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너희는 나의 외로움을 아니?

artificial mind 2020. 5. 5. 17:48

류기정,2002

 

 

 

 

 

어느덧 어둠은 깊어가고, 가야금을 내려 놓고 술잔을 따르는 곱게 차려입은 여인의 얼굴은 등잔불에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 훌륭하구려, 임자야말로 팔방미인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줄을 튕기는 소리가, 그야말로 심금을 울리는구먼." 

"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자, 한잔 받으시지요...." 

" 허허허, 그럽시다.... 한잔 따르시구려.."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학 한마리가 멋들어지게 상감된 흰 술잔을 들었다. 옥빛의 사기 술주전자에서는 맑게 붉은 빛이 도는 오미자주가 흘러나왔다. 술을 따른 여인은 다소곳이 앉아 눈웃음을 던졌다. 호젓한 초가을 밤의 운치가, 어느덧 들려오는 귀또리의 울음소리에 담겨져 있는 듯,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 임자는 서화에도 능하고, 가무는 물론 가야금도 이리 잘 다루니, 어찌 재능이 풍부하다 하지 않겠소? 뿐만 아니라, 생각 또한 명석하고 사려가 깊으니 정말 보기드문 총명한 여인인 듯 하오. " 

"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대감. 오히려 변변치 못한 저와 대화를 맞추어주시니 저야말로 감사할 뿐이지요..." 

그는 다시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 하하하, 그리 겸손할 것 까지야... 헌데, 내 궁금한게 있소이다.... 임자같은 여인이 왜 하필 나 같은 자를 흠모한다는 것이요? " 

여인은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 그건 소녀도 모르겠습니다.... 허나 대감께옵선 어딘가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소녀가 비록 깊은 학식은 없지만, 사람을 보면 그 사람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기운을 느끼는 감은 있사옵니다. 대감께선 분명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특출함이 느껴지옵니다. " 

" 내가? .....거 묘하구려.. 정말 그런게 느껴진단 말이오?" 

" .....그렇사옵니다. 대감께선 언뜻언뜻 이해할 수 없는 말씀도 하시곤 하지않습니까? 소녀는 대감께서 필시 마음속에 감추고 있는 것이 많으시리라 짐작하고 있사옵니다. " 

" 허허, 이거 정말이지 예리하기 짝이 없구먼! 임자는 나도 몰래 나를 많이 살펴보았나 보오? " 

여인은 부끄러운 듯 눈을 흘겼다. 

" 참으로 짖궂으시군요! 자, 소녀도 한잔 따라 주시지요.. " 

" 그러구려! 하하... 자 한잔 받으시오! 내 오늘은 정말 기분이 좋구려." 

그의 얼굴은 취기와 흥겨움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상 위에 놓여진 맛깔스런 안주를 집어드는 그의 얼굴은, 늘 엄격했던 평소와는 다르게 살짝 풀어진 듯한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 ....이렇게 임자와 같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니, 이 어찌나 즐거운 지 모르겠소... 진작 만났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 

" 그리 말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대감 " 

" 아니오, 임자만큼 총명하고 명석한 사람은 정말이지 흔치 않다오. 임자는 글뿐 아니라 구구법도 알고, 또 천문도 보지 않소? 점잖은 사람들은 대개 그런 잡학들을 경멸하기 마련이지만 - 난 실용적인 학문을 중시하는 사람인지라, 그런 잡학들에 관심이 많소이다. 헌데, 임자도 역시 그런 것들에 관심이 있는 듯 하니 어찌 내 반갑지 아니하겠소? " 

" 저 역시 어려서부터 이것저것 관심이 많았답니다... 또 이런 곳에 있다보면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다양한 이야기들을 듣게 되지요. - 그러다 보니 자연 흥미가 생겨, 책도 구해 읽어보게 되었지요. " 

" 허헛, 장한 일이오. 임자는 '구장산술'도 읽어보았다고 했소? " 

" 다 터득한 것은 아니지만, 읽어는 보았지요. " 

그는 묘한 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물었다. 

