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마음 - 인공지능 연구의 올바른 지향점
* 이 글은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인공지능연구의 방향에 대한 비판과 대안제시를 위한 것으로, 현재 작성중이며, 그중 앞부분 일부입니다. 그러므로 거의 비판일색임을 양해바라며, 대안에 대해서는 현재 진행중인 다른 글들이 어느정도 완성된 후에 작성될 예정입니다.
2006
이 글의 목적은 전적으로 진정한 인공지능을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인공지능의 구현은 이런 글이 아니라 실제의 로봇시스템의 형태가 되겠지만, 우선은 글을 통해 현재 지능연구의 한계를 지적하고, 현재 참고할 수 있는 연구결과와 내 자신의 견해를 밝힘으로써 나 자신과 이 분야에 관심 있는 이들의 연구에 한정적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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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대도시의 호텔에서 묵게 된 사막의 족장들이, 수도꼭지만 틀면 펑펑 쏟아져 나오는 물에 놀라면서, 온통 목욕과 수영을 즐기다가 떠날 때가 되자, 수도꼭지를 떼어가려고 끙끙대었다. “왜 그것을 떼어가려 합니까?”하고 묻자, “사막에서도 마음껏 목욕을 즐기고 싶어서요”라고 대답하였다.
오쇼 라즈니쉬의 '배꼽'중에서.
여기에서 말하는 <진정한 인공지능>이란 일반적으로 SF영화 등에서 그려지는, 인간과 같은 지적 능력을 갖춘 인공지능, 또는 로봇을 말한다. 쉽게 말하자면 애니메이션 <아톰>에 나오는 아톰과 같은 (날아다니거나 하는 뛰어난 물리적 능력은 없지만) 형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인공지능이라는 말에는 많은 오해가 있어왔으며, 사실 현재 로봇산업의 오류도 이 말의 오해에서 비롯한다. 사람들은 쉽게 상상하기를, 지능로봇은 뛰어난 지적능력을 가지고 있으나 인간과 같은 감정과 창조성, 예술적 능력은 없으며, 그저 차갑고 냉철한 지능을 가지고 인간에게 복종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런 지능이 점점 발달하다보면 예외적으로 ‘감정’과 유사한 기능이 발생하기도 하고, 이에 따라 ‘로봇에게 감정이 있을 수 있는가?’하는 논란이 뒤따르곤 하는, 그런 상상을 하기 마련이다.
나중에 자세히 논하겠지만, 이는 전적으로 잘못된 상상이다. 일단, 인공지능로봇은 <감정 없는 지능>이라는 개념은 허구이다. 이는 단순한 기능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컴퓨터나 기계로부터 유추된 근거 없는 연장일 뿐이다. 사실은 <지능 없는 감정>이 현실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 감정은 있지만 지능이 없는 로봇은 만들기 쉽지만, 감정이 없이 지능만 있는 로봇은 더 만들기 어렵다. 이는 마치 건물의 1층과 2층과 같아서, 감정이 있어야만 비로소 그 위에 지능이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지능>이라던가, <감정>이라던가 하는 단어들의 뜻이 정확하게 파악되어야 -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 할 것이지만, 우선 내가 말하는 <진정한 인공지능>은 일단 사람과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수준을 말한다. 혹자들은 여기서 튜링테스트를 떠올리며 이것이 과연 적절한 기준이냐에 대해 의문을 표할 수 있겠지만, 사실 튜링테스트는 충분히 훌륭한 방법이며, 다들 단어들 이상으로 오해받고 있는 - 심지어 비트겐슈타인 같은 철학자에게까지도 - 언어능력은 인간적 지능에 대한 적절한 지표라고 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전적으로 인공지능 시스템(로봇 - 로봇의 형태가 아니고는 인공지능을 구현할 수 없다)을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며, 나는 진심으로 인간과 같은 수준의 지능로봇을 만들 수 있기를 원한다. 그러나 글의 상당부분에서 전통적인 인공지능이나 로봇공학이 아닌, 오히려 철학과 심리학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할 것이다.
이는 결코 현학적인 논쟁이나 학술적인 의미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다. 철학과 심리학, 또는 생물학과 사회학은 인공지능의 본질이며, 오히려 컴퓨터나 기계공학은 부수적인 분야에 속한다. 이런 부분에서부터 오해가 발생해 있기 때문에 현재의 인공지능연구는 지리멸렬한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가장 먼저 논해야 할 것은, 현재 인공지능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오해들을 제거하고, 관련된 개념들을 명확히 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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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단순히 지능형 로봇에 관심 있는 독자일지도 모른다. 혹은 실제로 제작하기를 원하는 기계공학이나 메카트로닉스의 대학원생, 혹은 연구진일 수도 있다. 아니면 국책사업으로써 로봇 공학을 육성하는 데에 고민하고 있는 정부 관련자나 연구소의 책임자일 수도 있으며, 차세대 주력 상품으로써 지능 로봇사업의 도입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는 경영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많은 경우는 지능형 로봇을 개발하려고 하는 컴퓨터공학자나 로봇공학자일 것이며, 그들이야말로 이 글이 가장 필요한 대상이다.
