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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원리 : 스트레스와 감정

artificial mind 2020. 5. 4. 10:58

2006    

 

 요약

동물은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한지 불리한지 판단하는 데 감정을 사용한다. 가장 핵심적인 감정은 고통과 쾌락인데, 다른 감정들은 모두 여기에서 파생되어 나올 것이다. 동물의 신체내외부의 감각기관으로부터 발생하는 신경신호를 중추 신경계에 축적하게 되는데, 이를 ‘스트레스’라고 하며, 동물은 이를 방출/해소함으로써 체내의 낮은 스트레스 상태를 유지하고자 한다. 이때, 스트레스의 급격한 상승을 고통, 급격한 방출을 쾌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스트레스

 

단순하게 생각하면, 생물이란 외부로부터의 감각자극을 적절한 운동으로 바꾸어 생존해 나가는 존재이다. 이때 감각자극을 받아들이는 부분을 감각기관, 운동을 일으키는 부분을 근육과 내분비계, 그리고 감각자극을 적절한 운동으로 변형시키는 부분을 신경계라고 한다.

 

 감각기관(시세포, 청세포, 후각세포, 기계적 감각세포 등)은 신경세포의 변형된 말단이며, 내분비 세포나 근육세포 역시 신경세포와 유사성을 공유하는데, 전기화학적 신호에 의한 급작스런 변화(신경세포일 경우엔 흥분의 전달, 근육세포의 경우엔 수축)을 야기한다는 점이 그러하다. 또한 내분비세포 역시 호르몬의 방출을 외부세계에 대한 운동이라고 볼 수도 있다.(신경계의 관점에서 보면 혈관은 외부이다.)

 

 신호를 적절하게 변형시킨다고 간단하게 말했지만, 실제 신경계에서는 표상화, 학습, 기억, 판단, 추리 등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과정이 존재한다. 결국 뇌와 정신에 대한 연구는 이 과정에 대한 해석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단순하게 보면 외부로부터의 감각자극은 신경계를 거쳐 운동으로 방출된다고 볼 수 있으며, 이 경우 운동의 원천은 외부의 감각자극이 된다.

 

 단순하게 양적으로 보면, 당연히 많은 입력은 많은 출력을 낳는다. 즉, 많은 감각 신호는 많은 운동을 낳는다. 모기가 살짝 물었을 때에는 몸을 꿈틀거릴 뿐이지만, 칼에 찔리면 그는 소리를 지르고, 펄쩍 뛰고 도망가거나 맞서 싸우는 등 큰 운동을 방출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평온할 때는 굳이 움직이려고 하지 않으나, 많은 자극이 입력될 때 - 고통스럽거나 불편할 때 - 이를 움직임으로써 이 자극을 방출하고, 아울러 ‘적절히’ 움직임으로써 감각자극을 없애고자 한다.

 

 이 때 감각자극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일 수도 있으나, 신체 내부로부터의 자극 - 위장이나 근육, 혈관 - 일 수도 있다. 신경계의 입장에서 보면, 맹수의 습격이나 혈당량의 부족, 혹은 특정 호르몬의 증가 등은 똑같이 자신에게 주어지는 감각자극일 뿐이다. 그러므로 신경계는 외부 혹은 신체 내부에서 기인하는 감각자극을 최소화하고자 한다. 그 결과가 운동이며, 가장 효율적인 운동방식을 찾는 것이 중추신경(마음)의 역할이다. 이는 일찍이 프로이트가 주장한 바와 같다.

 

 유아는 주어진 감각을 적절한 운동으로 변형시키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무작위적인 방출이 이루어진다. 배가 고프면 그 감각자극(신경충동)은 경련적이고 발작적이며 체계화되지 않은 방식으로 방출된다. 팔다리를 휘젓고 소리를 지르는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그러나 점점 학습을 해 나감에 따라 그 에너지(감각자극)를 보다 효율적으로 쓸 수 있게 된다. 부모를 부르거나, 음식을 달라고 하거나, 혹은 스스로 음식을 찾아 먹는 등의 방법으로.

 

 프로이트는 감각신경자극을 ‘긴장 tension’이라고 표현하였다. 혹은 신경충동, 충동, 신경에너지 등의 다양한 표현을 하였는데, 이는 모두 유사한 개념이며 구체적으로는 신경세포의 흥분전도 action potential 이다. 프로이트는 이 개념은 추상적이지만 정량적으로 다룸으로써 그의 이론을 전개시켜났다. 나는 이 개념을 스트레스 stress라고 부르겠다. 즉, 감각계로부터 입력되는 신경자극은 모두 스트레스이며, 이는 가치중립적이다.(상처의 자극, 혹은 말소리, 음식의 맛 등 모든 자극은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스트레스의 발생

 

 모든 감각신호는 스트레스이다. 상처로 인한 통각세포로부터의 신호는 물론이거니와, 풍경을 바라보는 시각세포로부터의 감각신호 역시 스트레스이다. 즉, 스트레스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다. 스트레스가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전적으로 양에 기인한다.

