우리와 같은 욕구와 습성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짐작한다. 입이 있다면 말을 할 것이고, 손으로는 물건을 건네 줄 수 있을 것이다. - 인간형 로봇이란 바로 이런 인터페이스의 유사성을 제공한다.

 이런 인터페이스의 유사성은 우리가 왜 인간형 로봇에 충격을 받는지 설명해 준다. 로봇은 인간형이라는 이유만으로, 인간처럼 걷고 만들고 말할 것이라는 기대를 준다. 그것은 기존의 자동 용접 로봇을 엄청나게 뛰어넘은 것으로 보인다 - 단지 외양만을 바꾸었을 뿐인데!

 

 그러나 기대가 주는 배신감은 더 큰 법이라던가.

 

 외양이 주는 기대가 단지 환상임을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다. 엄청난 버튼과 메뉴로 가득한 프로그램이, 우리가 버튼을 클릭했을 때 아무런 기능이 없는 버튼만을 단지 만들어 놓았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새삼스레 당연한 진리를 되새기게 될 것이다. - 반짝인다고 다 금은 아니다.

 

 아시모는 열고 지나가야 할 문을 인식하고, 손잡이를 잡아 문을 열고 지나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확하게 그렇게 행동하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었다. 정확한 속도로 몇 발짝을 걸은 뒤, 정해진 위치에 손을 뻗고 일정하게 돌린 뒤 밀도록 미리 사람이 프로그램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아시모는 거기에 문이 없었더라도 똑같이 문을 여는 행동을 하고 지나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것은 장님이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로 정확히 연습한 데로 움직이는 것과 유사하다. 계단도 마찬가지이다. 아시모는 계단을 인식하고 오르내린 것이 아니라, 정해진 위치에 가면 계단을 오르내리는 계산된 동작을 한다. 계단은 반드시 거기에 있어야만 한다.

 

 ATR 교토 연구소. 이곳에서는 매우 정교한 움직임을 보이는 로봇 DB2가 있다. 미국 사르코스 사에서 제작한 몸체는 고정된 채로 세워져 있지만, 그 손놀림은 마치 정말 살아있는 사람같다. 연구소에서 제작한 동영상을 보자. DB2는 두 손에 막대를 들고 있다. 그리고 세 번째 막대기를 두 막대 위에 올리더니, 마치 서커스단의 광대처럼 능란하게 막대의 양쪽을 번갈아 쳐 올리면서 지글링을 한다. 사람보다도 훌륭한 솜씨다. 이어 손에 컵을 들고 있고, 컵 아래에는 테니스 공만한 공이 실로 매달린 채 길게 늘어져 있다. DB2는 잽싸게 손을 흔들어 공을 위쪽으로 튕겨 올려내고 그 공을 바로 컵 위에 정확히 올려 받는다. 보기에도 쉽지 않아 보인다. 로봇은 정확하고 민첩한 솜씨로 정교한 운동능력을 - 그리고 그런 행동을 하려면 빠르고 정확한 감각능력도 필요로 한다 - 보여주고 있다.

 

 DB2는 어떻게 그런 것을 할 수 있을까? 비록 말을 하거나 지능적이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감각의 운동의 협업만큼은 놀라운 수준에 이른 것일까? - 아니다. DB2의 동영상은 아시모의 경우와 같다. 이 놀라운 동영상의 제작 과정을 살펴보자.

 

 먼저, 각 관절에 센서를 단 사람이 지글링을 한다. 이 움직임은 모션캡처되어 컴퓨터에 그대로 입력된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그대로 DB2에게 입력되어 따라하게 된다. 즉, DB2는 역시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지글링을 하는 사람의 팔 움직임을 똑같이 복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로봇의 손에 막대를 쥐어 준다. 그리고 지글링을 시켜보면, 대부분은 실패하겠지만 그중 몇 번은 사람처럼 지글링을 하게 된다.(운 좋게 그 움직임과 막대가 잘 맞아떨어지면) 그러면 당연히 그 성공의 사례만이 동영상으로 공개된다. 공을 컵으로 올려 받는 것도 마찬가지의 방식이다.

 

 

 한국 KAIST의 로봇 아미 Ami 는 이족보행로봇은 아니지만, 긴 치마를 입은 사람과 유사한 외양을 하고 있다(치마 아래쪽에는 바퀴가 있어 미끄러지듯 움직인다) 초보적이지만 팔과 목을 움직이고, 가슴에 있는 LCD패널을 통해 몇몇 표정의 얼굴을 디스플레이한다. 아미는 TV쇼 프로그램에 나와 진행자들과 대화를 한다. 기계음으로 ‘나는 예쁜 누나가 좋아요.’등등 재치있는 대화를 하며 사람들을 감탄시켰지만, 그 대화는 로봇이 한 것이 아니다. 원격에서 사람이 말해준 것을 기계음으로 재생한 것에 불과하다. 물론 움직임도 원격조종이다. 즉 아미는 바퀴달린 원격조종 전화기(?)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행동기반과 포섭구조라는 패러다임의 혁명으로 로봇연구의 스타로 부상한 로드니 브룩스의 로봇 젠기스 Gengis 는, 이러한 프로그램되어진 로봇에 대한 노골적인 반기를 든다. 8개의 다리를 가진 벌레 모양을 한 50cm가량의 이 로봇은, 아무런 외부의 조종에 의하지 않은 채 독자적으로 복잡한 방안을 걸어 나간다. 그 걸음 역시 설정된 ‘걷기 프로그램’에 의해서가 아니라, 센서로부터의 얻은 감각을, 단순한 규칙에 의해 움직이는 다리의 모듈에 전달하여 자연스럽고 복잡한 걸음을 수행한다.

