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기정
1
" 자, 이제 스위치를 켜겠습니다. "
탁. 스위치를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불꽃이 튄다.
암흑뿐인 시야에서, 무언가 천천히 희미한 환영들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명암들, 밝게 점멸하는 빛, 깜박거리는 듯한 무늬들......
" 당신이 손에 쥐고 있는 건 공이에요.... 볼 수 있나요? "
의사의 목소리가 내게 물었다.
고개를 내려 손을 바라본다. 손에는 둥근, 배구공 정도의 크기의 공이 느껴진다. 하지만 둥근 형태가 보이는 것은 아니다. 이미지가, 격렬한 이미지들이 현란하게 어른거렸다. 손에서 공을 움직이자... 아, 얼룩덜룩한 이미지들이 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것이 공이로구나. 나의 뇌의 연합시각영역이, 이 정보들을 공의 형태로 잡아가기 시작하는구나.
나는 공을 내려놓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앞으로 움직여감에 따라, 시야는 온통 복잡한 빛과 그림자들의 움직임으로 혼란스럽다. 하지만 규칙성이 있다. 어두운 영역과 밝은 영역은 한 덩어리로 움직인다. 무엇일까. 천천히 어두움이 짙은 영역에 손을 대었다. 무언가 만져진다.
" 이게 뭐죠? "
" 책상입니다. 책상의 윗면이에요. "
그렇구나. 책상을 손으로 더듬어가자, 이미지들은 점점 정교해진다. 촉감의 정보가, 아직 불완전한 시각적 정보와 통합된다. 네모난 명암의 덩어리.... 나의 신경세포들은 지금 맹렬하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가고 있겠지.
천천히 벽 쪽으로 다가갔다. 흰 벽이겠군. 밝은 빛의 이미지가 시야를 가득 채운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방금 습득한 네모난 이미지의 어두움이 보인다. 하지만 거리나 크기는 감이 잡히지 않는다. 심호흡을 하고 그쪽을 향해서 똑바로 걸어나갔다. 그리고, 그 어둠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고 느껴질 때쯤 걸음을 멈추었다.
손을 뻗었다. 손잡이가 잡혀졌다.
나는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나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싱긋 웃음을 지었다.
" 이 문으로 나가면 되나요? "
"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
비로소 그녀의 눈물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그림자가 시야에서 커지더니, 그녀가 날 끌어 안는 것이 느껴졌다.
2
6개월전, 전기톱 작업을 하던 중, 그만 파편이 눈에 튀어 두 눈을 완전히 실명했다. 수술로 시력을 되찾을 방법은 없었으며, 회복될 수 없을만큼 안구는 망가졌었다. 이런 사고를 몇십년 전에 당했다면 꼼짝없이 소경 신세가 될 수 밖에 없었으리라. 하지만 현대의학의 발달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뇌의 시각신경이 멀쩡하다면 다시 빛을 볼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주었다.
" 수백개의 미세한 전자침을 뇌의 뒤편에 있는 1차시각영역에 심는 겁니다. 그리고 선글라스에 장착된 소형 카메라로 받아들인 영상을 컴퓨터로 처리한 다음에, 뇌에 심어놓은 전자침을 통해서 뇌세포들에게 직접 자극을 가하는 거지요.
- 원래 그 세포들은 망막으로부터 받은 영상신호로부터 자극을 받게 되어 있던 것들입니다만, 지금은 망막으로부터의 모든 신호는 끊겼으니까요... 그 뇌세포들은 이 인공적인 영상자극에 곧 적응할 수 있습니다. - 그렇게 되면 다시 앞을 볼 수 있게 되는 거지요."
이른바 <전극뇌내삽입술> - 뇌과학과 사이버네틱스 기술의 비약적인 발달로 인하여 가능해진 시술법이었다. 외과적인 시술로 대뇌의 피질에 직접 전극을 심어 통신함으로써, 주로 마비된 환자들이나 나처럼 시각을 잃은 환자들에게는 그야말로 획기적인 치료술이 아닐 수 없었다.