 

 동물이 살아있는 한, 스트레스는 끊임없이 생산되고 유입된다. 이는 극히 정상적인 과정이며, 삶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배고플 때 먹이를 찾아 움직이게 하는 원천이며 짝짓기를 시도하여 종족을 유지하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사실 모든 운동과 생리작용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스트레스가 너무 많이 쌓이거나, 급격히 늘어나는 사태는 위험하다. 이는 비정상적인 상황이며, 적극적으로 해소해야하는 상황이다. 물리적 충격으로 인한 강한 자극을 받으면 감각세포는 맹렬하게 신호를 발산한다. 이는 급격한 스트레스의 유입을 일으키며, 비상사태라는 신호이다. 혹은 지속적 기아로 인해 위벽세포나 혈당량 감지세포가 맹렬하게 신호를 보내기도 한다. 정상적 성교의 부족으로 축적된 정액이 고환에 압력을 가할 수도 있다. - 모든 일상적 범위를 넘어서는 감각의 자극은 스트레스를 생성한다. 너무 밝은 빛, 너무 큰 소리, 지나친 추위나 더위, 혹은 중추신경계 내부에서 어떤 이유로 인해 생성되고 쌓여버린 신경충동의 증가 - 이는 마치 고무풍선 안에 채워진 물과 같아서, 쌓이면 쌓일수록 방출에 대한 강한 압력이 작용한다.

 

 

스트레스의 방출

 

 앞에서, 스트레스의 방출은 동물의 가장 원초적인 행동양식이며, 신경계의 기본원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어떤 방식으로든 스트레스를 방출하는 것은 동물에게 유리하다. - 그런데 스트레스를 방출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운동이다. 그렇다면 모든 운동은 동물에게 유리한 것인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가장 일반적인 세 가지 경우는 1)신체의 물리적 위해, 2)배고픔, 3)성적 불만족이다. 이들에 대해 스트레스의 방출을 고찰해 보자.

 동물이 배가 고파서 위장과 혈관 등으로부터 감각자극이 격렬히 발생하고, 이로 인해 스트레스가 증가하고 있다고 상정하자. 그렇다면 동물은 이 스트레스를 이용하여 뛰어다니거나 소리를 지름으로써 스트레스를 방출하고 만족할 수 있을까?

 

 답을 말하자면 ‘그렇다.’ - 내부에 쌓이는 스트레스는, 그 기원을 막론하고 모두 똑같다. 상처로부터 기인한 스트레스든, 배고픔으로부터 기인한 스트레스든 구분하지 않는다. 신경계는 어떤 방식으로든 이 스트레스의 수위를 낮출 수만 있다면 만족한다. 중추신경의 입장에선 이들 감각신호에 질적인 차이는 없다(non-modal) 내부에서는 오직 정량적인 관계만 존재한다. 감각의 성질의 차이는 사실 외부세계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배가 고플 때 소리를 치거나 성교를 하는 것은 스트레스를 감소시킨다. 아이들은 주사를 맞아 아플 때, 맛있는 사탕을 주면 울음을 그친다. 상처를 입었을 때, 비명을 지르는 것이 순간적으로 고통을 감소시켜 주는 것과 같다. 순식간에 급증한 스트레스를 소리를 지름으로써 황급히 방출시키려는 기작인 것이다. 화가 치밀 때 사람들은 물건을 파손하거나 소리를 지르는 행위가 그들을 진정시키고 스트레스를 해소시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원인과 관계없는 방출은 결코 원인을 제거하지 못한다. 소리를 지른다고 공복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식의 방출은 효과가 없다. 스트레스는 계속 유입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물은 그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운동을 계속하게 된다.

 

 

 감정

 

 

슬픔, 노여움, 번민, 연민, 동경 등 수많은 종류의 감정이 있겠으나, 감정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는 두 가지, 즉 쾌락과 고통이다. 이로부터 파생된 수많은 다른 감정들의 정체와 원리를 밝히는 것은 흥미로운 주제이나 여기서 논할 바는 아니다.

 

 쾌락과 고통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깊이 고찰해 보면, 쾌락은 생물로 하여금 그 상황을 계속 반복하도록(혹은 안주하도록) 하는 상태이고, 고통은 그 상황을 벗어나려고 하는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생물체는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거나, 혹은 이를 만끽하고자 하는가? 그것은 자신의 생존과 자손의 번식이라는 두 가지의 목적을 기준으로 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신체를 훼손하는 상황이나 번식을 방해하는 상황은 생물체에게 피해야 하는 상황이며, 이러한 상황은 고통으로 인식되어져야 한다. (이는 진화적 결과이다.) 반면,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상황은 쾌감으로 인식되어지고 이를 추구하도록 해야 한다. 진화는 생물체에게 이러한 절대명제를 기준으로 고통과 쾌감을 발달시켜왔으며, 이를 바탕으로 생물체의 모든 행동양식이 파생되어 나온다.

 

고통은 높은 스트레스 수준이다. 