 

 50년대 행동주의 심리학파를 연상케 하는 ‘마음(컴퓨터)의 존재를 부인하고 감각과 행동에 대한 연결’만을 통해 기존의 로봇들보다 훨씬 강력한 네비게이션(주어진 환경에서 이리저리 이동하는 것) 능력을 보여준 브룩스의 로봇들은, 한계에 도달한 듯한 인공지능 로봇 연구에 새로운 돌파구를 보여준 듯 했다. - 그러나, 한계는 또한 바로 거기까지였다. 곤충과 같은 단순하면서도 빠른 행동을 보여주는 로봇을 만들기 위해, 그는 곤충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그리고 곤충과 같은 성과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곤충정도의 수준이 그의 방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한계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포섭구조는 효율적인 근육운동의 모델일뿐, 정신의 구조에 대해선 아무것도 말해주는 것이 없었다.

 

 브룩스는 국방부 DARPA 로부터 600만 달러의 지원을 받아 인간형 로봇 코그를 만들었다. 코그는 젠기스에서 보여준 것처럼, 위에서부터 top-down 가 아닌, 아래로부터 bottom-up 방식의 접근이 이루어졌다. 즉, 목표지점까지 가기 위해 이동경로를 산출하고, 이에 따른 다리의 움직임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다리의 각 근육의 움직임이 서로 상호작용하며 ‘걸음’을 창발해내는 방식으로. 물론 코그는 하반신이 없기 때문에, 네비게이션보다는 사람과의 상호관계 쪽에 중점을 두었다. 브룩스는 사람의 지능을 모방하기 위해서는 사람 자체를 연구하고 모델로 삼아야 한다는 점을 알았고, 그래서 발달심리학에 기반한 가장 기초적인 상호작용 - 눈맞춤, 시선이동, 제스추어 모방 등의 행동모듈부터 개발하였다. 그래서 코그는 아미처럼 유쾌한 농담은 하지 못할지언정, 사람을 보면 얼굴을 쳐다보며 시선을 옮기고, 그의 행동에 반응하여 따라하는 동작을 한다. 이런 움직임의 특성들은 보는 사람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다. 코그를 대하는 사람은, 이 로봇이 초보적이기는 하나 자신에게 반응하는, 살아있는 무엇처럼 느끼게 한다. 코그의 움직임은 기본적으로 유아의 행동을 모방한 것이기 때문이다.

 

 미디어 랩의 신시아 브리질이 제작한 인형로봇 레오나르도는, 50cm정도의 털복숭이 인형이다.(마치 영화 <그렘린>에 등장하는 변신전의 동물, 기즈모를 닮았다) 레오나르도는 감각을 느끼는 피부를 가지고 있어서, 사람이 만지거나 하면 커다란 귀와 눈을 움직이며 반응한다. 사람이 다가가면 시선을 움직이며, 접촉에 꿈틀대며 반응하는 레오나르도를 접한 사람은 이 로봇이 살아있는(외양도 포유류처럼 생겼다) 존재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브리질 교수는 이전에 키스멧 Kismet 이라는 얼굴로봇으로 사람과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연구한 바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이다. 인간적 특성의 모방으로부터 구현하겠다는 접근은 좋았다. 그러나 가장 기초적인 몇몇 특성을(눈에 보이는) 모방했지만, 거기서부터 대화를 하고, 논리퀴즈를 푸는 사람의 지능까지 어떻게 연결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철판을 두드려 컴퓨터의 케이스만을 만드는 것은 충분치 못하므로, 진짜 컴퓨터처럼 보이려면 전원 버튼을 누르면 LED전구가 깜박거리면서 팬이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만들었다. 처음 얼마동안, 정말 컴퓨터가 부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국 거기까지이다. 더 이상은 진행되지도 않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물론 좀 더 관찰하고 노력하면 화면에 윈도우즈 로고가 뜨게끔 흉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들은 진실과는 너무나 먼 거리에 있다. 여전히 컴퓨터의 원리에 대해서는 거의 접근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인공지능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존 매커시는 “우리는 결국 기계에게 상식을 부여해야만 한다”며 자조적인 선언을 하였고, 브룩스 역시 “우리는 뭔가 중요한 것을 빠뜨리고 있다.”며 한계에 부딪힌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는 로봇청소기가 선풍적으로 팔리고 있다. 정부에서는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지능형 로봇을 선정하고 집중육성 정책을 고민한다. 각 지자체는 서로 로봇연구센터나 기업을 유치하려고 경쟁이 치열하다. 정부에서는 각 가정에 1대씩의 네트워크 기반의 국민로봇을 보급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다. 국방부에서는 미래의 전투를 위해 견마형 로봇을 개발하겠다고 발표한다.

 

 로봇산업의 장밋빛 전망일까?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런 알맹이가 없다. 로봇청소기는 로봇이라기보단 자동청소기일 뿐이다. 그것은 기존의 진공청소기의 개정판이다. 아무도 청소기에 대고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한때 광고하던 인공지능 세탁기가 전혀 ‘지능적’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기업들은 섣불리 뛰어들지 않고 있다. 지능형 로봇의 시장이 아무래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지자체가 앞다투어 건설한 로봇연구센터에는 기업들이 입주하지 않는다. 가정용 로봇을 만들어도 팔리지 않는다. 도무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는 것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기능 때문이다. 집안의 문단속을 원격으로 확인하기 위해 꼭 네트워크 로봇을 거칠 필요는 없다. 그건 이미 전화기로도 가능한 기능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정책을 이끌고 있는 정부의 관계자나 연구원들조차, 무엇이 로봇시장을 일으킬 수 있는 킬러 애플리케이션인지 모르고 있다. 그리고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지능형 로봇에 대한 개념조차 명확히 서있지 않으며 무엇을 어떻게 진행시켜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맹목적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실패가 반복되고 있다. 50년전, 마빈 민스키는 ‘수년 내로 우리는 인간과 같이 생각하는 로봇을 갖게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의 사회>구상은 실패했다. 1980년대, 신경회로망의 역전파 학습법이 나왔을 때, 신경회로망의 한계를 극복하여 인공지능의 새로운 장이 열리리라 기대했었다. 그러나 여전히 신경회로망은 실험적인 분야이다. 브룩스가 행동기반 로봇을 제작했을 때, 역시 인공 지능에 대한 돌파구라고 여겼다. 그러나 행동기반 로봇은 행동만 있을 뿐, 지능은 없었다.