현재 지능형 로봇은 우리나라의 신성장 동력으로 분류되어 정부차원에서 지원하고 있으며,
매스컴에서는 곧 영화에서처럼 로봇이 일상화된 생활이 도래할 것처럼 말하고 있다. 인간형 로봇이 각 가정에 자동차처럼 보급되어 일상의 일을 돕고,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대화하며 생활의 일부로 자리잡아, 머지않아 자동차 산업만큼이나 거대한 산업으로 육성되리라 기대하고 있다. 인간처럼 춤추고 움직이는 혼다의 아시모나 사람과 거의 똑같은 외양을 가진 여자 로봇 등에 고무되어, ‘이런 식이라면 인간과 같은 로봇이 곧 등장하겠는 걸.’ 하는 생각은 자연스러운 듯 보인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이제 막 이족보행 로봇을 성공시켰고, 하드웨어의 파워는 나날이 급증하고 있고, 정부와 기업이 다각적으로 지원하고 있으므로, 조금씩 로봇의 움직임과 센싱 능력을 향상시키고, 좀 더 방대한 데이터 베이스와 정교한 패턴인식 알고리즘, 그리고 신경망과 기계학습을 발달시키면 조금씩 조금씩 인간에 가까운 형태로 발달하다가 종국에는 인간과 같은, 그런 진정한 인공지능 로봇을 개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만약 그렇게 믿고 있다면, 안됐지만 상대를 잘 못 골랐다. 일찌감치 링에서 내려가 다른 분야를 찾아보는 게 나을 것이다. 우리의 상대는 아직은 어렵지만, 어떻게든 해 볼만한 그런 상대가 아니다. 우리의 링 위에서 맞서야 할 상대는 마이크 타이슨이 아니라, 티라노사우르스나 항공모함에 가깝다. 열심히 운동하고 투지를 가지고 싸운다고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란 말이다. 이런 상대를 이기려면 완전히 다른 접근방식 - 예를 들면 예산을 모아 군대를 투입하는 방식의 - 으로 접근해야 한다.
동의할 수 없는 말인가? - 그렇다면 당신은 반드시 이 글을 마저 읽기 바란다. 이 글의 목표는 ‘순진하게도’ 현재의 방식대로 연구하다보면 인공지능을 개발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단념시키고, 막막하더라도 올바른 접근 방식으로 안내하는데 있으니까.
현재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곳은 대부분 컴퓨터과학, 전자공학, 기계공학 쪽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인공지능 로봇을 연구하는데 가장 적합하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다. 튜링머신을 확장하고, 논리추론과 다차원벡터로 표상을 다룰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분야는 그들의 것이 아니다. 비유하자면, 컴퓨터의 본체가 플라스틱과 철판으로 되어 있다는 이유로 컴퓨터를 플라스틱 사출공장이나 대장간에서 개발하려고 하는 것과 같다. 물론 결국엔 그들도 필요하긴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컴퓨터를 개발하기 위해서 가장 적합한 사람들은 논리학자나 수학자다. 가장 밑바닥에서 형식논리나 부울 대수 따위의 원리와 개념을 만드는 것은 그들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은 본래 철학자와 심리학자의 분야다. 컴퓨터과학이나 기계공학은 가장 나중에 투입되어야 할 분야다. 그들은 거의 완성된 이론을 테스트하는데 필요할 뿐이다. 그러니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어이없는 지 짐작하겠는가? “자, 저 근사한 3차원 그래픽의 네트워크 게임을 만들어 보자구!” 하며 팔을 걷어 올린 일군의 대장장이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곧 절망에 빠져 술이나 먹는 일일 것이다.
아마도 지금 인공지능 - 로봇청소기 따위가 아닌 진정한 인공지능 - 을 개발하고 싶어하는 많은 컴퓨터과학의 실험실이 비슷한 상황일 것이다. 그들은 전통적인 내용들을 배운다. 패턴인식, 기계시각, 모터제어, 자연언어 파싱, 사이버네틱스, 신경망, 퍼지, 베이지안 네트워크, 히든마코프 모델, 합성캐릭터 등등. 그리곤 마이크로 마우스나 간단한 청소로봇, 혹은 어기적거리는 이족보행 로봇을 만든다. - 그리곤 멈춰 서서 절망한다. 이젠 도대체 뭘 해야 하는 거지?
할 수 있는 데까지 하고는 그제서야 모든 게 비어있음을 깨닫는다. 도대체 지능이 뭐지? 기억이 뭐지? 언어는? 어떻게 물체를 인식하지? 인식, 이라는 게 뭐지? 자아는? 욕구는? 고통은 뭐지? 본능이란 건 뭘까? - 마치 열심히 철판을 두드려 컴퓨터 비슷한 모양을 만들어 놓고 그제서야 고민에 빠진 대장장이들처럼.
아마도 대부분의 인공지능의 연구자는 위의 상황에 동의할 것이라 믿는다. 여러분의 스타인 MIT의 로드니 브룩스나 한스 모라벡도 마찬가지이다. 그들 역시 거대한 벽 앞에 가로막혀 좌절하고 있으며 무엇인가가 근본적으로 빠져있음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이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성악가가 갑자기 장대높이 뛰기를 하려고 할 때의 막막함과 유사한 것이니까. 장대높이 뛰기는 육상선수의 분야다. 그럼에도 굳이 장대높이 뛰기를 하고 싶다면, 먼저 육상선수를 찾아가 조언을 구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이미 수 천년동안 인공지능의 본질에 대해 연구해온, 철학자들에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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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우주의 원리나, ‘너 자신을 알라; 따위의 윤리적 경구를 생산해내는, 공학과는 전혀 관계없는 그런 분야가 아니다. 철학에 관심이 없는 공학도라면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말인가? 그야 당연한 거 아냐?” 정도로 치부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인공지능을 만들고 싶다면, 제일 먼저 시작해야 하는 것은 철학자들의 연구로부터 힌트를 얻는 것이다.