" 초창기에는 두개골 한쪽에 작은 구멍을 뚫어서, 그 쪽으로 전선이 통과해야 했지요... 그리고 환자는 등에 배낭처럼 컴퓨터를 짊어져야 했구요. 하지만 요새는 그 모든 것을 무선으로 하기 때문에 두개골에 구멍을 낼 필요가 없고, 컴퓨터장치도 극소화 되었습니다. 선글라스를 껴야 한다는 사실 외에는 전혀 드러나질 않아요. "
의사의 설명대로였다. 수술을 성공적이었고,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했다. 선글라스만 끼면, 예전처럼 다시 앞을 볼 수 있었으니까. 물론 처음부터 시력이 원상복구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꾸준히 연습하고 익숙해져야 하는 지루한 과정이었으며, 거의 한 달동안은 더듬거리며 다닐 수 밖에 없었다. 마치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 걸음마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하지만 다른 환자들이 그러했듯이, 이내 새로운 시각기관에 익숙해졌다.
다시 시각을 찾게 되어 나 자신도 매우 기뻤지만, 곁에서 노심초사하던 나의 약혼녀, 주디의 기쁨도 이만저만한게 아니었다. 그녀는 혹시 내가 영구적으로 봉사가 되지나 않을지 매우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 선글라스를 쓰니까 더 근사한걸요...."
그녀는 애써 미소를 띄며 말했다. 하지만 약혼자가 평생 선글라스를 낀 채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그녀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그건 나로서도 일견 당혹스러운 일이었으나, 그래도 아직까지는 다행스러운 마음이 더 컸다. 거울속의 나는 늘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데, 꽤 그럴듯해 보인다. 물론 벗으면 사고로 인한 흉터와, 감긴 두 눈이 있지만 말이다. - 내 얼굴을 어떻게 보았냐고? - 그건 아주 간단하다. 선글라스를 벗어서 내 얼굴쪽으로 돌리면 내 얼굴을 볼 수 있다. 나는 그런 방식으로 내 몸을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았는데, 그건 마치 유체이탈을 하여 자신을 바라보는 것만큼 낯선 경험이었다.
3
" 자, 이제 팔을 움직여 보세요. 어때요? 느낌이 나는 거 같나요? "
의식적으로 오른쪽 팔을 움직이려 애썼다. 그러나 내가 앉아있는 의자의 어깨쪽에 붙어 있던 로봇팔이 너무나 천천히 움직였다. 하지만 내가 의도했던 움직임은 아니다. 몇 번 애를 쓴 후에, 마음을 느긋하게 먹기로 작정했다.
이 기계에 익숙해지려면 또 시간이 걸리겠지. 나의 뇌가 새로운 장치에 적응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곧 익숙해지겠지.... 많은 절단 환자들이 이런 휠체어를 타고 다니지 않는가.
인공시각장치를 장착한 얼마 뒤, 나는 또다른 불행한 사고를 당하였다. 휴양지의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기 위해 선글라스를 벗어서 세면대 위에 올려놓았는데, 그만 카메라를 너무 벽에 붙혀서 놓는 바람에, 시야는 제로가 되고 말았다. 선글라스를 찾기 위해서 더듬거리며 움직이던 나는, 그만 실수로 열린 창문으로 추락하고 말았고, 불행하게도 그건 4층 높이였던 것이다.
- 불행중 다행일까. 수영장에 거꾸로 처박혀서 목숨은 건졌지만, 3번과 4번 경추(목뼈)의 골절로 인하여 목 아래로는 전신마비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절망적인 경우에도, 뇌내전극삽입술은 도움이 되었다. 대뇌의 운동영역과 감각영역에 광범위한 전자침을 심는 대수술을 받았고, 이 장비의 도움으로 휠체어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 그것을 과연 휠체어라고 불러야 할까. 내가 사용하는 최신의 휠체어는 바퀴대신 두개의 로봇다리가 달려 있었다. 2족보행로봇기술의 성과로, 과거에는 계단이나 울퉁불퉁한 길에서는 맥을 못추던 바퀴 대신, 안정적이고 융통성 있는 다리를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휠체어가 아니라 레그-체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팔다리가 모두 마비되었기 때문에, 팔 절단환자들이 사용하는 로봇팔을 레그-체어에 부착하였다. 이러한 종합적인 시도는 내가 세계에서 최초였는데, 마치 나는 커다란 기계갑옷을 입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강화복(사람의 움직임을 큰 힘으로 바꾸어 주는 로봇 형태의 1인용 중장비)을 입은 노동자 같아요."