 

 지능형 로봇에 대한 연구는 시작하기도 전에 삐걱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지능형 로봇의 난점은 연구의 진행에 따라 최근에야 비로소 그 어려움이 알려진 경우가 아니다. 그것이 어렵다는 것은 이미 2천년동안 논의되어 왔다. 그저 로봇공학자들만 몰랐을 뿐이다. 마치 혼자 열심히 계산하다가 ‘원주율은 정확하게 값을 구할 수없는 게 아닐까.’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 시골의 독학자와 유사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대견한 일이지만, 그건 이미 수백년 전에 밝혀진 내용이다. 그가 조금만 책을 찾아보았다면 많은 수고를 덜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학문 간의 단절에서 기인한다. 컴퓨터 과학이나 로봇공학자들은 자신이 씨름하고 있는 분야가 철학적 문제라는 것을 최근에 깨닫고 있다. 그리고, 조그마한 뱀의 꼬리를 잡아당기다 보니 거대한 공룡의 몸통이 딸려 나오더라는 사실과 함께.

 

 쉬울 것 같은 문제가 사실 거대하고 본질적인 문제임이 밝혀지는 것은 그리 드문 경우가 아니다. 미 국립 암센터는 30년간 수 억 달러의 연구비를 쏟아 부은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 ‘생각했던 것처럼 쉽지 않더라’. 암은 단지 치료해야 하는 질병이나 신체의 고장이 아니라, 인간의 발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말하자면 다세포생물의 본질적인 기능의 일부였던 것이다. ‘이 말은 거짓말이다.’라는 다소 아리송한 말장난은 단순한 논리적 장난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실은 수학체계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균열이었음을 괴델이 ‘불완전성 이론’으로 밝혀내었다. ‘외계인에게 왼쪽을 어떻게 가르칠까’ 하는 질문은 결국 우주의 전하, 시간, 패리티 대칭성을 파탄시켜야만 가능한 문제임이 드러났다. 고온의 용광로의 온도를 어떻게 잴까, 하는 문제는 뉴튼의 역학체계를 완전히 뒤엎는 양자역학의 탄생을 촉발시켰다. 사람과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다면, 이라고 간단하게 제시한 튜링의 테스트는, 처음에는 간단한 프로그램으로 가능하리라 믿었지만 오늘날 그 어떤 시스템도 불가능한 인간정신의 본질적 기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능형 로봇을 만든다는 것, 즉 진정한 인공지능을 만든다는 것은 인간의 지능의 원리를 밝혀내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극도로 어려운 작업이다.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가장 거대한 두 가지 문제가 ‘왜 우주는 이런 식으로 존재하는가’와 ‘나는 무엇인가’라면, 인공지능의 연구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문제 중 하나(두 번째 질문)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지능로봇 연구실의 학생들은, 이미 인류의 가장 심오한 문제에 대해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 그 사실을 자신이 의식하고 있든 아니든 간에.

 

 예전 대학원 수업시간에, 영한 번역 시스템을 구축하시려던 교수님이 자신 있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수한 학생들이 있고, 연구비를 투입한다면 물건은 나오게 되어 있다.” - 대체로는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도 있다. 번역은 인간 지능의 고차원적인 기능이다. 설계도 되어 있지 않은 건물의 펜트하우스부터 지으려 하면 가능할까? 과연 그 교수님은 걸어다니는 기능이 번역을 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무튼 쓸만한 영한번역기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 * *


 

 수도꼭지를 떼어가려 했던 족장들의 오류는 무엇일까.

 

 이들은 수도꼭지가 물을 만들어낸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피상적으로 인식한 결과이다. 그들은 수도꼭지 너머에 있는 거대한 시스템을 알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작은 수도꼭지만을 주시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 물이 나오는 수도꼭지를 가지려면, 그전에 상하수도 배수관을 묻고, 집수와 정수 시설을 만들고, 하수처리 시설을 건설하고, 나아가 상수도용 댐을 건설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댐을 설치하기 적절한 위치를 찾기 위해 지리학적 탐사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

 

 인공지능을 얘기할 때, 이 우화가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수도꼭지를 보지 말고 그 뒤의 거대한 체계를 보라. 그러므로 우리가 논의를 시작해야 하는 부분은 수도꼭지가 아니라 (로봇이 아니라) 저 산속에 있는 강(인간의 정신)인 것이다.

 

이후에 계속.....

 

2006

 

 

 

 

요약

 

 프로이트의 1차과정 이론과 헵의 신경세포 학습법칙에 기반한 '스트레스-감정 학습이론'에 따라, 음식과 독이 존재하는 2차원 평면 세계 속에 존재하는 감정기반 학습 로봇을 시뮬레이션 하였다. 로봇은 2중 피질구조와 표상을 나타내는 인폰(infon)의 연결주의적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유아의 성감대 전이에 관한 학습이론이 적용되었다. 로봇은 자발적으로 음식을 찾고 독을 피하는 효과적인 운동방식을 터득하는 것이 목적이며, 몇몇 시뮬레이션 결과 흥미로운 운동패턴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본 연구는 2003년도에 이루어진 것으로, 개인용 컴퓨터에서 제작된 프로그램으로 시뮬레이션 하였다. 본 연구를 이해하기 위해 나의 다른 글, <감정의 원리 - 스트레스와 감정>과, <인공지능을 위한 성>, <감정기반 학습 알고리즘 : 인공변연계의 구상>을 참조하라.

 

 

 

 

시뮬레이션 세계의 설계

연구 중인 '진화와 심리학에 근거한 지능체'의 효용을 검토하기 위하여, 이론의 핵심만을 구현한 로봇과 학습과 생존에 필요한 세계(world)를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하였다.

 

세계::총괄

로봇이 탐색해야 할 세계는 2차원 행렬로 된, 평면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임의로 구성된 가로줄과 세로줄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먹이는 그 교차점에 위치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좀 불규칙적인 체크무늬로 이루어져 있다. 독은 임의의 점에 위치하며, 독의 위치로부터 감쇄되는 ‘악취’를 주변에 방사형으로 야기시킨다.(음식은 아무런 향기를 발산하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먹이의 위치로부터 상하좌우로 뻗어나간 선이, 향기의 역할을 한다.) 세계의 크기는 50*50에서 200*200까지 다양하게 시도했으며, 지도의 상단과 하단이, 좌측과 우측이 연결되기 때문에 사실상 무한히 이동할 수 있는 구조이다.