철학은 인간이 던질 수 있는 가장 심오한 질문에 대한 학문이다. 우주의 기원이나 존재의 의미 같은 것도 있지만, 역시 전통적으로 인기 있고 핵심적인 질문은 <도대체 인간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세상을 인식하고 생각하는가?>, <자아란 무엇인가?>, <언어는 사고를 지배하는가?>와 같은, 인공지능에서 결국 풀어야 하는 과제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영국의 경험론과 대륙의 합리론으로 구분되는 서양 철학사의 주요 흐름은, 바로 이 문제에 관한 의견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봐도 틀리지 않는다. 즉, 서양 철학이란 <인간 정신의 본질은 무엇인가>에 관한 역사인 셈이다. - 그러니 현재 로봇공학자들이 어렴풋이 질문을 던지는 부분에 대해, 수 천년간의 인류역사를 통해 기라성같은 천재들이 이미 충분히 고민을 해 놓았는데, 어떻게 우리가 이러한 연구결과를 참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특히 인식론, 현상학, 의미론, 언어분석철학 등은 인공지능연구의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의 철학 역시 마찬가지이다. 예컨데 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마음에 관한 연구, 오히려 심리학에 가깝다. 불교의 유식론은 인간이 어떻게 세상은 인식하고 받아들이는가에 대한 연구이며, 감각과 표상을 제거해 순수직관을 얻는 수행을 강조하고 있다. 불교의 기원이 될 수 있는 힌두교 역시 바가바드기타와 같은 책을 보면 수없이 등장하는 마음의 구조와 원리에 관한 비유들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그들의 철학과 종교가 선각자들의 깊은 숙고와 통찰에 기인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실로 데이비드 흄과 쇼팬하우어 등도 이들 동양의 철학서를 늘 옆에 두고 참고하였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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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함께 도움을 받을 곳은 심리학이다. 사실 많은 로봇공학자들은 이미 심리학적 연구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에 관심을 두고 있긴 하다. 그들은 주로 인지심리학이나 지각 심리학, 학습, 교육, 언어 등의 심리학의 전통적인 분야에서 힌트를 찾고 있다. 물론 이는 매우 훌륭한 접근이다. 우리가 지능로봇을 만드는데 아마도 50% 이상은 심리학적인 접근을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것 외에도 사회심리학, 발달심리학, 이상심리학, 성격심리학 등 훨씬 - 거의 대부분의 - 심리학적 연구가 적용되어야 하겠지만. 우리는 로봇을 만드는 것 뿐만 아니라 성장시키고, 학습시키고, 기르고 사회화시켜야 한다. 이는 인간의 아이를 기르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런 만큼 심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적용은 필수적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심리학 중에서, 정신의 본질에 가장 깊은 이해와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는 분야는 의외로 <정신분석학>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일반인들에게는 대체로 꿈의 해석이나 상징,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정도로, 혹은 조금 관심이 있다면 <이드-자아-초자아>와 <의식-무의식>의 존재에 관해 말하겠지만, 사실 프로이트는 정신의 구조와 작동원리에 관해 어마어마한 연구와 통찰을 보여준 사람이다. 정신분석을 통해 신경증을 치료하거나 꿈을 해석하여 정신상태를 파악하는 것은 그의 <심리학적 통찰>을 임상적으로 사용한 것일 뿐이다. 그는 일생을 통해 인간정신의 구조 전체를 편견 없이 파악하려고 노력했으며, 당시로선 유일한 방법이었던 심리학적 (컴퓨터나 뇌 과학이 부족했으므로 - 오히려 결과적으로 그는 가장 적절한 선택을 하였다)인 방법으로 진실에 접근했던 것이다.
신경생리 학자이자 의사였던 그는 모든 과학적, 의학적, 심리학적 방법을 동원하여 정신의 내부구조를 밝혔으며, 그의 <과학적 심리학 초고>를 보면 그가 충분히 자연과학적인(신경회로망에 가까운) 방법도 시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업적은 실로 지대한데, 비유하자면 컴퓨터를 만드는 작업에 있어서 OS(운영체제)의 존재와 작동원리에 대한 기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핵심적인 부분에 대한 연구를 선행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연구결과를 심도 있게 살펴봐야만 할 것이다.