그녀는 나를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 하며 말했다.
주디에게도, 이런 내 모습은 좀 적응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사실 나로서도 그랬다. 이건 너무 거창한 모습이 아닌가. 나는 기계팔로 어깨를 으쓱, 해 보이며 웃음을 지었다.
....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 남의 일로만 생각했던 전신마비환자의 처지가 되고 말았지만, 오히려 내 마음은 크게 절망적이지만은 않았다. 뭐랄까,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나 버렸고, 이 모든 것을 세익스피어적인 꿈에 불과한 것이라고 여겼던 것일까. 비현실적인 일이 과도하면, 그것들은 스스로 현실감을 상실하기 마련이다. 마치 꿈속에서 새로운 장난감, 새로운 탈것을 부여 받은 것처럼, 오히려 재미있다는 시선으로 관조할 수 있었다는 건 아이러니일까.
한동안 주디를 만나볼 수가 없었다. 궁금하기도, 내심 불안하기도 하였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녀가 날 떠나 버린다 하더라도, 나로서는 그녀를 잡을 만한 명분도, 그럴 의도도 없었다.
며칠뒤, 그녀는 돌아왔고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의 집에 드나들며 날 돌보아주었다. 그녀도 이 낯선 꿈에 동참하기로 한 것일까.
4
" ....등반이라니, 그건 좀 무리일 듯 싶군요. "
의사가 걱정스럽게 대답했다.
" 할 수 있습니다! 주디에게도 약속했는 걸요. 비록 기계에 의존해서 움직이지만, 전 아직 살아 있다구요. 제가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습니다."
" 하지만 너무 위험합니다. 만약 실족하거나, 넘어져서 레그-체어가 파손되었을 경우에는 거기에 탄 당신도 위험해질 수 있어요."
....맞는 말이다. 그런 어려움을 생각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 등반을 꼭 성공해 보이고 싶었다. 내가 아직 폐물이 아니라는 것을, 장애인이 되고 말았지만 남들과 다름없이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그것은 이런 나의 모습을 힘들어하는 주디나, 나 자신을 위한 확신을 주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레그-체어 시스템을 이용해서 몇 달이 지나자, 점차 이 시스템에 익숙해져서 어려움 없이 걷고, 요리를 하고, 화장실도 갈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는 목욕도 할 수 있었다. 목욕을 할때면 나는 내 로봇팔을 이용해서 나의 몸을 레그-체어에서 들어 올린 뒤, 욕조에 눕혀놓고 씻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마치 로봇이 마비된 사람을 시중드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은 내가 나 자신을 돌보는 것이었다. 다 씻고 나면 타월로 몸을 닦은 후, 다시 나를 들어올려 레그-체어에 앉혔다.
이 시스템에 익숙해져 가자, 나는 좀더 나의 한계에 도전하고 싶어졌는데, 그건 나름대로의 힘겨운 재활의 의지였고, 그 목표로 이번 산행을 결심하였던 것이다.
"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
" 음.... 생각을 좀 해 봅시다. "
그리하여 의사와 함께 머리를 짜내어 새로운 시스템을 고안해 내었다.
그것은 나의 몸과 레그-체어를 보다 분리하는 형태로서, 나는 집의 침대에 누워있고, 레그-체어와 선글라스만을 산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어차피 무선이기 때문에 분리는 문제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분명히 레그-체어가 있는 곳의 광경을 보고, 그곳에 있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나의 팔다리의 촉감은 어차피 레그-체어의 센서로부터 느낄 것이니까.
" 하지만 이래서는 현장의 소리를 못들을 텐데요. "
" 걱정할거 없습니다. 레그-체어에 마이크와 스피커를 설치하지요. 그러면 당신은 침대에서 외부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또 말을 하면 그 말은 레그-체어의 스피커로 전해질 겁니다. 당신은 레그-체어를 통해서 대화도 할 수 있을 거에요."
" 나는 헤드셋을 쓰고 말이죠?"
