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오멜라스를 떠났던 사람들

artificial mind 2020. 5. 4. 12:58

 

이 글은 어슐라 르귄의 유명한 SF단편,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The Ones Who Walk Away from Omelas>를 읽고 속편으로 쓴 글입니다. 원편을 안 보신 분은  http://blog.naver.com/hisgoing?Redirect=Log&logNo=140000320975 에서 먼저 읽어보길 권합니다.

 

 

류기정 

  

 

 

 

그대들, 오래되고 신비로운 이야기 듣기를 열망해 마지않는 자들이여.

상상하기 조차 어려울 법한 떠도는 전설들을 찾아 어두운 도서관, 낡은 책표지를 밤새 뒤적인 경험이 있다면 아마도 저 전설 속의 잊혀진 도시, '오멜라스'에 관한 이야기를 한번쯤은 들어 본 적이 있으리라.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 묘사된 너무나도 아름답고 찬란하기 그지없는 낙원의 도시의 정경과, 마치 천사처럼 순결하고 행복한 오멜라스의 주민들을 떠올리며 미소지었으리라.

그 황금의 도시와 향기로운 '드루즈'의 상상만으로도, 나 역시 그대들처럼 황홀할만치 벅찬 감격에 눈을 내리깔곤 했으니까.

하지만 기억하고 있는가, 그토록 흠없는 황금의 구슬과도 같은 오멜라스를 떠받치고 있는 숨겨진 비극을? - 충만한 행복에 도취되어 마냥 웃음짓던 그대를, 한순간 굳어버린 납덩이처럼 무겁게 만들고 숨이 막혀버린 듯 답답하게 하던 저 지하실에 감추어진 숨겨진 진실을 말이다.

오멜라스에 관한 이야기는 정말이지 믿기 어려운 것이었고, 처음 이야기를 듣던 그 날, 아무렇지 않은 듯 잠자리에 들었건만, 내 마음은 이미 산산이 찢겨져 나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결국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다. - 그토록 아름다운 이야기가 그토록 무시무시할 수 있으며, 그토록 자비로운 도시가 그토록 잔인할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으니, 아마도 그대들 역시 오멜라스의 이야기를 처음 듣고는 며칠간 밤잠을 뒤척였으리라.

하지만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사람은 기억하고 있겠지만 - 몇몇 사람들이 혼자서 그 오멜라스를 떠났다는 사실을. 그리고 문득, 괴로운 영혼을 달래기 위해 결국 정든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그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다는 강렬한 궁금증에 사로잡히고 만 것이다.

그대들은 혹시 궁금하지 않았던가? 오멜라스의 거대한 위선을 참지 못하고 도망쳐나온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물론, 나 역시 어떤 전설들은 차라리 그 뒷이야기를 갖지 않는 편이 훨씬 훌륭하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조심스레 오래된 도서관들과, 풍문처럼 들리는 소문들과, 나이가 많은 현자들을 찾아다니며 오멜라스에 관한 뒷 이야기들을 추적하였다. - 그리고 결국 오멜라스를 떠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으며, 이 역시 흥미롭고도 무시무시한 이야기이기에 그대들에게 전하고자 한다.

혹시 이 이야기를 원치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주면 된다네, 친구들... 어쩌면 이 이야기가 그대들의 기억 속에 있는 비극의 도시에 관한 슬픈 이야기를 떠올려 마음을 다시금 아프게 한다면, - 그렇다면 그런 자들은 차라리 유쾌한 선술집에 들려 맥주를 마시며 세상사에 젖어드는 게 나을테니!

오멜라스를 떠났던 사람들은, 대개 서쪽이나 북쪽의 산맥을 지나 멀리멀리 여행하였는데, 대부분은 북쪽을 향해 떠나갔다. 그 이유는, 원래 북쪽이란 자신의 고뇌와 투쟁하려는 방랑자들을 위한 방향이기 때문이었지. 그리하여 그들 중 몇몇은 산맥을 넘어 계곡사이의 조그마한 평야에 자리를 잡고, 모든 것을 처음부터 일구어 나가기 시작했다.

오멜라스의 풍족함과 화려함에 익숙하던 그들로서는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만, 그들은 확신에 찬 마음과 영혼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쁨으로 열심히 일하고 일하여, 오래지 않아 작지만 평화로우며, 가난하지만 부족하지 않은 작은 마을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마을은 한두명씩 오멜라스로부터 떠나온 사람들을 받아들이며 커져갔고, 점차 그 규모를 확장시키며 제법 활기차고 갖추어진 도시를 형성할 수 있었던 바, 무엇보다 이 작은 도시에는 어떠한 희생이나 계약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콩과 올리브를 재배하였으며, 양과 오리를 길렀다. 그리고 산맥으로부터 철과 구리, 심지어는 소량의 금까지 채굴하였으니, 비록 오멜라스만큼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충분히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을만한 행복한 마을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몇몇 젊은이들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으며, 추수감사제와 정기적인 축제의 음악소리가 계곡 사이의 작은 도시에 울려퍼지게 되었다. 결국 그들의 뇌리에서 저 먼 오멜라스라는 도시는 잊혀져 갔고, 깊고 어두컴컴한 곳에서 고통받고 있는 아이의 모습도 지워져 갔다. - 그러나 여전히 오멜라스는 번창했고, 아이 역시 여전히 지하실에서 떨고 있었다. 