프로이드와 함께 주목해야 하는 사람은 장 피아제이다. 아동교육학자로 유명한 그는 실제로 성장하는 아이들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인간의 인지적 능력이 어떤 단계로, 어떤 방식으로 발달하는지를 정확하게 묘사하였다. 이는 정신의 구조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알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자료이다. 이 밖에도 많은 주옥같은 연구들이 심리학의 분야에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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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부구조적 측면에서 정신분석과 함께 고려되어야 할 분야는 기호학이다. 특히 찰스 샌더슨 퍼스의 기호학(소쉬르가 아닌)은 의미와 내부 연상과정에 대한 중요한 힌트를 준다. 이는 우리의 정신구조 및 자아가 단지 개인의 테두리 안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주변 인물과 사회로 확장되어 있음을 파악하는데 중요하다. 이 점에 대해선 라깡의 연구도 함께 거론되어야 한다. 인간의 정신은 사실상 언어와 언어가 만들어낸 문화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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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과학 역시 중요한 참조분야이다. 우리는 뇌와 그 기능을 직접 관찰함으로써 많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컴퓨터 프로그램을 짤 때, 잘 이해하기가 어렵다면 한 문장씩 지우거나 추가시킨 뒤 실행시켰을 때 결과를 보고, 프로그램을 분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기계나 컴퓨터가 잘 돌아가고 있을 때보다, 뭔가 이상동작을 할 때 우리는 그 구조나 설계 방식에 대해 추측하기 쉽다. 예를 들어 컴퓨터게임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데, 음악파일은 잘 재생한다면, 우리는 무언가 프로그램에 따라 다르게 작동하는 음악재생 모듈이 존재하거나, 컴퓨터 게임의 어떤 모듈이 소리재생을 억제할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더듬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다리가 생긴 초파리를 본다면, 우리는 더듬이와 다리를 만드는 유전자가 따로 존재하며, 이들은 어떻게든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할 것이라 추축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뇌(혹은 신경계 전체)의 다양한 이상과 작동방식을 통해 정신의 원리를 추측할 수 있다. 10초만 지나면 더 이상 기억을 못하는 환자로부터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의 존재를 알아내고, 날아오는 물체를 손으로 잡을 수는 있지만 보이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환자로부터 운동지각과 형태지각이 다른 기작임을 추측한다.
또한 다양한 유전적 질환, 약물에 대한 반응, 전기적 자극이나 해부학적 연구 등으로부터도 역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예컨대 감정을 주관하는 뇌 부위인 아미그달라는 측두엽의 아래 안쪽에 존재하는데, 이는 냄새를 맡는 신경과 바로 연접한 부위다. 우리는 냄새가 즉각적으로 감정적 기억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측두엽은 또한 기억을 관장하는 해마가 있는 부분이다. 감정과 냄새와 기억 - 이들에 관한 중대한 관계는 심리학적, 정신분석적 연구와 일치하며 우리는 로봇의 기억과 학습구조에 대해 이러한 사실을 적용해야만 한다. 그리고 나아가 로봇에게 감정을 부여하기 위해서 - 감정은 옵션이 아니라 필수사항이다. 에어백이 아니라 엔진에 가깝다 - 감정의 의미와 기억에 있어서의 역할을 숙고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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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학을 포함한 생물학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분야이다.
우리는 <모든 형태의 지능>이 아니라, <인간형태의 지능>을 원한다. 인간처럼 갈등하고, 고뇌하고, 어울리고 의사소통하길 원하는 - 때로는 망각하고 실수하며, 창조성을 발휘하기도 하는 그런 지능을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어떻게 그러한 형태의 지능을 획득하게 되었는가. - 이에 대한 대답은 생물학과 진화학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 컴퓨터는 왜 필요하며, 어떤 기능을 하고, 어떤 역사를 거쳐 발달해왔는가를 안다면 컴퓨터를 개발하는 것이 훨씬 쉬울 것이듯이, 우리는 우리의 진화의 역사를 탐구함으로써 인간 정신의 출현과정을 연구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지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생물에게만 있고 무생물에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차이로부터 지능의 본질을 통찰할 수 있다. 또한 동물에게만 있고 식물에겐 없다. 이 사실도 우리에게 무언가 힌트를 준다. 척추동물, 특히 포유류나 고등 영장류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지능이라면, 그들의 구조적 특성이나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것이 많다.
지능은 또한 눈에 보이는 부분 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한 연구도 필요로 한다. 사회성, 협동, 경쟁관계, 계급형성, 구애와 양육 등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봐야만 해석될 수 있는 인간의 많은 행동양식 - 행동양식은 정신의 일부이다 - 을 제외시키고는 도저히 진정한 인공지능을 구현할 수 없다. <구애>의 본질을 모르고서 남녀 간의 미묘한 대화를 로봇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수컷들 사이의 생태학적<경쟁관계>의 이해 없이 남자들의 사회에 팽배한 긴장의 느낌을 읽을 수 있겠는가? <상호호혜>의 사회적 관습 없이 이타적인 행동의 가치에 대해 판단할 수 있을까?
이 모든 다양한 분야, 다양한 논의는 오직 하나의 실질적인 목표를 향해 겨누어져 있다. <진정한 인공지능 로봇을 만드는 것> - 지금까지의 관점을 무너뜨릴 준비가 되었다면,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chap.1 실패
146cm의 아담한 체구에 미끈한 외양을 한 로봇은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윽고 나무문 앞에서 멈춰 서고는, 손을 뻗어 손잡이를 잡아 돌리고 문을 연다. 그리고 성큼성큼 문을 지나 계단에 이른다. 로봇은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가 내려온다.
아시모. 일본의 자랑이자 현재 인간형 로봇기술의 최고봉으로 손꼽히는 이 인간형 로봇은 자동차 회사 혼다가 15년이상, 1000억원 이상의 예산을 들여 만든 최첨단 로봇이다. 불가능으로 여겨지던 이족보행을 1998년 아시모의 전신인 P2가 선보인 이래, P3와 아시모를 거쳐 현재의 버전에 이르기까지 혼다의 로봇들은 가장 인간에 가깝고 자연스러운 운동기술을 과시해 왔다.