 

그렇다면 고통과 쾌감은 어떤 원리로 작동하며, 그 발생과정은 어떠한지 살펴보자. 전술한 데로, 생물체는 신체내외에서 발생한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려는 존재이다. 예를 들어 낮은 혈당량이나 비어있는 위장은 끊임없이 신경신호를 발생시킨다.(이 역시 진화적 결과로, 선천적으로 구조화 된 기작이다.) 그러면 신경계에는 계속해서 스트레스가 축적된다. 이는 좋지 않은 상태이며, 신경계는 이 축적되는 스트레스를 제거하고자 한다. 유입되는 스트레스는 방출해야 하는데, 그 방법은 운동이다. 그러나 신경신호를 근육으로 방출하여 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인다고 해서 신경신호의 유입이 멈추지는 않는다 . 그런데 만약 근육이 적절히 움직임으로써 - 음식을 찾아 먹음으로써 - 배를 채운다면, 위장은 더 이상 신경신호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그러면 신경자극은 줄어들고, 신경계에 쌓이는 스트레스의 양은 점차 줄어든다. 그러면 운동신호의 원천이 사라지게 되며, 생물체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이 상황을 외부에서 관찰하자. 스트레스가 체내에 쌓이면, 동물은 운동을 하게 된다. 더 나은 환경을 찾아 이동하든, 혹은 먹이를 찾아 이동하는데, 이것이 바로 ‘불만에 대한 동물의 행동방식’이다. 동물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바로 일정 수준의 스트레스이며, 외부에서 보면 마치 동물이 불만으로 인해 다양한 시도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이 동물을 때려보자. 물리적 충격으로 인해 감각세포로부터 급격한 스트레스의 유입이 발생하면, 동물의 운동은 급격히 늘어난다. 급격한 방출을 위해 보다 격렬하고 강한 운동 - 근육의 경련이나 큰 소리를 낸다. 이것이 외부에서 보면 도망, 찡그림, 비명과 같은 형태로 관찰된다. 혹은 내분비세포도 일종의 운동기관이므로, 아드레날린과 같은 비상호르몬을 방출하기도 한다. 결국 우리는 급격한 운동방출을 ‘고통반응’이라고 부르는 셈이다.

 

 그러므로 체내에 스트레스가 많이 쌓인 상태는 ‘불만의 상태’이며, 스트레스가 급격히 늘어나는 상황은 ‘고통’이다. 그러면 ‘쾌락’은 어떤 것일까?

 

쾌락은 행동을 반복하도록 유도한다. 

 

쾌감은 일반적으로 고통의 부재에서 기인한다. 이는 쇼팬하우어적인 해석과도 일치하는데(쇼팬하우어는 ‘고통은 실체요, 쾌락은 그림자’라는 말로 고통의 부재가 곧 쾌락임을 주장하였다.) 실제로도 고통의 역과정 - 즉 스트레스의 급격한 방출이 곧 쾌락인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불에 데인 상처로부터 감각세포는 맹렬하게 스트레스를 생산하고, 이는 고통을 유발한다. 동물이 이 상처에 찬물을 붓는 순간, 감각세포는 활동을 멈추고 유입되던 스트레스는 중단된다. 이 때 동물은 고통반응을 통해 급격히 스트레스를 방출하고 있었고, 또한 급격한 유입중단으로 인한 상대적 효과가 스트레스의 급격한 하락을 유발한다. 그러면 동물은 순간 모든 공포반응(운동, 경련, 비명 등)을 멈추고 그 순간을 안주하거나 다시 반복하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쾌락이다. 외부에서 보면, 동물은 편안하게 그 순간을 만끽하는 것으로 보인다. 쾌락은 고통보다는 약간 애매한 형태이긴 하지만, 우선은 고통발생의 역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고통의 부재라는 소극적인 의미 대신, 적극적인 의미의 쾌락도 존재한다. 예컨대, 유아는 선천적으로 단맛을 선호한다. 혹은 마약과 같은 약물은 지속적인 쾌감을 제공한다. 이러한 종류의 쾌락에 대해선 다른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감정의 주관적 경험

 

 이것이 과연 ‘고통’의 진정한 기작일까? 물론 이것은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여기엔 ‘고통’이 주는 불쾌하고 부정적인 뉘앙스를 설명할 수는 없다. 이는 퀄리아의 문제이며, 전적으로 주관적 인식의 문제다. 어떤 (인공적인)시스템이 입력신호가 급격히 늘어난다고 정말 ‘고통’을 느낄 것인가? 하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는 마치 특정 주파수의 빛 자극이 과연 기계에게 ‘노란색’의 이미지를 유발시키는가,와 같은 종류의 질문이다. 철학적 난점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기술한 가정은 고통과 쾌락에 대한 일반적인 현상을 정확하게 설명한다. 급격한 스트레스의 증가를 해소하기 위해 시스템은 격렬하게 운동한다. (급격한 증가는 급격한 방출을 일으킨다) - 이것이 우리가 흔히 보는 고통에 대한 반응이다. 고통 받는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결코 알 수 없다. 고통 받는 사람이란 ‘고통 받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사람’이다.