 

줄무늬와 먹이는 일관된 구조를 이루기 때문에 하나의 세계로 되어 있으나, 독과 악취는 또 다른 행렬상에 독립적인 세계로 주어진다. 왜냐하면, 먹이와 독의 존재는 독립적이기 때문이다. (위치상의 배타성을 제외하면.) 독립적인 자극의 분포는, 독립적인 세계를 의미한다. 즉 우리는 후각세계, 미각세계, 촉각세계, 명암세계 등을 따로따로 가지고 있다.(하나의 감각계는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우리는 그것들을 통합하여 하나의 세계로 인지하는 것이다.(본 글에서는 독을 포함한 실험결과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 결과는 추후 다른 글에서 다루겠다.)

 

세계::줄무늬

 

 세계를 학습하고 적응한다는 것은, 세계의 규칙을 이해하고, 이에 따라 효과적인 행동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해라든가 선택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선 접어두고, 일단 로봇이 효과적인 행동을 보인다면 이해하고 선택한 것이라고 말하도록 하자.

 

 만약 음식이 무작위적으로 배치되어 있다면, 로봇이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은 없다. 그는 세계로부터 어떤 일관성도 제공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저 한 방향으로만 계속 가는 것이면 충분하다. 거기에는 어떤 학습이나 지능도 필요 없으며, 그저 프로그램된 본능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세계가 일관된 구조를 제공할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예컨대 음식에서 냄새가 난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로봇은 무작위로 달릴 게 아니라, 냄새가 나는 방향, 냄새가 점점 강해지는 방향으로 움직이면 보다 효과적으로 음식에 도달할 것이다. 여기에 일관성이 요구된다. 즉 1)음식이 있으면 냄새가 난다. 2) 냄새는 음식에 가까울수록 강해진다. 3)냄새는 모든 방향에 동일한 방식으로 전파된다. 이런 일관성으로부터 로봇이 냄새를 감지하는 순간 그쪽을 향한다면, 이는 보다 지능적인 대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지능을 배제할 수도 있다. 단순한 본능으로도 음식을 향할 수 있다. 유명한 ‘수레’의 예에서 보았듯이, 좌측 센서의 감지신호를 우측 바퀴에 전달하는 방식만으로도, 로봇은 방사형 감각에 대해 그 근원을 향해 움직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내재된 방식을 제거하고, 순수히 학습에 의해 찾아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지도. 교차점의 밝은 점은 음식, 붉은 점은 로봇이다. 로봇이 지나간 교차점에는 음식이 없어진다.


 

 줄무늬는 이러한 일관성의 일환이다. 가로, 세로의 줄무늬는 무한히 뻗어 있고, 음식은 줄무늬간의 교차점에 존재하므로, 가장 효과적인 행동패턴은 줄무늬를 발견하는 순간부터 줄무늬를 따라 직선운동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줄무늬 위의 음식은 한계가 있으므로(로봇이 음식에 도달하면 음식은 소모된다.), 더 효과적인 방식은 때때로 교차점에서 다른 줄무늬를 따라가거나, 계단식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로봇

 

로봇::시야

 

 로봇은 크기를 갖지 않는다. 즉, 행렬상의 하나의 점이다. 로봇은 직진하거나, 멈춰있거나, 좌로 회전하거나, 우로 회전하는 네 가지 운동 상태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로봇은 세계와 음식물에 대한 감각을 갖는다. 즉, 로봇을 중심으로 5*5의 시야를 갖는다. 로봇은 자기 주변의 25칸에 대한 정보를 이용할 수 있다. 이 시야 내에서, 일반 공간은 0, 줄무늬는 1, 먹이는 2로 표현된다.

 

 로봇은 또한 몇 가지 다른 감각을 가지고 있다. 1)에너지, 2)스트레스, 3)감정, 4)먹이의 접촉여부, 5)자신의 운동 상태가 그것이다.

 

로봇::에너지

 

로봇은 에너지가 0이 되면 죽는다. 에너지는 서서히 감쇄되며, 이동시에는 더욱 감쇄된다. 음식을 먹으면 올라가고, 에너지가 일정 수준 이하가 되면 감각기관은 신호 - 스트레스 - 를 발생시킨다. 에너지가 낮아질수록 스트레스의 유입은 증가된다.

 

로봇::감각피질

 

로봇의 감각정보는 피질을 거쳐 범주화된다. 줄무늬 시각의 경우, 25칸에 대해 3가지 가능성이 존재하므로 3의 25승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는 지나치게 많은 수준이며, 특히 그런 가능성들 중 대부분(줄무늬가 중간에 끊긴다거나)은 실제로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로봇이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의 최대크기를 200가지로 제한하였다. 이것이 1차 피질의 크기이며, 로봇의 상황감각의 인지력은 이 크기에 제한된다. 로봇은 시야상황의 모든 경우를 일단 200가지 기억패턴중 하나로 결정해야 한다.

 

 1차 피질로 제한하는 것 역시 너무 많은 자유도를 준다. 1차 피질을 거친 정보는 또 그 빈도와 유사성에 의해 2차 피질을 거치면서 더욱 압축된다. 2차 피질에서 표현되는 표상의 수는 50개로서, 로봇이 인식가능한 상황은 1/4로 줄어든다. 만약 더욱 복잡한 감각계를 가진 존재라면, 피라미드식 계층구조의 피질구조로 인해 인식가능한 표상은 체계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로봇::운동피질

 

 감각뿐 아니라, 운동에도 체계화가 필요하다. 물론 이 로봇은 네 가지 운동 상태 밖에 갖지 않지만, 실제 동물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만약 중추신경이 ‘앞으로 달려라’라는 명령을 내리면, 이 정보는 운동피질을 거치면서 세분화되고 구체화된다. 앞으로 달리라는 명령은 허리와 앞다리, 뒷다리를 교차하며 움직이라는 명령으로 세분화되고, 앞다리를 움직이라는 명령은 상박을 위로 돌리며 하박을 쭉 펴고, 발꿈치를 뒤로 당기라는 명령 등으로 세분화된다.