" 바로 그겁니다. "
산행은 성공적이었다. 의사는 레그-체어의 가운데 쯤에 기둥을 하나 부착하였고, 거기에 선글라스를 부착하였다. 그리고 양쪽에 두개의 마이크와, 스피커를 설치하고 나니 마치 가운데는 비어있는 - 원래는 내가 앉는 장소였으므로 - 로봇과 같은 형상이 되었다.
나는 레그-체어의 몸을 돌려 침대위에 누운 나를 바라 보았다. 묘한 느낌이었다. 내가 누워 있는 나를 바라보다니.
" 어때요? 그럴듯 한가요? "
나의 목소리는 레그-체어의 스피커로 흘러나왔다. 마치 그냥 내가 말을 하고 잇는 느낌이다. 침대에 누워있는 내 자신의 입모양이 똑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 놀랍군요! 마치 인간형 로봇같습니다. "
하지만 주디는 조금 불안한 듯 보였다.
" 당신... 맞아요? "
그녀는 조심스럽게 레그-체어에 손을 대었다. 아니, 그녀는 단지 <나>에게 손을 대고 있었다. 자신이 만지고 있는게 <나>인지, 단지 기계에 불과한지를 의심하고 있는 건 그녀뿐이니까.
" 물론이야, 주디. 물론 나는 침대에 누워 있지만, 여기에 서 있다고도 할 수 있어. 난 당신얼굴이 잘 보이고, 당신 목소리를 듣고, 당신의 손길이 느껴지는 걸. "
그녀는 침대에 누워 있는 나와, 레그-체어로서의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내 느낌을 말하자면? 물론 나는 레그-체어가 있는 곳에 있었다. 나의 생각은 침대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5
나는 점점 레그-체어를 이용한 대리 외출에 익숙해졌다.
그것은 안전했고, 행동에 전혀 불편이 없었으며, 무엇보다 아무래도 불구가 된 내 모습을 전혀 노출시키지 않고 활동할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레그-체어에 타서 움직일 때에는 축 늘어져 있는 내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야 했고, 아무리 원하는 데로 움직인다 하여도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레그-체어를 이용한 대리 외출에서는 사람들은 흥미로운 호의를 보여주었고, 또한 이런 이중적(?)인 생활이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집에 있을 때에도 가급적 레그-체어만을 움직이게 되었으며, 침대에 누워 있는 나와는 독립적으로 <나>라는 존재는 이 레그-체어와 함께 있다는 인상이 깊어졌다. 나는 또한 침대에 누워있는 나를 돌보거나 몸을 씻기는 등의 일을 하였는데, 그럴수록 마치 내가 다른 사람을 간병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를 닮았지만, 지금은 꼼짝할 수 없는 누군가를 말이다! 내가 그의 몸을 닦아 줄때면, 기분좋은 듯 미소를 띄고 있는 <나>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묘한 기분을 내게 일으켰다.
간혹 나는 나의 얼굴을 들여다 보며 혼잣말을 하기도 하였다.
" 이봐, 기분은 좀 어때? "
그러면 누워있는 그가 입을 움직이면서 말을 한다. 그것은 몇번을 되풀이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었다. 말은 내가 하는데, 입을 움직이며 소리를 내는 것은 누워있는 <그>였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면, 오히려 본체는 여기에 있고, 침대에 누워있는 그가 나의 명령을 받는 기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주디는 집에 오면 늘 <침대에 누워있는 나>를 챙기곤 하였다. 그녀는 나의 헤드셋을 벗기고, 침대옆에 앉아 대화를 하였다. 그런 모습을 옆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이상한 느낌이었다. <누워있는 나>는 그녀와 얘기를 하고 있었지만, 그 대사를 생각하고 말해주는 것은 <레그-체어의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녀는 인간의 형태를 한 빈 껍데기와 대화를 하는 걸까. 헤드셋이 벗겨지면 나는 말을 할 수 없었지만, 사실 그녀가 대화하는 것은 <여기 있는 나>라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침대에 누워있는 나>의 대리인 정도로만 여겼다. 아니, 간혹은 그저 간병용 로봇정도로 -말을 알아듣는 -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럴 때면 난 당혹스러웠지만, 그녀 역시 혼란스러울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아무래도 지금의 나는 기묘하게 생긴 로봇의 형태 아닌가. 하지만 그녀가 오직 침대에 누워있는 나와만 얘기하려 할때면, 조금 기분이 상하기도 하였다. 마치 프랑스의 옛 전설에 나오는 시라노가 된 것 같았다. 친구를 대신해서 숨어서 사랑의 시와 노래를 불렀지만, 그녀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친구와 사랑이 깊어가는, 그로 인해 상처받고 외로와지는 시라노 말이다.