" 나도 흥미롭게 읽어 보았다오, 임자. 그럼 혹 팔십일의 평방근이 얼만지 아시오? " 

" 구구는 팔십일이니, 팔십일의 평방근은 구가 아닙니까? " 

" 허허헛! 맞았소, 그럼 일백이십일의 평방근은 얼마오? " 

여인은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 일백이십일의 평방근은 십일 아니오이까. " 

" 훌륭하구려! " 

그는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졌다. 만면에 웃음을 가득히 담고는 오미자주를 한잔 더 들이킨다. 취기에 기분좋게 반쯤 비스듬이 기대었다. 

" 그럼 하나 더 문제를 내도 좋겠소? " 

" 어떤 문제이오이까? " 

" ....이(二)의 평방근은 얼마가 되겠소? " 

여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하였다. 

" 이의 평방근은 없사옵니다. " 

" 왜 없소? " 

그는 고개를 바짝 들이밀며 재차 물었다. 

" 일(一)일(一)은 일(一)이고, 이(二)이(二)는 사(四)이니, 제곱하여 이가 되는 수는 없사옵니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 그렇다면 아마도 이의 평방근은 일과 이 사이에 있으리라 생각되지 않소? " 

" 하오나 일과 이 사이에는 수가 없지 않사옵니까? " 

" 하지만 그 중간이 있지 않소! 한냥과 두냥 사이에 한냥닷푼이 있고, 한푼과 두푼 사이에 한푼반닢이 있듯이 말이오?! 십분지 일을 할이라 하고, 할의 십분지 일을 푼이라 하듯이 말이오." 

" 그러하옵니다만....." 

그의 눈빛은 기대와 흥분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 그렇다면 수와 수 사이에도 그런 식으로 할푼리를 적용할 수 있지 않겠소? 일과 몇할 몇푼 몇리가 있듯이 말이오... 일과 이의 한 가운데를 '일과 오할'이라 하면 되지 않겠소? " 

" 일과 오할이라....그리 말할 수 있겠지요. " 

" 그렇지? 그렇지? 허헛, 내 임자는 알아 들을 줄 알았소! " 

그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진 듯 했다. 

" 이런 식으로 하면 이의 평방근을 표현할 수 있지 않겠소? 일과 몇할 몇푼 몇리...하는 식으로 말이오? " 

" 그렇다면 이의 평방근의 값이 대체 얼마란 말씀이오이까? " 

" 일과 일할 사푼 일리에 가까운 값이겠지만, 정확하진 않소! 사실 그 수는 끝없이 이어지는 거라오. 일리와 이리 사이의 무한히 정교하게 기술할 순 있지만 끝은 없는 수라오! " 

" 그게 무슨 말씀이시온지..... " 

여인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 자, 이렇게 생각해 보시구려! .....사람들은 일과 이 사이에 수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사이를 열개씩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지 않겠소? 그걸 구분하기 위해 이렇게 할을 나타내는 수 앞에는 점을 찍는거요.... 이걸 소수점 이라고 칭합시다. 그리고 이 <할>을 나타내는 수를, 소수점 첫째자리라고 말하는 거요." 

그는 팔을 걷어붙히고, 젓가락 끝을 술잔에 찍어 상위에 술로 글을 쓰며 말했다. 

" ...그리고 할과 할 사이를 열등분 하여 또 다음자리에 쓰는 거요. 그럼 이 수는 일의 백분지 일을 나타내고 소수점 둘째자리가 되는 거요. ... 그리고 그 다음자리에 쓰는 수는 그 십분지일, 다시말해 일의 천분지 일을 표현하는 거요. - 이렇게 계속해나가면 무한히 작은 숫자를 표현할 수 있는 거라오! " 

그는 젓가락으로 다시 술을 찍어 길게 선을 그렸다. 