걷고, 계단을 오르내리고, 회전하고, 수레를 미는 이 로봇의 엄청난 퍼포먼스에 세계는 경악했고, 많은 로봇기술자들이 자괴감에 빠졌다. 혼다는 이족보행로봇 연구를 10년 동안 철저한 비밀에 붙힌 채, 창문조차 없는 연구동에서 끈질긴 개발 끝에 ‘깜짝쇼’를 터뜨렸기 때문이다. 충격에 이어 P2는 세계적으로 엄청난 이족보행로봇 연구의 붐을 일으켰으며, 이어 미국과 한국 등 많은 나라에서 이족 보행 로봇의 개발에 성공했다. 일본 역시 소니나 NTT토코모 등의 대기업과, 와세다 대학을 비롯한 많은 연구소에서 이족보행로봇을 쏟아냈다. 돌파구가 열렸다. 이제 로봇에게 보다 정교한 센서, 보다 많은 행동자료를 입력하면 모든 게 풀릴 것 같았다.
이족보행 로봇은 혼다가 최초는 아니었다. MIT의 다리연구소에서는 이미 네다리, 두다리, 심지어는 외다리의 로봇이 달리고, 공중제비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재미있는 기계일 뿐, 로봇일 수는 없었다.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로봇은 인간의 형태를 가진 - 두 다리로 자연스럽게 걷는 형태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혼다의 로봇은 우리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온,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인간형 로봇이었다.
혹자들은 인간을 닮은, 인간과 같은 이족보행 로봇이 왜 필요한지 의아해 한다. 바퀴나 6개의 다리를 가진 로봇은 제작하기도 쉽고, 이동이 용이하며 안전하다. 그리고 우리의 일을 돕는 것이 로봇이라면, 로봇은 꼭 인간형일 필요가 없다. 빨래를 위해선 세탁기가, 설거지를 위해선 식기세척기가 있으면 되지 왜 굳이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는 인간형 로봇이 필요할까?(게다가 그들은 세탁기나 식기세척기처럼 효율적이지도 못하다) 어쩌면 이미 우리는 많은 생활 로봇들에 둘러 쌓여 살아가고 있다. 자동차(이동시켜주는 로봇), 세탁기(빨래해주는 로봇), 청소기(청소해주는 로봇), 전자렌지(음식을 데워주는 로봇) 등등. 왜 이런 기능들을 굳이 하나로 통합하려 하는가. 어차피 로봇을 만들어도 로봇은 다시 전자렌지를 이용하지 않고선 음식을 데울 수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인간형 로봇의 개발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 인간형 로봇은 인간을 위해 디자인 된 모든 생활환경에 그대로 인간과 치환될 수 있다. 청소하는 로봇, 빨래하는 로봇, 교육용 로봇을 따로 만들 필요 없이, 인간형 로봇은 그대로 인간이 사용하던 진공청소기와 세탁기, 교과서와 연필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 로봇이 경운기에 타서 운전할 수 없다면, 우리는 밭을 가는 로봇이나 로봇에게 맞는 경운기를 새로 개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형 로봇이라면, 우리는 그에게 경운기 열쇠를 넘겨주는 것으로 해결이다. 인간이 지금껏 사용해온 모든 도구와 기계를 그대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자칫 로봇을 위한 환경과 인간을 위한 환경이 분리될 수 있는 상황을, 인간과 로봇이 자연스럽게 공유하며 어울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인간의 형태인 것이다. 누구든 로봇과 같이 야구시합을 하며 놀 때, 인간과 같은 형태와 시합하기를 원하지 배팅머신처럼 생긴 야구기계와의 경기를 공정하다고 느끼진 않을 것이다.
둘째, 인간의 형태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로봇에 대응하는 법을 알려준다. MIT의 로드니 브룩스는 “코그 Cog 를 처음 봤을 때, 사람들은 코그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코그는 그가 제작한 상반신만 있는 인간형 로봇이다. 코그는 사람을 보면 사람을 향해 몸을 돌리며 눈을 움직이고, 사람들과 눈을 맞춘다. 브룩스가 ‘눈맞춤’이라고 부르는 이 행동은 사람들에게 ‘자신과 유사한 존재’와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런 느낌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대하고 있는 존재가 정체불명의 기계가 아니라, 살아있고 인간과 유사한 존재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 이것은 인터페이스(상호작용)을 위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인터페이스 할 때(혹은 대화할 때) 그 근저에 깔려있는 것은 ‘상대는 나와 같은 인간이다’라는 전제이다. 상대가 나와 같은 욕구와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이 둘 사이의 인터페이스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 남은 사과를 먹다가 누가 들어왔을 때, ‘미안해’ 라고 말하는 것은, 상대도 나와 똑같이 사과를 보면 먹고 싶어 하고, 자신만 먹고 있는 걸 보면 서운하게 느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미안해’라는 대화가 성립하는 것이다.
우리는 ‘표준 윈도우 프로그램’이라는 인터페이스에 익숙해있기 때문에, 처음 보는 프로그램이라도 각 버튼과 메뉴의 기능을 짐작할 수 있다. 손바닥 모양의 아이콘은 분명히 화면을 이동하는 버튼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수만년 동안 익숙해져 온 ‘인간이라는 형태’의 인터페이스에 익숙해져 있다. 우리는 사람의 형태를 한 존재는, 당연히 우리와 같은 욕구와 습성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짐작한다. 입이 있다면 말을 할 것이고, 손으로는 물건을 건네 줄 수 있을 것이다. - 인간형 로봇이란 바로 이런 인터페이스의 유사성을 제공한다.