나는 의사와 상의하여, 나를 보다 개조하기로 마음 먹었다.
" 정말 놀라운 시도가 될 겁니다. 당신을 완전한 인간형으로 만들어 드리죠! "
나는 뇌의 발성영역과 청각영역에도 전자침을 추가로 심어서, 더이상 헤드셋이 필요 없이도 말하고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로 인하여 원래의 나는 귀머거리에 벙어리가 되었슴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레그-체어를 완전히 뜯어 고쳐서, 더이상 육중해 보이는 탈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인간의 형태와 유사한 로봇형태로 개조하였다. 겉은 인공피부로 덮었으며, 사람의 얼굴이 있었고 말을 할때면 그 발음에 맞게 입모양도 움직여 주었다. 거기에 가발을 씌우고 옷을 입히니, 정말로 사람처럼 보였다.
" 이게 나군요... "
나는 거울 앞에서 나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거울 안에는 젊고, 원래의 나보다 훨씬 핸섬하게 생긴 좋은 체격의 남자가 있었다. 이게 새로운 나의 모습이란 말인가? 나는 여러가지 표정을 지어보이며 새로운 몸을 연습하여 보았다.
그리고는 침대에 누워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전혀 미동조차 하지 않는 마비된 육체가 누워 있었다. 나는 그를 만져 보았다. 뻣뻣한 육체였다. 누군가 나를 만지고 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는 정말 다른 사람같았다.
6
주디는 화가 난 듯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침대에 누워있는 나>와 직접 이야기 할 수가 없고 나를 통해서만 대화할 수 있었는데, 그게 불만인 모양이었다.
" 왜 그런 짓을 한거죠? 그런 건 나와 상의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
" 미안해 주디, 하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구. 나는 여기에 계속 있고, 오히려 이게 더 제대로 된 거 같지 않아? 나는 여기 존재하는데, 대화는 저쪽에서 한다는 건 정말 이상하잖아. "
"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늘 여기, 침대에 누워 있었다구요. 난 당신과 얘기할 수 있는게 좋았어요. 그런데 이젠 당신과 얘기할 수조차 없군요."
" 무슨 말이야, 지금 나와 이야기 하고 있잖아? 지금 얘기하고 있는 건, 당신이 침대에 누워있다고 생각하는 <나>라구...! "
" 하지만 당신은 이런 얼굴이 아니었어요! "
" ...그냥 내가 성형수술을 한 거라고 생각하면 안될까? 그럴 수 있는 거잖아? 내 목소리, 내 말투, 당신과의 기억은 모두 그대로니까.... 단지 얼굴만 바뀐거라고 생각하면 돼."
" 말도 안돼요! 당신은 저기 누워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죠? "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며 나가버렸다.
그녀와의 문제만 아니라면, 나는 새로운 시도에 매우 만족하였다.
이제 나는 훨씬 자연스럽게 사회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고, 또한 젊고 근사한 육체는 인기가 있었다. 무엇보다, 나를 혼란스럽게 했던 괴리감 없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뭐랄까, 다시 태어난 기분이라고나 할까.
나는 마치 나의 장애가 원래 없었던 것처럼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이따금씩 침대에 누워있는 남자를 돌봐주고, 몸을 닦아 주거나 할 때 외에는 말이다.
하지만 그 일조차 주디가 도맡아 하게 되자, 나는 가끔씩만 올라오게 되었는데,어쩌면 무의식적으로 나는 그를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때는 문득 내 집의 침대에 누워있는 한 남자의 존재로 인해 깜짝 놀라는 일도 있곤 했다.