물론 발꿈치를 펴라는 명령 역시 뒤꿈치에 연결된 근육을 수축시키고, 반대쪽 근육을 이완시키라는 등의, 매우 구체적인 근육운동으로 환원된다. 이렇듯 정교화된 일련의 운동을 함수화하여 저장하고 수행하는 것은 소뇌의 역할이다.

 이 로봇의 경우엔 근육이 세 개(좌로, 우로, 앞으로)밖에 없기 때문에 운동이 공간적으로 세분화되진 않는다. 그저 ‘앞으로 계속가라’는 직진을 연속 3번 한다거나, ‘뒤로 가라’는 좌로 두 번 돌고 앞으로 한 칸 가는 정도로 분해된다. 물론 이 운동 피질의 형성 역시 학습을 통해 이루어진다.

 

로봇::표상 pool

 

로봇의 핵심 구조이다.

 

 감각기관과 피질을 거친 정보는 하나의 표상으로 집약된다. 이 때 표상을 나타내는 단위는 신경세포처럼 활성화되고, 그 활성을 연결된 다른 표상단위로 전파한다. 그 형태의 유사성은 있지만 이 표상단위는 신경세포 그 자체는 아니다. 아마도 일단의 신경세포의 집단으로 이루어진, 단일한 표상을 담당하는 추상적 존재일 것이다. 이에 대한 명칭이 필요하겠으나, 일단은 표상단위라고 부르겠다.

 

 

 

표상풀

 

 표상 풀은 수많은 표상단위들이 끊임없이 흥분을 전파하며 출렁거리는 바다의 표면과도 유사하다. 물이 출렁거리는 풀장을 떠올려보라, 한쪽에선 물이 간헐적으로 흘러들어오는 유입구가 있고, 반대쪽에는 수면 가까이 물이 빠져나가는 구멍들이 있다. 물이 흘러들어오는 패턴에 따라 수면은 요동친다. 그리고 그 요동에 의해 유출구로 물이 흘러 나간다.

 

 유입구는 감각표상들에 해당한다. 유출구는 운동표상이다. 내부의 물은 말하자면 뇌의 연합뉴런 - 입력과 출력간의 관계를 제어하는 내부구조이다. 이들 역시 똑같은 표상단위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감각표상단위가 50개, 출력표상단위가 20개, 연합표상단위가 30개라면, 이 100개의 표상단위가 로봇의 뇌를 연합령을 구성하며, 표상풀이 된다. 이들 연합표상단위는 뉴럴넷의 은닉층에 해당하지 않는다. 이들 간의 연결은 층위를 이루지 않으며, 입력단과 출력단은 때로는 직접, 때로는 많은 단계를 거쳐서 이루어진다.

 

 모든 표상단위는 서로 연결가능하다. 즉, 연결가중치 행렬은 100*100이 될 것이다. 가중치는 초기에 동일하게 주어진다. 물론 인위적으로 특정 가중치간의 연결을 강화시켜 놓을 수 있다. 이 경우, 어떤 입력표상에 대해 어떤 출력표상이 선호될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본능이 된다.

 

로봇::흥분

 

뉴럴넷과 유사하게, 표상단위는 일정량 이상의 입력이 유입되면 흥분한다. 흥분은 시간에 따라 감쇄하며, 자신의 흥분을 연결된 다른 표상단위에 전파한다.(물론 가중치를 적용해서) 동시에 흥분해 있는 표상단위간의 연결 가중치는 강화된다.(헵의 규칙) 그러나 가중치는 기본적으로 천천히 감쇄하기 때문에, 적절하게 강화되지 못하는 연결은 결국 소멸하게 된다.

 

 가중치가 일정수준 이상을 넘어서면 영구화된다. 그러나 헵의 규칙에 의해 이 수준에 이르려면 수많은 동시흥분이 필요하기 때문에, 영구화되기에 보다 효과적인 방법은 감정을 이용하는 것이다.

 감정이 발생하면, 현재 흥분이 남아있는 모든 표상단위간의 연결이 매우 강화된다. 이는 한 두차례만의 감정만으로 영구화에 이르게 될 만큼 강하다. 그러나 모든 감정이 똑같은 양으로 강화시키진 않는다. 극적인 감정이 극적인 강화를 만든다.

 

로봇::변연계

 

 변연계는 스트레스의 변화를 감시하여 감정을 일으킨다. 감정은 표상풀로 전달되어 연결을 강화시킨다. 이에 대해선 다른 글, <감정의 원리 : 스트레스와 감정>을 참조하라.

 

 

로봇::학습기

 

 피질의 형성을 위해, 로봇에는 학습의 기간이 주어진다. 학습기는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신체기에 해당한다. 이 때 감각인식 자체가 흥분을 일으키므로, 모든 감각상황에서 피질의 형성이 일어난다. 1차감각피질의 형성이란, 25개의 시야를 포함한 모든 감각자극들로부터의  200가지 패턴을 추출함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는, 가능한 감각자극의 조합들의 200순위까지의 경쟁을 말한다. 즉, 어떤 감각상황이 자주 발생할수록, 이들의 순위는 올라간다.

 

 

로봇::스트레스와 감정

 

이 모델에서 로봇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 에너지의 부족 뿐이다. 에너지가 일정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급격히 스트레스를 생성한다. 그러므로 감정이 발생하며, 이 감정은 ‘배고픔’이 될 것이다. 음식물에 도달하면 에너지가 회복되고, 스트레스의 유입은 급격히 줄어든다. 이 때 감정이 발생하며, 이 감정은 ‘포만감’일 것이다.