이런 인터페이스의 유사성은 우리가 왜 인간형 로봇에 충격을 받는지 설명해 준다. 로봇은 인간형이라는 이유만으로, 인간처럼 걷고 만들고 말할 것이라는 기대를 준다. 그것은 기존의 자동 용접 로봇을 엄청나게 뛰어넘은 것으로 보인다 - 단지 외양만을 바꾸었을 뿐인데!
그러나 기대가 주는 배신감은 더 큰 법이라던가.
외양이 주는 기대가 단지 환상임을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다. 엄청난 버튼과 메뉴로 가득한 프로그램이, 우리가 버튼을 클릭했을 때 아무런 기능이 없는 버튼만을 단지 만들어 놓았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새삼스레 당연한 진리를 되새기게 될 것이다. - 반짝인다고 다 금은 아니다.
아시모는 열고 지나가야 할 문을 인식하고, 손잡이를 잡아 문을 열고 지나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확하게 그렇게 행동하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었다. 정확한 속도로 몇 발짝을 걸은 뒤, 정해진 위치에 손을 뻗고 일정하게 돌린 뒤 밀도록 미리 사람이 프로그램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아시모는 거기에 문이 없었더라도 똑같이 문을 여는 행동을 하고 지나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것은 장님이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로 정확히 연습한 데로 움직이는 것과 유사하다. 계단도 마찬가지이다. 아시모는 계단을 인식하고 오르내린 것이 아니라, 정해진 위치에 가면 계단을 오르내리는 계산된 동작을 한다. 계단은 반드시 거기에 있어야만 한다.
ATR 교토 연구소. 이곳에서는 매우 정교한 움직임을 보이는 로봇 DB2가 있다. 미국 사르코스 사에서 제작한 몸체는 고정된 채로 세워져 있지만, 그 손놀림은 마치 정말 살아있는 사람같다. 연구소에서 제작한 동영상을 보자. DB2는 두 손에 막대를 들고 있다. 그리고 세 번째 막대기를 두 막대 위에 올리더니, 마치 서커스단의 광대처럼 능란하게 막대의 양쪽을 번갈아 쳐 올리면서 지글링을 한다. 사람보다도 훌륭한 솜씨다. 이어 손에 컵을 들고 있고, 컵 아래에는 테니스 공만한 공이 실로 매달린 채 길게 늘어져 있다. DB2는 잽싸게 손을 흔들어 공을 위쪽으로 튕겨 올려내고 그 공을 바로 컵 위에 정확히 올려 받는다. 보기에도 쉽지 않아 보인다. 로봇은 정확하고 민첩한 솜씨로 정교한 운동능력을 - 그리고 그런 행동을 하려면 빠르고 정확한 감각능력도 필요로 한다 - 보여주고 있다.
DB2는 어떻게 그런 것을 할 수 있을까? 비록 말을 하거나 지능적이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감각의 운동의 협업만큼은 놀라운 수준에 이른 것일까? - 아니다. DB2의 동영상은 아시모의 경우와 같다. 이 놀라운 동영상의 제작 과정을 살펴보자.
먼저, 각 관절에 센서를 단 사람이 지글링을 한다. 이 움직임은 모션캡처되어 컴퓨터에 그대로 입력된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그대로 DB2에게 입력되어 따라하게 된다. 즉, DB2는 역시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지글링을 하는 사람의 팔 움직임을 똑같이 복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로봇의 손에 막대를 쥐어 준다. 그리고 지글링을 시켜보면, 대부분은 실패하겠지만 그중 몇 번은 사람처럼 지글링을 하게 된다.(운 좋게 그 움직임과 막대가 잘 맞아떨어지면) 그러면 당연히 그 성공의 사례만이 동영상으로 공개된다. 공을 컵으로 올려 받는 것도 마찬가지의 방식이다.
한국 KAIST의 로봇 아미 Ami 는 이족보행로봇은 아니지만, 긴 치마를 입은 사람과 유사한 외양을 하고 있다(치마 아래쪽에는 바퀴가 있어 미끄러지듯 움직인다) 초보적이지만 팔과 목을 움직이고, 가슴에 있는 LCD패널을 통해 몇몇 표정의 얼굴을 디스플레이한다. 아미는 TV쇼 프로그램에 나와 진행자들과 대화를 한다. 기계음으로 ‘나는 예쁜 누나가 좋아요.’등등 재치있는 대화를 하며 사람들을 감탄시켰지만, 그 대화는 로봇이 한 것이 아니다. 원격에서 사람이 말해준 것을 기계음으로 재생한 것에 불과하다. 물론 움직임도 원격조종이다. 즉 아미는 바퀴달린 원격조종 전화기(?)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행동기반과 포섭구조라는 패러다임의 혁명으로 로봇연구의 스타로 부상한 로드니 브룩스의 로봇 젠기스 Gengis 는, 이러한 프로그램되어진 로봇에 대한 노골적인 반기를 든다. 8개의 다리를 가진 벌레 모양을 한 50cm가량의 이 로봇은, 아무런 외부의 조종에 의하지 않은 채 독자적으로 복잡한 방안을 걸어 나간다. 그 걸음 역시 설정된 ‘걷기 프로그램’에 의해서가 아니라, 센서로부터의 얻은 감각을, 단순한 규칙에 의해 움직이는 다리의 모듈에 전달하여 자연스럽고 복잡한 걸음을 수행한다.