7
침대에서 꼼짝 못하는, 기본적인 의사소통조차 할 수 없는 환자를 돌본다는 것은 귀찮은 일이다. 물론 그가 내 자신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는 것을 알기에 정성스레 돌보기는 하지만, 그것은 일부러 상기하지 않으면 쉽게 잊혀지곤 했다. 결국 이 자는 회복불가능한 전신마비 환자인 것이다. 게다가 나이도 들고, 몸은 점점 초췌해져 갔다. 특히나 시체처럼 뻣뻣하게 늘어진 몸을 만질때면, 어쩔 수 없는 혐오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런 나에 비해서 오히려 주디가 더 그를 간호하는데는 열심이었다. 그녀는 도대체 왜 그리 집착하는 걸까. 그녀는 오히려 나에 대해서는 감정이 예전같지 않은 것 같았다.
" 이봐, 주디! 내려와서 같이 영화보지 않겠어? "
" 지금 바빠요. "
" 뭘 하는데? "
" - 지금 당신을 돌보고 있다구요. "
....날 돌본다구?
나는 지금 아랫층의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고 있는데?
그녀가 말한건,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를 말하는 거겠지. 도대체 그를 그토록 열심히 돌볼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인가..... 그저 죽지 않을 정도로만 유지하면 되는 것인데.. 어차피 아무런 감각이나 움직임이 없는 자 아닌가.
나는 2층으로 올라가서 방으로 들어갔다. 주디가 수건을 적셔서 그의 몸을 닦아 주고 있었다.
" 뭘 한다구? "
그녀는 고개를 돌려 잠시 나를 바라보았을 뿐, 하던 일을 계속 하였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 말해봐, 지금 뭘 하는 거야? "
그녀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 이거 놔요, 말했잖아요! 당신을 돌보고 있다고. "
" 날 돌본다구? 이봐, 나는 여기에 있잖아? 도대체 누굴 돌본다는 거야? "
그녀는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 정신차려요, 당신은 여기 누워있다구요! ..... 당신이 자신이라고 믿는 건
....단지 기계일 뿐이잖아요?! "
나는 단지 기계일 뿐이라구?
나는 그녀를 잡은 손을 놓았다. 그녀는 정말로 그를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에게 있어서 나는 그저 낯선 사람에 불과한 것일까. 그녀는 다시 그를 정성스럽게 간호하기 시작했다. 나는 맥이 풀려 문가에 기댄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질투일까. 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것은 과연 <나>일까, 아니면 침대에 누워있는 <그>일까. 도대체 무엇이 나를 결정짓는 것일까.
예전에는, <나>란 <나의 뇌>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다리가 잘린다면, 잘린 다리가 <그>일까, 아니면 남은 몸쪽이 <그>일까. 물론 당연히 그는 남은 몸쪽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런 판단의 기준이 절단된 부분의 양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목 아래가 잘려나갔지만, 의학적 방법으로 양쪽을 모두 살려 놓는다면.... 그때에도 비록 부피는 적지만, 그의 뇌가 있는 머리쪽이 여전히 <그>일 것이다. 그것은 정당한 생각이었고, 나는 궁극적으로 <뇌>가 있는 쪽에 자아가 따라간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나의 뇌는 물론 침대에 누워있다. 하지만 나는 명백하게 여.기.에. 있다고 느낀다. 여기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 그것은 나의 몸도 아니고 단지 기계일 뿐인데. 단지 내가 감각하고, 운동하는 <도구>로서의 육체만이 여기에 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여기에 있음을 확신한다.
- 하지만 다른 사람에겐 어떨까. 주디에게는? 혹시 나만이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일까.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그저 기계에 불과할까.
8
" 무슨 짓이에요! 미쳤어요? "
" 진정하라구.... 단지 술을 조금 마시고 싶었을 뿐이야. "
그녀는 얼굴이 새빨게져서 소리질렀다.
" 술? 술을 마시고 싶으면 당신이나 마시면 되지, 왜 그에게 알콜을 주사하는거에요? 그게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몰라요? "
"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나는 술을 마실 수 없다구. 내가 술에 취할려면 내 본체가 술을 마셔야 하니까....."
" 정말 미쳤군요. 환자의 상태를 전혀 생각지도 않아요!"
" 무슨 소리야.... 저건 나의 몸인데, 왜 내가 나를 걱정하지 않겠어?
안전할 정도로만 주사했다구, 정말이야."
" 그만 둬요. 당신에게 도저히 그이를 맡길 수 없어요. "
" 뭐야?! 내가 나를 해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도대체 <그이>라는 게
누구야? 저건 <나>란 말이야, 지금 이 몸을 움직이고, 이 말을 하는 건바로 저 자라구! "
" ....그럼 당신은 누구에요? "
나?