" 자, 이 막대에 수를 표시해 보는 거요, 여기는 일, 여기는 이.... 이렇게 되면 이 막대의 이 위치는 하나의 숫자를 표현하게 되는 거지. 이게 수직선이라는 거요... 자, 그리고 일점오, 즉 일과 오할은 바로 이 위치가 되는 거요! .... 아시겠소? 그러면 이 막대에서 일과 이 사이에 찍을 수 있는 점의 갯수가 몇개나 되겠소? 무한이지! 무한히 찍을 수 있단 말이오....! 다시 말해 일과 이 사이에는 무한이 많은 수가 있는 거라오.... 이것을 '실수의 연속성'이라고..." 

정신없이 얘기하던 그는, 문득 고개를 들어 동의를 구하려는 듯한 표정으로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그러나 그가 본것은 이해할 수 없는 당혹감과 안타까움, 그리고 혹 이 자가 실성한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뒤섞인 안쓰러움의 표정이었다. 창백해진 여인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소리를 지를 것만 같았다. 


그의 손에서 젓가락이 떨어졌다. 

취기와 흥분으로 상기되었던 그의 얼굴이 순간 파르르 떨리는가 싶었으나, 곧 평정을 되찾고 얼굴색이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잠시의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동안, 문밖에서 들려오는 귀뚜라미의 소리가 방안을 채웠다. 


그는 자세를 가다듬었다. 

손을 뻗어 술잔을 집어 비우고는,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 .... 미안하구려. 취기에 이상한 소리를 했나 보오, 허허헛! 술이 과해지면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만다니까. 잊어버리시구려... " 

그제야 여인도 마음이 놓인듯, 다시 얼굴에 웃음을 머금었다. 

" 소녀, 깜짝 놀랐더이다... 대감께서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셔서..." 

" 허허헛, 잊으라니까! .... 내 과음하면 혀가 꼬여서 그런가 보오... 내 임자와 술을 마시니 기분이 좋아 이리 술을 마신거 아니겠소? " 

" 이제 약주는 그만 드셔야 할 것 같사옵니다. 많이 취하신 듯 하온데..." 

" 아니오, 아니야! 한잔 더 따르구려! 내 오늘은 단단히 취해버리고 싶구려." 

" 그러시다가 또...." 

" 괜찮다니까! 내 잠시 황망했던 것 뿐이라니까.... 어서 한잔 따르시게.. " 

여인은 다시금 빈잔에 술을 따랐다. 

그는 따라준 술은 단숨에 들이키고 탁, 내려 놓았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털어버리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젓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 술이란 참으로 고마운 것 아니오! 취하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니까..." 

" 대감도 참...그러다가 소녀도 잊어버리시렵니까? " 

" 허허허... 내 어찌 그럴 수 있겠소, 말이 그렇다는 것 뿐이지... 그저 술을 마시는 동안은 세상근심을 잠시 잊자는 거 아니겠소. "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 자, 임자! ..... 임자의 가야금 소리가 듣고 싶구려.... 한 곡 들려 주지 않겠소? " 

여인은 살포시 웃으며 대답했다. 

" 그러지요, 대감. " 


여인은 가야금을 튕기기 시작했다. 낭랑한 현의 떨림이 고즈넉한 가을밤의 방안을 가득채웠다. 그는 미소를 머금은채 눈을 감고, 천천히 머리를 뒤로 기대었다. 

....그는 문득, 눈물이 울컥 치밀어 오는 것을 참기 어려웠다. 치밀어오르는 눈물을 숨기고자 그는 고개를 떨구며, 마치 음악에 장단을 맞추는 양, 고개를 흔들었다. 웃고 있는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 정말이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도록 취해버리고 싶었다. 수십년간 혼자 가슴에 담고 살아야 했던 과거와 비밀들을, 이 곳에서 애써 적응하여 살아가다가 잊을만하면 떠오르는 옛 기억들을.... 수천번 수만번 고민해봐도 알 수 없었던, 왜 자신이 이 시대로 떨어져 살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 지독한 외로움을.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