기억에서 지워진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대들은 어쩌면 여기까지의 소식을 들은 것만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찌 세상일이 그렇게만 돌아가던가. 나 역시 여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었을때는 반갑고 다행스런 마음에 심히 유쾌하였으나, 아직 들어야 할 슬픈 이야기가 남아있다. 

몇 해가 지나고, 그 작은 마을에 무시무시한 천재지변이 닥치고 말았다. 엄청난 산사태와 그로 인한 화재가 마을을 덮친 것이지. 안타깝게도 그 때 대부분의 주민들은 깊이 잠들어 있었기에, 어쩌면 그 재난으로 모든 사람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을 수도 있었을 터이다.

하지만 한 사내가 깨어 있었고, 그는 엄청난 재앙의 조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굳건한 사명감과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주민들을 하나하나 모두 깨워 대피시켰으며, 타오르는 불길과 흙더미 속으로 뛰어들어 미쳐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과 아이들을 구해내었다.

그로 인하여 마을주민 대부분은 목전의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영웅적인 헌신을 한 그 사내는 불에 그을리고 흙더미에 묻혀서 크나큰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사내는 화상으로 엉망이 되었고, 온 몸이 마비되어 어떠한 의사소통조차 불가능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숨과 마을을 구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비극에 침통한 눈물을 흘렸다. 그러니 어찌 자신들을 위해 온몸을 던진 그의 고통을 모른채 할 수 있으랴! 

주민들은 그를 가장 좋은 방으로 옮기고, 온몸을 바세린 기름과 포목으로 둘렀으며, 간헐적으로 헐떡이는 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귀한 드루즈의 열매를 물에 개어 먹였다.

화상으로 일그러지고 온몸이 마비된 채,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을 죽을때까지 받아야만 하는 사내의 끔찍한 운명에, 살아남은 사람들과 아이들은 몸서리를 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순번을 짜서 돌아가며 사내를 극진히 간호하며 돌보았다.

사람들은 마을을 재건하기 시작했으나, 산사태와 화재로 타버린 마을은 이미 너무나도 뼈아픈 모습이었다. 광장과 교회와 도로는 무너졌고, 곡식과 양들은 불에 타고 말았다.

절망과 배고픔에 망연자실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다시 팔을 걷어붙혔으며, 아름다웠던 마을의 옛 모습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사내의 상태는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다. 아니, 조금이라도 드루즈의 약기운이 떨어지면, 이내 고통스러운 발작과 무시무시한 신음을 내뱉었고, 그런 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드루즈를 제공하여 몽롱하게 마취된 상태를 유지시켜야만 했다.

게다가, 문드러진 살갖이 욕창으로 썩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정기적으로 그의 몸을 감싼 포목을 갈아주어야만 했으며, 묽게 개어 만든 죽을 그의 입에 떠 넘기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물론 배설물 역시 받아내어 처리해야만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러한 힘든 간호를 결코 불평하지 않았다. 그는 모두의 은인인 것이다!

당연히 그를 위하여, 그의 고통을 덜기 위하여 마을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믿었다.

마을의 재건은 생각처럼 잘 진행되지가 않았다. 많은 토지가 산사태로 못쓰게 되었으며,장비는 모두 파괴되었고, 게다가 기나긴 가뭄까지 겹쳐서 이 계곡 속 마을의 삶은 정말 이지 말이 아니었다. 굶주림과 궁핍함, 그리고 일상의 고단함이 지리하게 이어지자, 사람들은 지쳐가기 시작했다. 모든 상황이 절망적이었고, 겨울은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더이상 주민들에게 계곡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휴식처가 아니었다. 늘 모자란 양식을 구하기 위해 늦도록 힘겹게 일해야만 했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마을을 수선해야만 했다.

하지만 모두들 알고 있었으리라. 그들은 어쩌면 감내하지 않아도 될 수고 때문에 그들의 노력이 제대로 보상받고 있지 못함을.