.....그렇군, 나는 누구지?
나는 나 자신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다. <나>는 여기에 있다. 움직이고, 느끼고, 생각하는 <나>는 바로 지금 여기에 서 있다. - 물론 나의 몸이 기계로 되어 있다는 것쯤은 안다. 그리고 나의 생각과 판단이, 한 때 <나>였던 - 지금은 침대에 누워있는 - 그 사내의 뇌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곳에 있는 것일까. 나의 사고가 이루어지고 있는 곳은 <여기>가 아니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렵다. 나의 생각이 내 것이 아니라면, 지금 누워있는 그의 생각 역시 그의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하는가.
하지만 그녀의 입장은 다르다. 그녀는 원래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의 육체가 - 비록 식물인간과 같은 형상이지만 - 아직 눈에 보이는 그대로 남아 있고, 전혀 다른 육체를 가진 또다른 이방인이 등장한 것 뿐이다. 내가 예전의 그와 같은 기억과 말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잊어버린 것일까. - 아니다. <내용>이라는 면에서, 나는 그와의 동질성을 유지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내가 <나>의 위치에 대해서 혼란을 겪고 있는 것에 비해서, 그녀는 보다 확고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녀의 연인은 아직 침대에 누워있다. 그리고 <그>라고 주장하며 그녀에게 혼란을 주는 <나>는 다른 사람인 셈이다.
- 왜일까. <눈 앞에 존재한다>는 강력한 시각적 정보가 다른 모든 것들을 압도하는 것일까. 그녀에게는, 아니 인간에게는 아직 육체와 정신이 분리된 하나의 자아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어려운 것일까.
나는 해결책을 알고 있다.
그녀가 <그>를 <나>라고 믿고 집착하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그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가 눈앞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를 보이지 않게 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가 사라지고, 대신 그와 같은 기억을 가지고 같은 말투를 쓰는 내가 존재한다면 - 그리고 그 상황이 익숙해진다면.... 그녀는 나를 정말 <나>로 받아들여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9
" 도대체 그를 어떻게 한거죠? "
주디는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 대답할 수 없어. 하지만 걱정 마. 그는 안전해 "
" 당장 대답해요! 그는 어디있죠? "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말했다.
" 나를 똑똑히 봐! 나는 여기에 있어. <그>가 어디에 있냐고 묻지 말고, <당신>은 어디에 있냐고 물어야지! 내가 <그>란 말이야! 내가 어디에 있냐고? 나는 지금 당신 눈앞에 있잖아? "
그녀의 눈빛이 흐려졌다. 그녀의 머리가 논리적으로 엉키고 있다. 혼란스러운 듯, 그녀의 머리가 흔들린다. 하지만 그녀는 직감을 믿는다. 그것이 비록 논리적으로 옳지 않더라 하더라도 - 적어도 지금 그녀에게, <나>는 그녀의 <그>가 아니다.
" 그가 어디있는지 당장 말하지 않는다면, 신고할 거에요."
" ....날 신고한다구? 무슨 명목으로? "
" 이건 납치라구요! "
" 납치? 내가 나를 납치하는 경우도 있나? "
" 당신은 제정신이 아니에요! 지금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 지도 모른다구요!"
" 제정신이 아닌건 당신이야! 당신은 그 자와 내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우린 같은 사람이라구! 내가 그 사람이야! "
" 당신은 아니에요, 그가 진짜지. "
" 왜 내가 아니라 그가 진짜라는 거야? "
" 그가 죽으면, 당신은 그저 기계덩어리에 불과해요. 하지만 당신이 부숴진다 해도,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구요!"
... 그렇군.
그녀의 말이 맞다.
나는 전적으로 그에게 의존하고 있다. 나의 생명은 그의 생명을 전제로 하지만, 그는 나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그가 없어지면 나는 끝장이지만, 내가 없어져도 그로서는 달라지는 것이 없다.