 

로봇::운동피질

 

운동피질은 <하나의 운동패턴>을 <몇 개의 기본운동의 연합>으로 매칭시키는 구조이다. 이 피질의 형성과정은 1차 감각피질의 형성과 유사하다. 다만 감각자극이 몇 개의 순차적인 운동신호로 바뀌었을 뿐이다. 감각의 경우엔 여러 신호가 동시에 접수되지만, 이 로봇의 경우에 운동신호는 오직 네 가지 운동신호(정지, 앞, 좌로, 우로)가 있을 뿐이며, 이들 운동이 동시에 일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사실상 하나의 근육밖에 없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로봇의 운동패턴은 ‘여러 근육의 협업’이 아니라, ‘하나의 근육의 순차적 패턴’이 된다. 즉 감정이 발생하기 직전(단기기억 상태)의 근육 움직임의 기억(자신의 운동신호 방출 자체가 감각입력으로 피드백 된다.)이 하나의 패턴으로써 운동피질에 저장된다. 이를 빈도에 의해 정렬하면, 감정이 발생하기 전에 주로 했던 행동이 패턴으로써 기억된다.

 

 

결과

 

결과::시뮬레이션 과정

 

본 시뮬레이션을 수 십차례에 걸쳐 시행했으며, 이에 적절한 초기 에너지 값, 감쇄파라미터, 먹이의 빈도 등 수많은 초기값은 경험적으로 정하였다. 초기 에너지가 너무 적으면 학습이 충분히 일어나기 전에 죽고, 너무 많으면 안 죽거나 역시 적절한 학습 기회를 놓치곤 하기 때문이다. 결과는 세계행렬상의 대상들과 로봇을 시각적(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하였으며, 매 턴마다 에너지상태, 움직임과 주요 사건(감정발생, 음식섭취)들을 로그 기록하였다.

 시뮬레이션 후에는 에너지, 스트레스 등의 변화를 그래프를 통해 관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학습의 성패를 볼 수 있는 것은 로봇의 움직임으로, 수차례의 시뮬레이션 결과 다음과 같은 형태의 로봇들이 관찰되었다.

 

결과::무작위형

 

 어떤 규칙성도 찾기 힘들만큼 무작위적으로 움직이는 경우이다. 로봇은 히스테릭하게 움직이다가 우연히 음식을 먹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패턴을 보기는 힘들고, 운동의 무작위성으로 인해 멀리 움직이지도 못하다가 사망한다.

 

결과::단순 반복행동형

 

 아주 단순한 행동의 반복으로 고착된다. 예컨대, 좌로 세 칸, 우로 세 칸을 무한히 반복하는 식이다. 처음엔 무작위적으로 움직이다가 어떤 이유로 단순반복에 고착되면, 죽을 때까지 이 운동만을 반복한다.

 

결과::복잡 반복행동형

 

이리저리 움직이며 먹이를 한 두번 먹다가, 복잡한 반복운동으로 고착된다. 즉 일정한 크기의 폐곡선 상을 회전한다거나, 20회의 움직임 정도를 주기로 복잡한 운동을 반복하거나 하는 식이다. 관찰하기에 매우 재미있으며, 이른바 연쇄기억을 형성할 수 있는 운동패턴의 길이를 보여준다.

 

결과::직선운동형

 

무작위 운동으로 음식을 접하고, 줄무늬를 따라 직진운동을 배운 경우이다. 흔히 나타나며, 계속적 직진운동만을 고집하다 사망한다. 효과적이긴 하나 최초의 학습으로부터 진전하지 못한 경우다.

 

결과::다양한 직선운동형

 

역시 줄무늬를 따라 움직이나, 반대방향으로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때론 교차점에서 회전하여 다른 줄무늬를 타기도 한다. 꽤 이상적인 학습결과이다.

 

결과::계단운동형 

 

복잡한 지형에서의 다양한 섭식경험 후, 로봇은 줄무늬를 따라 계단식으로 움직인다. 즉, 교차점을 만나면 음식을 먹은 후 회전한다. 가장 이상적인 방식이며, 루트 상에 음식이 떨어질 때까지 움직이다 사망한다.

 

결과::학습의 구조적 결과

 

사망한 로봇의 두뇌를 해부해 보자. 그러면 피질과, 표상풀을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들을 관찰한다고 해서 무언가를 얻어내긴 어렵다. 다만 학습이 잘 이루어진 로봇의 경우엔 피질을 거의 다 활용했으며,(학습이 안 되거나 단순반복에 고착된 로봇은 피질의 일부가 쓰이지 않기도 한다.) 표상풀의 연결이 일부만 남고 상당수 소멸했음을 보여준다. 마치 인간이 성장함에 따라 시냅스가 점차 제거되는 것과 유사하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정량적으로나 정성적으로 측정하기는 요원하며, 이에 대한 방법론의 정립이 필요하다.

 

 

학습 전의 표상풀의 가중치 패턴

 

학습 후의 표상풀의 가중치 패턴

 

 

의미 

 

 그러므로 현재 본 시뮬레이션을 평가할 수 있는 방법은 로봇의 행동밖에 없다. 결과에서 말했듯, 시뮬레이션 결과는 본 모델이 의도한 데로, 로봇에게 스스로 세계를 배우고 행동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일부 사례에서는 매우 지능적으로 보이는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고무적이라 할 수 있었다.

 

특히 본 모델은 가장 기본적인 행동패턴이나 학습방향조차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표상의 생성과 행동의 학습까지 단일한 메커니즘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 그리고 생리학적/심리학적인 원리로부터 도출된 시뮬레이션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으며, 본 결과는 이와 같은 방식이 크게 잘못된 부분이 없다는 것, 다시 말해 앞으로의 연구에 있어 기본적인 구조로 채택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류기정 2006. 8

 

rei@post.com

 

키워드 : 정신분석, 인공지능, 로봇, 반복, 음악

 

행동으로서의 불안함

 

책상을 마주보고 두 남자가 앉아 있습니다. 한 남자는 몸을 뒤로 비스듬히 기댄 채 뒤로 팔베개를 하고 있고, 맞은 편 남자는 약간 웅크린 채 다리를 계속 떨고 있습니다. - 얼핏 이 장면을 보기만 해도, 우리는 이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팔베개를 한 남자는 여유롭고 자신만만한 반면, 다리를 떨고 있는 남자는 불안하고 초조해 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심리상태는 무의식적인 제스쳐와 행동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초조한 사람의 행동은 어떤 것일까요?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다리를 떨거나, 손톱을 깨물거나,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거나, 펜을 돌리거나,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치거나, 혹은 몸을 앞뒤로 흔들기도 합니다. 이러한 행동들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 행동들을 그 사람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 것일까요?