50년대 행동주의 심리학파를 연상케 하는 ‘마음(컴퓨터)의 존재를 부인하고 감각과 행동에 대한 연결’만을 통해 기존의 로봇들보다 훨씬 강력한 네비게이션(주어진 환경에서 이리저리 이동하는 것) 능력을 보여준 브룩스의 로봇들은, 한계에 도달한 듯한 인공지능 로봇 연구에 새로운 돌파구를 보여준 듯 했다. - 그러나, 한계는 또한 바로 거기까지였다. 곤충과 같은 단순하면서도 빠른 행동을 보여주는 로봇을 만들기 위해, 그는 곤충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그리고 곤충과 같은 성과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곤충정도의 수준이 그의 방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한계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포섭구조는 효율적인 근육운동의 모델일뿐, 정신의 구조에 대해선 아무것도 말해주는 것이 없었다.
브룩스는 국방부 DARPA 로부터 600만 달러의 지원을 받아 인간형 로봇 코그를 만들었다. 코그는 젠기스에서 보여준 것처럼, 위에서부터 top-down 가 아닌, 아래로부터 bottom-up 방식의 접근이 이루어졌다. 즉, 목표지점까지 가기 위해 이동경로를 산출하고, 이에 따른 다리의 움직임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다리의 각 근육의 움직임이 서로 상호작용하며 ‘걸음’을 창발해내는 방식으로. 물론 코그는 하반신이 없기 때문에, 네비게이션보다는 사람과의 상호관계 쪽에 중점을 두었다. 브룩스는 사람의 지능을 모방하기 위해서는 사람 자체를 연구하고 모델로 삼아야 한다는 점을 알았고, 그래서 발달심리학에 기반한 가장 기초적인 상호작용 - 눈맞춤, 시선이동, 제스추어 모방 등의 행동모듈부터 개발하였다. 그래서 코그는 아미처럼 유쾌한 농담은 하지 못할지언정, 사람을 보면 얼굴을 쳐다보며 시선을 옮기고, 그의 행동에 반응하여 따라하는 동작을 한다. 이런 움직임의 특성들은 보는 사람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다. 코그를 대하는 사람은, 이 로봇이 초보적이기는 하나 자신에게 반응하는, 살아있는 무엇처럼 느끼게 한다. 코그의 움직임은 기본적으로 유아의 행동을 모방한 것이기 때문이다.
미디어 랩의 신시아 브리질이 제작한 인형로봇 레오나르도는, 50cm정도의 털복숭이 인형이다.(마치 영화 <그렘린>에 등장하는 변신전의 동물, 기즈모를 닮았다) 레오나르도는 감각을 느끼는 피부를 가지고 있어서, 사람이 만지거나 하면 커다란 귀와 눈을 움직이며 반응한다. 사람이 다가가면 시선을 움직이며, 접촉에 꿈틀대며 반응하는 레오나르도를 접한 사람은 이 로봇이 살아있는(외양도 포유류처럼 생겼다) 존재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브리질 교수는 이전에 키스멧 Kismet 이라는 얼굴로봇으로 사람과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연구한 바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이다. 인간적 특성의 모방으로부터 구현하겠다는 접근은 좋았다. 그러나 가장 기초적인 몇몇 특성을(눈에 보이는) 모방했지만, 거기서부터 대화를 하고, 논리퀴즈를 푸는 사람의 지능까지 어떻게 연결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철판을 두드려 컴퓨터의 케이스만을 만드는 것은 충분치 못하므로, 진짜 컴퓨터처럼 보이려면 전원 버튼을 누르면 LED전구가 깜박거리면서 팬이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만들었다. 처음 얼마동안, 정말 컴퓨터가 부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국 거기까지이다. 더 이상은 진행되지도 않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물론 좀 더 관찰하고 노력하면 화면에 윈도우즈 로고가 뜨게끔 흉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들은 진실과는 너무나 먼 거리에 있다. 여전히 컴퓨터의 원리에 대해서는 거의 접근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인공지능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존 매커시는 “우리는 결국 기계에게 상식을 부여해야만 한다”며 자조적인 선언을 하였고, 브룩스 역시 “우리는 뭔가 중요한 것을 빠뜨리고 있다.”며 한계에 부딪힌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는 로봇청소기가 선풍적으로 팔리고 있다. 정부에서는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지능형 로봇을 선정하고 집중육성 정책을 고민한다. 각 지자체는 서로 로봇연구센터나 기업을 유치하려고 경쟁이 치열하다. 정부에서는 각 가정에 1대씩의 네트워크 기반의 국민로봇을 보급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다. 국방부에서는 미래의 전투를 위해 견마형 로봇을 개발하겠다고 발표한다.