사내의 고통을 달래기 위한 드루즈 열매는 이미 바닥나버렸고, 매일매일 소모해야 하는 드루즈를 구하기 위하여 주민들은 수확의 대부분을 팔아치워야만 했다. 오멜라스에서와는 달리, 드루즈는 몹시 귀하고 비쌌기 때문에, 주민들의 노동의 대부분은 드루즈 열매를 구하는데 바꾸어졌다. 그렇다고 그런 노력의 댓가로 사내에게 차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드루즈는 단지 그의 고통을 잠재울 뿐이었고, 그 역시 대부분의 시간을 마취상태에서 몽롱히 견디어 내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 그에게는 치유될 수 있다는 어떠한 희망도 없었으며, 다만 죽을 때까지의 끝없는 고통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죽기 전까지는 드루즈를 필요로 했으며, 아울러 하루에 적어도 세명의 간호인의 노력을 요구하였다.

누구도 사내의 간호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지만, 다들 서로의 마음속에 있는 차마 말로 꺼내지 못하는 생각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사내만 없다면, 그만 죽어버린다면 어쩌면 이 마을은 예전처럼 풍요로와질 수 있을 테고, 다시금 행복과 웃음이 넘쳐나게 되리라는 것을. - 하지만 그건 누구도 감히 발설할 수 없는 잔인하고 배은망덕한 얘기였다. 우리가 지금 누구 덕분에 살아 있는가! ...그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모두 한 줌의 재로 버려졌을 것이 아닌가!

하지만 희망이 없는 고통만큼 견디기 어려운 것이 있을까. 사람들은 차라리 그가 빨리 죽기만을 은근히 기대하였다. 아니, 어쩌면 견디지 못한 누군가가, 그를 실수인 척 살해한다면 아마 사람들은 모두 모른척 애도하며 성대히 장례를 치를 것이리라. 어쩌면 그것이 사내를 위해서도 더 나은 일이런지도 모른다. 그의 여생은 오직 고통뿐일 것이며, 아마도 생각도 못하고 오직 동물적인 본능만이 남아 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사내자신도 죽음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억지로 그를 살려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도취된 희생과 습관적인 무기력속에서 다들 서로의 눈치만 보기 급급하였으며..... - 사내는 고통속에서 영영 죽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이제 그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말았는지 이해하겠는가? 그들이 어떤 딜레마에 빠지고 말았는지, 그들이 어떤 잔인한 갈등에 붙들렸는지 말이다.... 그리고 '오멜라스'에서 그랬듯, 이 마을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닥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어느날, 주민중 한 사람이 사라졌다. 떠나간 자는 비록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다들 알고 있었다. - 그는 마을을 떠난 것임을. 무작정 어디론가 떠났을 수도 있고, 어쩌면 오멜라스로 돌아갔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마치 봇물이 터지듯, 매일 매일 한 명씩 혹은 두어명씩 마을을 떠나는 사람들이 속출하였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결코 '오멜라스'에서 벗어나지 못했슴을. 

오멜라스의 속죄를 위해 고통받는 아이의 비극을 위해 그들이 했던 것은 고작 눈을 돌리는 것 뿐이었으니까. 

그들이 오멜라스의 행복을 버리고 도시를 떠난 것이, 자신의 양심과 죄책감에는 안식을 주었을 지 모르겠지만, 아이는 여전히 고통받고 있었고 거대한 위선의 도시는 아무렇지도 않게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 '오멜라스'는 어디에나 있었다. 그들은 오멜라스로부터 단 한 발짝도 벗어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차라리 그 위선을 받아들이고 행복을 누리거나, 아니라면 계약을 부수고 아이를 구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오멜라스에 남아있던 사람들이라고 마음이 고통이 없었겠는가. 위선과 타협하는 자신을 껴안고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떠나는 것보다 힘든 것임을 차마 생각해보 못했던 것일까... 하지만 그 때 그들이 택한 것은 오직 <중립>.... - 떠남으로써 회피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 번 떠났던 자가, 왜 두 번을 못 떠나겠는가. 

하지만 "지옥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곳은, 결정적인 순간에 오직 중립만을 고수한 자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 " 는 오래된 현자의 날카로운 경구가 납덩이처럼 다시금 발걸음을 옮기는 그들의 무거운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으리라.

어떤 이들은 오멜라스로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금 어떻게 그 위선된 행복의 도시에 익숙해져 갔을지는 나도 상상하기 어렵다. 오멜라스로 돌아가지 않았던 사람들 역시, 결국은 어딘가에 새로운 오멜라스를 지었으리라. -오멜라스를 떠났던 사람들은 그렇게 결국 오멜라스로 돌아오고 말았던 것이다. - 아니, 그들은 오멜라스를 떠났던 적이 결코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자신들이 했던 행동이 무엇이었는지를 막연하게나마 깨달은 것 같다. 오멜라스를 떠났던 사람들은.....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