 

초조, 불안할 때 나타나는 행동의 특성은 <반복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일정한 동작을 리드미컬하게 반복합니다. 그런 행위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런 반복적인 동작들이 불안감을 덜어주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기가 울며 보챌 때에도, 어머니들은 손으로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며 반복적인 노래를 불러주곤 합니다. 그러면 아기는 금새 안정을 찾곤 하지요. 반복적으로 껌을 씹는 행위는 불안감의 표출이기도 합니다. 마음이 심란할 때, 산책이나 조깅을 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불안감이 가시기도 합니다. 즉, 어떤 반복적인 행동은 사람의 불안감을 덜어주는 기능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반복적인 행동이 불안감을 줄여준다’라는 명제를 고찰하기 위해서는 우선 질문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반복적인 행동’의 범위는 무엇인지, ‘불안감’이 무엇인지, 그리고 ‘줄여준다’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불안의 생리학적 의미

 

우선 불안이 뭔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불안은 정신분석적으로 말하자면 리비도 과잉집중으로부터 형성된 감정으로, 일종의 불쾌감입니다.(물론 프로이트의 후기이론에 따르면 불안은 보다 고차원적인 자아의 기능으로 취급되어 지지만, 여기선 병리학적인 만성 불안이 아니라 일시적인 불안감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불쾌감은 정신적 긴장(이는 신경생리학에서 말하는 뉴런의 흥분과 다르지 않습니다.)이 급격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쌓인 상태이며 이는 긴장의 방출(근육이나 다른 뉴런으로)을 통해 해소될 수 있습니다. 생물의 항상성 추구라는 측면에서 보면, 불안은 어떤 긴장요인(표상)이나 내외부적 감각으로부터 생성되는 자극으로부터 기인하며, 생물은 이를 효과적으로 제거함으로써 내부의 항상성(긴장이 낮은 상태)을 유지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를 방출하지 못하거나 해소에 필요한 적절한 표상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즉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 내적 긴장은 정신의 내부 회로를 계속 순환하게 되고, 지속적인 불안상태를 보이게 됩니다.

 

즉, 불안감을 줄여준다는 것은 이 정신적 긴장을 해소해준다는 의미이며 그 방법에는 두 가지 가능성 - 긴장의 원천을 제거하거나, 긴장을 지속적으로 방출하거나 -이 있습니다.

 

프로이트의 2차과정과 긴장의 해소

 

그러므로 운동(근육의 움직임)은 어떤 방식으로든 긴장의 방출에 효과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화가 나거나 스트레스가 쌓일 때 운동을 하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무언가 과격한 행동을 하는 것은 이런 내적 긴장을 방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원인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운동은 일시적인 효과만을 가져올 뿐입니다. 배가 고파서 생기는 스트레스를 소리친다고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내적 긴장을 ‘원인을 제거할 수 있는 적절한 운동의 형태’로 방출시키는 것이 자아의 역할이며, 이를 <2차 과정>이라고 합니다.

 

긴장이 높을 때, 자아는 이를 해결할 수 있는 표상을 떠올립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떠올린다 - 이것을 <1차 과정>이라고 하지요. 1차 과정으로 생긴 표상을 만족시킬 때, 자아는 더욱 만족감을 느낍니다. 배가 고파 밥을 떠올렸을 때, 자아는 이 표상에 맞는 ‘밥’을 발견하면 만족하지만, 관계없는 ‘자동차’를 발견하면 실망하게 됩니다. 즉, 자아는 1차과정의 결과로 떠오른 표상에 대해 더욱 기대감을 가지게 되며, 이 표상은 긴장의 에너지를 넘겨받아 높은 흥분상태로 대기하다가, 이에 맞는 외부자극을 받아들였을 때 보다 큰 긴장의 해소를 경험합니다. 이 과정이 예측에 따른 만족이며, 자아가 행동을 계획하게 되는 기본 원리입니다.

 

반복행동을 통한 긴장의 해소

 

이제 ‘반복행동’이라는 것을 고찰해봅시다. 이 단순한 반복적 행동은 그 기간이 짧고 패턴이 유사한, 단순한 근육운동을 말합니다. 다리를 떨거나 펜을 돌리거나 몸을 흔들거나 하는 행동들이 이에 속합니다. 반복적인 하루의 일과는 지나치게 길기 때문에(그리고 단순한 근육운동이라기엔 복잡하기 때문에)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반복행동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우리는 왜 반복적인 행동이 불안감을 줄여주는지(없애지는 못하지만) 추론할 수 있습니다. 불안한 상태는 끊임없이 내적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자아는 이를 해소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 해결책이 보이지 않거나 해결책을 시도할 수 없을 때 - 불안한 상태는 대체로 그런 상태입니다 - 자아는 긴장을 방출하고자 하며, 가능하면 비교적 효과적인 방법을 택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자아에게는 두 가지 제약사항이 걸리게 됩니다. 긴장을 방출하되 그 상황에서 허용된 방법이어야 하며, 가능하면 많은 긴장을 방출할 수 있는 방법이어야 합니다.