로봇산업의 장밋빛 전망일까?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런 알맹이가 없다. 로봇청소기는 로봇이라기보단 자동청소기일 뿐이다. 그것은 기존의 진공청소기의 개정판이다. 아무도 청소기에 대고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한때 광고하던 인공지능 세탁기가 전혀 ‘지능적’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기업들은 섣불리 뛰어들지 않고 있다. 지능형 로봇의 시장이 아무래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지자체가 앞다투어 건설한 로봇연구센터에는 기업들이 입주하지 않는다. 가정용 로봇을 만들어도 팔리지 않는다. 도무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는 것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기능 때문이다. 집안의 문단속을 원격으로 확인하기 위해 꼭 네트워크 로봇을 거칠 필요는 없다. 그건 이미 전화기로도 가능한 기능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정책을 이끌고 있는 정부의 관계자나 연구원들조차, 무엇이 로봇시장을 일으킬 수 있는 킬러 애플리케이션인지 모르고 있다. 그리고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지능형 로봇에 대한 개념조차 명확히 서있지 않으며 무엇을 어떻게 진행시켜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맹목적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실패가 반복되고 있다. 50년전, 마빈 민스키는 ‘수년 내로 우리는 인간과 같이 생각하는 로봇을 갖게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의 사회>구상은 실패했다. 1980년대, 신경회로망의 역전파 학습법이 나왔을 때, 신경회로망의 한계를 극복하여 인공지능의 새로운 장이 열리리라 기대했었다. 그러나 여전히 신경회로망은 실험적인 분야이다. 브룩스가 행동기반 로봇을 제작했을 때, 역시 인공 지능에 대한 돌파구라고 여겼다. 그러나 행동기반 로봇은 행동만 있을 뿐, 지능은 없었다.
지능형 로봇에 대한 연구는 시작하기도 전에 삐걱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지능형 로봇의 난점은 연구의 진행에 따라 최근에야 비로소 그 어려움이 알려진 경우가 아니다. 그것이 어렵다는 것은 이미 2천년동안 논의되어 왔다. 그저 로봇공학자들만 몰랐을 뿐이다. 마치 혼자 열심히 계산하다가 ‘원주율은 정확하게 값을 구할 수없는 게 아닐까.’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 시골의 독학자와 유사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대견한 일이지만, 그건 이미 수백년 전에 밝혀진 내용이다. 그가 조금만 책을 찾아보았다면 많은 수고를 덜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학문 간의 단절에서 기인한다. 컴퓨터 과학이나 로봇공학자들은 자신이 씨름하고 있는 분야가 철학적 문제라는 것을 최근에 깨닫고 있다. 그리고, 조그마한 뱀의 꼬리를 잡아당기다 보니 거대한 공룡의 몸통이 딸려 나오더라는 사실과 함께.
쉬울 것 같은 문제가 사실 거대하고 본질적인 문제임이 밝혀지는 것은 그리 드문 경우가 아니다. 미 국립 암센터는 30년간 수 억 달러의 연구비를 쏟아 부은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 ‘생각했던 것처럼 쉽지 않더라’. 암은 단지 치료해야 하는 질병이나 신체의 고장이 아니라, 인간의 발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말하자면 다세포생물의 본질적인 기능의 일부였던 것이다. ‘이 말은 거짓말이다.’라는 다소 아리송한 말장난은 단순한 논리적 장난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실은 수학체계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균열이었음을 괴델이 ‘불완전성 이론’으로 밝혀내었다. ‘외계인에게 왼쪽을 어떻게 가르칠까’ 하는 질문은 결국 우주의 전하, 시간, 패리티 대칭성을 파탄시켜야만 가능한 문제임이 드러났다. 고온의 용광로의 온도를 어떻게 잴까, 하는 문제는 뉴튼의 역학체계를 완전히 뒤엎는 양자역학의 탄생을 촉발시켰다. 사람과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다면, 이라고 간단하게 제시한 튜링의 테스트는, 처음에는 간단한 프로그램으로 가능하리라 믿었지만 오늘날 그 어떤 시스템도 불가능한 인간정신의 본질적 기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능형 로봇을 만든다는 것, 즉 진정한 인공지능을 만든다는 것은 인간의 지능의 원리를 밝혀내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극도로 어려운 작업이다.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가장 거대한 두 가지 문제가 ‘왜 우주는 이런 식으로 존재하는가’와 ‘나는 무엇인가’라면, 인공지능의 연구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문제 중 하나(두 번째 질문)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지능로봇 연구실의 학생들은, 이미 인류의 가장 심오한 문제에 대해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 그 사실을 자신이 의식하고 있든 아니든 간에.
예전 대학원 수업시간에, 영한 번역 시스템을 구축하시려던 교수님이 자신 있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수한 학생들이 있고, 연구비를 투입한다면 물건은 나오게 되어 있다.” - 대체로는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도 있다. 번역은 인간 지능의 고차원적인 기능이다. 설계도 되어 있지 않은 건물의 펜트하우스부터 지으려 하면 가능할까? 과연 그 교수님은 걸어다니는 기능이 번역을 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무튼 쓸만한 영한번역기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 * *
수도꼭지를 떼어가려 했던 족장들의 오류는 무엇일까.
이들은 수도꼭지가 물을 만들어낸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피상적으로 인식한 결과이다. 그들은 수도꼭지 너머에 있는 거대한 시스템을 알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작은 수도꼭지만을 주시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 물이 나오는 수도꼭지를 가지려면, 그전에 상하수도 배수관을 묻고, 집수와 정수 시설을 만들고, 하수처리 시설을 건설하고, 나아가 상수도용 댐을 건설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댐을 설치하기 적절한 위치를 찾기 위해 지리학적 탐사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
인공지능을 얘기할 때, 이 우화가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수도꼭지를 보지 말고 그 뒤의 거대한 체계를 보라. 그러므로 우리가 논의를 시작해야 하는 부분은 수도꼭지가 아니라 (로봇이 아니라) 저 산속에 있는 강(인간의 정신)인 것이다.
이후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