그것일까, 내 불완전한 정체성의 이유가.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를 잡은 손을 풀고, 지하실로 성큼성큼 내려갔다. 그녀가 황급히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지하실의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 탁자위의 천을 치웠다. 거기엔 아무런 상황을 모른채 누워있는 그가 있었다. 그의 얼굴은 마치 이런 나를 비웃는 듯, 엷은 미소를 띄고 있었다.
- 나는 너의 존재를 전제로 한단 말이지. 네가 없으면 나도 없다, 바로 그 사실을 담보로 이렇게 태연할 수 있는 건가.
분노가, 억제하기 힘든 살의가 밀려왔다.
나는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 당신 미쳤어요? "
그녀가 미친듯이 내게 매달렸다. 나의 팔을 그의 목으로부터 떼어내기 위해서 필사적이었다. 나는 그녀의 행동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목을 계속 졸랐다.
" 그를 놔 줘! 이 더러운 기계! "
그녀가 울부짖는다.
그녀는 내가 자신의 연인을 죽이려 한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연인은 <나>다. 여기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흉물스러운 고깃덩어리는 아닌 것이다. 이 자만 없어지면 그녀는 모든 혼란을 잊을 것이다.
그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 - 지금 나에게 그런 것은 더 이상 상관이 없다.
내가 이런 움직이지도 못하는 육체의 그림자로서만 존재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그녀가 울부짖으며 나의 몸을 때렸지만, 나는 목을 조르는 손에 힘을 더했다.
그녀의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정신이 조금씩 몽롱해져 갔다. - 그렇구나. 나는 나의 목을 조르고 있는 거였지..... 이런 방법으로는 그를 죽일 수가 없겠구나..
그 단순한 사실을 깨달을 때 쯤, 나는 그자리에 쓰러졌다.
10
" 깨어났군요. "
눈을 떴다.
병원인가. 나는 침대에 누워있는 것 같다.
희미하게 주디의 얼굴이 보인다. 어떻게 된 걸까.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잘 움직이질 않는다.
" 다행이에요, 정말. "
주디의 눈이 눈물로 젖어 있었다. 그녀는 내게 다가와 나를 껴안고는 입을 맞추었다. 따뜻했다.
" 당신이 의식을 잃고 있는 동안, 다시 수술을 했습니다. 문제를 일으켰던 레그-체어는 폐기하고, 당신의 두뇌로부터 전자침도 제거하였지요. 그대신 당신의 팔다리에는 의족을 부착하였지요. - 보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말이죠. 좀 불편할 수는 있겠지만, 그게 훨씬 마음 편하실겁니다. 적어도 주위사람들 에게는요. "
의사의 설명이 들려왔다.
그랬군. 나는 원래의 나로 돌아와 있었다. 선글라스를 낀 채로, 팔 다리에는 의족이 달려 있었다. 거기에는 아무런 혼란도 없었다.
꿈을 꾸었던 것일까. 몸을 일으켜 벽에 걸린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에 비치는 나는 본래의 나의 모습이었다. 많이 초췌해진 듯한 모습이었지만, 그래. 이게 나의 얼굴이었다. 한때 내가 그토록 증오했던, 혐오하며 죽이려고까지 했던 자의 얼굴이 이것이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었던 것일까. 나는 자살을 하려고 했었던가.
내가 <나>라고 그토록 믿었던 그 기계는 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던 것일까.
그건 뇌와 감각적 주체간의 갈등이었다. - 누가 이겼는가? 이 생소한 갈등은 어떻게 해결될 수 있었을까.
감각기관과 운동기관으로서의 주체와, 생각을 하는 정신적 자아는, 너무나도 간단한 한 가지 - 둘 사이의 공간적 일치감만 있으면 충분하였다. 내가 느끼고, 내가 움직이는 곳에서만 비로소 나는 존재할 수 있었다. 나의 생각이 이 몸속에서 일어나든, 저 침대에 누워있는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든, 혹은 백만광년쯤 떨어진 우주의 어느 별에서 일어난들 무슨 상관이랴.
나는 이제 나의 몸속에 존재하고, 이제 나는 아무런 분리감 없이, 온전히 나 자신일 수 있다. 애당초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다는 것은 무리였던 것이다. - 적어도 아직 인간에게는....
문득 데카르트의 격언이 떠올랐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 아니다, 아니다.
나는 느끼고, 움직인다. 고로 존재할 수 있었다.
.... 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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