 

첫 번째 제약으로 인해, 자아는 비교적 작은 운동으로 방출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비교적 만족감이 큰 손가락을 빠는 행위나 자위행위 같은 건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용인된 행동이 아니기 때문에 자아는 이를 억제합니다. 그렇다면 자아는 크기가 작으면서도 용인된, 반복적인 행동을 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반복적인 행동은 긴장의 방출이 다른 행위에 비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일정한 행동을 반복하게 되면, <예측과 적중>이라는 기작을 통해 (무작위적인 행동에 비해) 좀 더 많은 만족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1차 과정, 혹은 예측을 통해 특정표상(반복적 운동)을 떠올리게 되면, 이 표상은 긴장을 얻게 되고(표상을 떠올린다는 현상 자체가 긴장의 획득이며, 이 때 필요한 에너지(긴장)은 내부에 쌓여있던 긴장으로부터 얻어오게 됩니다.), 연이어 그 예측한 동작을 행함으로써 얻어진 지각은 이미 내부에 떠올리고 있던 표상과 일치하게 되고 이 둘은 동반 소멸하면서 만족감을 가져옵니다. 이로 인해 일련의 행위 - 예측, 행위, 적중 - 의 회로가 강화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예측된 표상의 검증이 어째서 더 큰 긴장의 해소를 가져올까요? 여기에는 몇 가지 설명이 가능합니다. 첫째는 간섭에 의한 감쇄입니다. 같은 표상에 대한 두 개의 다른 흥분은, 어떤 기제의 의해 서로를 억제하거나 감쇄시킨다는 가능성입니다. 내부기원의 표상흥분과 외부기원의 표상흥분은 일종의 ‘반대집중’을 가지고 있어서, 두 신호가 만나 서로를 상쇄할 지도 모릅니다. 이 경우 두 표상으로부터의 긴장이 쌍 소멸되어, 두 배의 긴장해소 효과를 가져 올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내부의 자극에 의해서든, 외부의 자극에 의해서든, 흥분되는 표상은 다르지 않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단지 추가적인 ‘현실성 검증’의 신호만이 추가될 뿐이지요. 이 경우에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표상에 상응하는 뉴런은 이미 흥분상태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 또는 주변의) 추가적인 흥분을 억제함으로써 외부기원의 긴장을 무마시키거나, 혹은 이미 흥분되어 있기 때문에 추가되어도 긴장의 총량이 늘어나지는 않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엔 긴장의 해소가 소극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측과 적중>이라는 기작이 자아에게 강한 모티브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본다면, 이런 소극적인 이득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라는 의구심이 강하게 듭니다. 이 기작에 대해선 보다 연구가 필요합니다.

 

반복의 문화 - 리듬, 춤과 음악

 

아무튼 만족감을 가져온 행위를 반복하는 것, 이 생물의 기본 행동강령인 만큼, 이런 만족의 싸이클을 발견한 자아는 예측과 적중을 반복하는 ‘반복행위’를 통해 일시적으로나마 효과적인 불안의 제거를 맛보고자 하며, 이런 행위의 고착은 사람들로 하여금 불안에 대응하는 습관을 형성하게 합니다. 이런 반복에 의한 강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만족감을 줄 만큼 강화되기도 하는데, 특히 반복적인 행위 - 단순한 춤이나 구호, 동작, 그리고 음악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아는 것을 지각할 때 편안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적이라면 더 효과가 있습니다. 다 함께 반복적인 구호를 따라 외치거나, 단순한 율동을 반복적으로 수행하거나 반복적인 음률이나 비트를 들을 때 그렇습니다. 음악은 특히 반복적인 비트(리듬이라는 것이 원래 반복적입니다)와 예측 가능한 (선율에 의해)멜로디로 인해 효과적으로 내적 긴장을 조성하거나 방출하여 만족감을 줍니다.

 

전통적인 음악이론에서, 음악이 주는 심리적 쾌감은 ‘긴장의 조성과 해소’라고 말하는데, 이는 화성의 진행의 기본이 됩니다. 즉, 5도로 인해 생긴 긴장감은 1도로 연결되어 해소한다, 혹은 블루스 음계에서 단3도, 단6도의 음정은 음계에 긴장감을 조성한다,고 말하곤 합니다. 이것은 심리학적인 해석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긴장은 불쾌감을 조성하지만, 더 큰 해소에 대한 기대감이라는 역설적인 쾌감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퀸의 ‘we are the champion 의 완결되지 않은 종결이, 찜찜한 기분을 남기게 됩니다.)

 

우선 리듬을 살펴보면, 적당한 길이의 반복적 리듬은 그 자체만으로 쾌감이 됩니다. 이는 아까 설명한 데로, 예측과 적중의 반복적 쾌감에 의합니다. 너무 간결하고 짧은 2비트 리듬(쿵짝-쿵짝)은 적당한 표상과 긴장을 일으키기에 너무 짧습니다. 그에 비해 적당한 길이의 복잡한 보사노바와 같은 리듬(쿵-따, 쿵쿵따쿵 쿵쿵따 쿵-쿵따쿵)은 보다 많은 긴장과 해소를 불러 일으키게 됩니다. 이런 적당히 복잡한 리듬은 특히 동양이나 아프리카계의 타악기 연주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리듬을 통해 감정을 고조시키고 몰입하게 하는데 강렬한 효과를 발휘합니다.

 

멜로디에서도 유사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멜로디는 기본적으로 음계나 모드(선법)을 따라 진행되는데, 이러한 규칙은 곡의 느낌(장르)를 규정하게 해 주며 동시에 다음에 진행될 멜로디를 예측가능하게 해줍니다. 예측된 멜로디는 적중에 의한 긴장의 해소를 가져오며, 때로 음계에서 벗어난 진행(텐션 코드나 사이음, 혹은 독창적인(?) 진행)은 긴장과 함께 두 가지 효과(더 큰 해소에 대한 기대와, 새로운 지각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킵니다. 결국 음악은 예측과 적중을 통한 긴장의 조성과 방출을 이용한 심리적 만족과정이며, 이는 초조할 때 다리를 떠는 행위와 밀접하게 관련된 행위인 것입니다.

 

물론 음악에는 이보다 훨씬 복잡한 장치들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실제로도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기도 합니다. 특히, 특정 화성에 대한 선호도(메이저와 마이너 같은)같은 문제는 매우 흥미로운 문제입니다. 이는 보다 섬세한 - 음의 지각 회로의 동조와 간섭 같은 구체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부분입니다. 하지만 그 기본적인 배경엔 정신분석적인 쾌-불쾌의 원리가 깔려 있다는 것은 기억해야 합니다.

 

* 여기서 말한 반복은, 정신분석에서의 <반복강박>과는 조금 성격이 다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